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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 나의 나라

[등장인물]

- 소서노
- 온조
- 비류
- 참모 굉조

[줄거리]

참모 굉조가 전해온 소식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녀의 계획 속에는 추모의 옛 자식이 찾아올 가능성은 배제되어 있었다.
그녀의 계획대로라면 태자인 비류가 추모의 왕위를 이어 고구려를 통솔하고 그 뒤에서 그녀가 조언과 명령을 하여 자신이 꿈꿔온 이상적인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설마하니 추모가 남기고 온 부여의 씨가 제 아비를 찾아 이리로 올 줄이야. 추모가 부여의 여식에게 아들이 태어나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표식까지 남겨두고 갔을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이리될줄 알았다면 나 소서노, 왜 추모를 도와 고구려를 건국하였는가? 나의 뜻, 나의 생각, 모두를 접고 줄곧 그를 도와 이 나라를 일으켰다. 허나 이제 남은 것은 태자의 자리를 꿰찬 부여의 자식이로구나. 그녀는 참담한 기분에 빠졌다. 배신을 당한 기분이었다. 애초부터 자신의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추모의 계략이었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오라!”

굉조가 허리를 굽혀 방에서 급히 나갔다. 소서노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 나무 탁자를 손으로 내리쳤다. 분노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애써 다져놓은 자리에 딴 놈이 집을 세우는 구나! 딴 놈이 기둥을 세워!!”

그녀는 이를 앙다물며 혼잣말로 외쳤다.

“추모, 너는 진정 나를 믿지 않았구나. 나를 따돌릴 구멍을 만들어 놓았어. 네가 예전에 너의 적들을 책략으로 골탕을 먹이더니 이젠 이렇게 나에게 뒷통수를 치는구나. 이 내가 나라 한번 제대로 만들어보겠다는 그것이 그리 고통스럽더냐. 꼴에 너의 나라라고 네 부여의 핏줄에게 물려주고 싶었더냐.”

핏줄이 폭발할 것같은 증오가 들끓었다. 그러나 그녀의 한 면은 또 그 증오를 다스리기 위해 흔들개(신단에 제사를 드릴때 쓰는 제사도구중 하나로 명명)를 손이 아프도록 쥔 채 자신에게 외쳤다. 참아라. 너는 지금 혼자가 아니다. 비류와 온조 너의 두 아들이 있다.
온화하라. 너보다 그들이 더 실망하고 좌절했을 것이다. 그들을 북돋아주고 안정시키기 위해선 네가 더 대범해져야만 한다. 넌 누구보다도 이 역경을 견딜 수 있다. 허나. 어떻게? 어떤 식으로?
그러자 그녀 안의 그녀가 경멸하는 눈초리로 말했다.
너는 왜 남에게 항상 기대려고 하지? 내가? 이 소서노가? 내가 언제........

“.....어머님?”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들어보니 비류와 온조가 어느 새 들어와 무릎을 끓고 앉아 있었다. 비류는 고개를 숙이고 있고 온조는 걱정스럽게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그녀는 어미다운 자애로운 미소를 잠시나마 다시 되찾았다.

“그래, 들어왔느냐. 비류는 왜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느냐, 이 어미의 앞에서.”
“....어머니...........”

비류가 숙인 고개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덩치크고 우람한 한 사내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기엔 너무 어울리지 않는 그의 생애 첫번째 눈물이었다.

“전 기억합니다.....울지 말라고.. 사내는 우는게 아니라고 어머니가 저를 다독이시며 하신 말씀 기억납니다. 아버지를 무덤에 묻는 날이었지요. 하지만 저는 울지 않았지요. 그때는 슬픔이 무엇인지 몰랐거든요.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기에 어머니가 왜 그 말씀을 하시는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고개를 들었을 때 왜 어머니가 제게 그 말씀을 하는지 알았습니다. 그건 어머니가 슬펐기 때문에 어머니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이셨습니다.
그 때 어머니가 제 어깨를 쥐며 '아버지는 부여의 왕족이었다. 너는 그 피를 받아 장차 웅대한 인물이 되어야 한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해주신 것도 저, 기억합니다. 그것이 어머니 자신의 꿈이었고 소원이었다는 것도 저는, 압니다.
여자이기에 이룰 수 없었던 꿈이나마 제게 실어 주시려 한 마음도 저는, 압니다. 그렇기에 오늘은 슬픔을 알 것 같습니다.”
비류는 울먹이는 목소리를 목 안으로 숨겨가며 말했다.
“........어머니를 위해서.....저는...왕이 되었어야만.....했었는데.........저는........죄송합니다......전....너무...끅....”
왕이 되지 못하는 것을 오히려 자기 탓으로 돌리는 비류를 보며 소서노의 마지막 증오의 불씨는 사그라들었다.

“바보같구나.”
“....어머님.”

