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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 뱃장이 거감루

[등장인물]

- 비류
- 거감루

[줄거리]

패배의 흰 깃발을 손에 쥔 채 들어간 온조의 위례성 안은 평안했다. 비류를 욕하는 백성들도 있는가 하면, 비류의 백성 중에 가족이 있는 자들은 기뻐하며 그들의 입성을 환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그는 그저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모든 희망은 그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사라져 숨을 쉴 때마다 좌절이 고통스럽게 배어드는 것 같았다.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는 온조가 손을 잡으며 '형님, 잘 오셨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 왜 괜히 가식으로 보일까. 사촌이 논을 사서 배 아픈 심보인가? 분명 착한 온조는 진심으로 하는 말이였을 터인데, 머릿속이 그런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차 그는 어머니인 소서노를 만나 얘기를 하는 것조차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고생이 많았다! 싸움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하였느니라.... 이제 마음을 잡고 다시 온조와 이 나라를 크게 만들어보자꾸나.”

어머니의 갖은 충고와 비판이 모두 자신을 탓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리하여 어느 날, 그는 또 무기력한 채로 달을 보고 있었다. 달마저 자신을 비판하는 듯이 보였던 그는 자신의 활을 들어 달을 조준하고 시위를 당겼으나 손이 순간 활시위에서 잠깐 미끄러졌다. 그는 당황하고 말았다. 이제껏 활솜씨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그였다. 얼마나 정신이 흐트러져 있었길래 시위조차 제대로 당기지 못하는 것인가. 그는 정신이 버쩍 깨여 마굿간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전장을 함께 누벼왔던 친우인 흑치마를 꺼내어 올라탔다.

“내 전투의 의미는 무엇이었던 것인가?”

그는 정처없이 말머리를 향했다.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모두 내보내고 싶었다. 쉬지 않고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렇게 해가 밝아올 때까지 그가 길을 타고 달려 도착한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다였다. 언덕에서 점차 보이는 그 빛나는 푸른 물결을 보았을 때 그는 점차 정신이 멍해졌다. 데자뷔처럼 미추홀이 떠올랐다. 그는 근처 개울에서 지친 말을 쉬게 하고 바다로 점점 나아가니 넓게 펼쳐진 갯벌과 습한 공기가 정말 미추홀과 흡사했다. 그런 바다를 보자 그는 처음에 자신이 세우고자 했던 나라의 이상이 물밀듯이 머릿속으로 파고 들었다.
단지 바다로써 그들을 이기고 싶었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 아닌 아버지와 그의 자리를 가로챈자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그들이 내세울 수 있는 영토란 것, 그것을 뒤엎을 수 있는 것이 이 바다라고 생각했다. 허나...

“나는 원하기만 했을 뿐 그것을 알려고 하진 않았지.”

한숨이 혓바닥을 천천히 기어갔다.
온조의 말 또한 옳았다. 대륙에서 몸을 부지하던 백성들뿐 아니라 비류조차 바다에서 살아가는 방법은 몰랐다. 고기를 잡아볼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고, 농사를 짓고자 하니 짜게 올라붙은 갯벌 땅에서는 애써 뿌린 씨앗조차 죽어버렸으며, 그나마 제대로 된 땅에 농사를 지을라치면 물을 끌어다올 관개시설이 없어 경작하기 매우 힘들었다. 끼니를 때울 것이 없어 갯벌에 밀려온 미역이나 조개, 참게 따위를 주워 배를 불리는 것은 오래 할 짓이 못되었다.
그렇다고 먹을 물이라고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 살기는 딱 힘든 곳이었다. 백성들의 원망은 심해져만 갔다. 그들은 원초적인 욕망을 영위하기를 바랬다. 그가 설계한 계획은 그것이 아니었다. 땅이 아닌 바다를 거점으로 하여 다른 나라와의 무역을 통해 이익을 남기고 그로 인해 부를 