온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비류와 소서노를 번갈아 보았다. 비류의 어깨는 약간씩 들썩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징징 울어대니 , 마치 3살먹은 어린애같아.....괜찮다, 비류야. 고개를 들어라. 나는 아무렇지 않다. 어깨를 펴라. 나도 잠시 화도 났었다. 하지만 어쩔수야 없는 일. 태자의 자리가 적장자에게로 간 것일뿐이다. 원래부터 그의 자리였으나 우리가 몰랐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거라.”

그러자 온조가 나서며
“하지만, 어머님은요. 어머니가 무녀의 자리에 있어서, 여자라서, 태후라서 은막에 싸여 있을 뿐 어머님이야말로 이 고구려의 실질적인 공신 아닙니까? 그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어머님 아니십니까? 이건 실질적인 배신입니다. 고구려는 그의 것이 아니라 어머님과 추모의 것입니다.”
“온조야!! 아들로써 네 아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전 아버지라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추모도 저를 아들로 생각한 적 없을 터입니다.”

온조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추모는 고구려를 건국하고 한번도 예씨부인과 그 사이에 태어났을 아들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런 그는 소서노와의 사이에서 낳은 온조를 마치 양아들처럼 대하였다. 다정스레 대해주는 것 같았으나 그것도 일정한 선까지 였지,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으로써 대하는 것 아니었다. 그런 온조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으나 소서노는 일부러 차갑게 그의 말에 대꾸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도리에 어긋난 것이다. 다음부터는 함부로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
“비류야, 고개를 어서 들어라.”
말을 들은 비류가 마침내 고개를 들어 소서노를 바라보았다. 수염이 무성한 사내가 눈이 토끼처럼 빨간 채로 눈물을 그렁 그렁 담고 있는 모습은 가관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초췌해보일수 있을까. 한때는 활쏘기와 말타는 것을 즐겨 하던 한 장정이었는데. 소서노는 벌떡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신단 앞에 섰다. 그녀가 모시는 하늘님의 제단은 형형색색의 비단과 옥으로 치장되어 있었고 그 앞에 옥위에 색칠을 해서 만든 제물들이 곱게 놓여져 있었다.
내가 남에게 기댄다라, 이 소서노가 사실은 수동적인 인간이라.

“어머님!”
온조가 갑자기 비장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어머님, 감히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엇이냐...?”
“이 고구려, 이제 저희가 있을 곳은 없습니다. 추모가 죽고 유리가 그 뒤를 이으면 우리는 .... 솔직히 말해서 옛날에는 힘이 있었던 이빨 빠진 태후와 그의 아들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어머니, 어머니의 시간이 지금이 끝이라고 보십니까?”
“말을 어렵게 하는구나. 하고싶은 말을 해보거라.”
“어머니의 야심은 이정도까지입니까? 나라를 하나 세웠는데 어찌 또 하나 만들 생각은 하지 않으십니까?”
“!!!!!”
“어차피 추모도 부여에서 나와 고구려를 만들었습니다. 그 때의 그는 기반도 없는 애송이였지만 지금 저희는 아직 세력도 건재할뿐더러 따르는 무리와 재산은 추모와 비견할 만큼 방대합니다.”
“하하!! 너의 말은 이 고구려에서 나가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란 말이냐? 하하하하!!!! 떠돌이신세로구나, 부여에서 나와 고구려를 만들고, 이젠 여기서 나와서 다른 나라를 세운다라!”
“어머님. 형님과 저는 결심하고 이렇게 찾아온것입니다.”

온조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이 났다. 고개를 들은 비류의 눈빛도 눈물에 젖었으나 반짝이고 있었다. 둘은 굳은 결심으로 인한 비장한 표정을 띄고 있었다. 너는 왜 항상 남에게 기대려고 하지? 그녀안의 그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 진정 그리 하고싶으냐.”
“저희가 진정으로 말하는 것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

소서노는 여전히 몸을 돌리지 않은 채 아무런 말을 잇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손을 모으고 있다가, 마침내 눈을 뜨고 팔을 크게 뻗었다. 그녀의 손에서 흔들개가 떨리고 있었다.

“..하늘님이시여!! 오랫동안 당신을 모신 당신의 종 소서노가 이제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합니다. 긴 시간동안의 많은 체념과 기다림으로 이 날을 기다려 온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축복받을 길은 아니겠지만, 하늘님이시여, 당신의 곁을 지켜온 종이 부탁드리건데 제 평생 손꼽아온 이 꿈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빛을 비춰 주십시오.................”

맑은 물이 가득 담긴 화려한 장식의 큰 대야 위에 하늘을 뜻하는 문양이 수놓인 성스러운 천을 곱게 덮었다. 그리고 한번의 긴 심호흡 후 그녀의 손에서 흔들개가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그것은 약간의 무게있는 곡선을 그리며 천 위에 떨어졌다. 천은 물에 아슬 아슬 닿지 않고 간신히 흔들개를 받쳤다.
그녀는 몸을 돌려 무릎을 꿇고 있는 두 아들에게 웃으며 말했다.

“하늘이 우릴 도우시려나 보구나.”

참고 :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조 건국설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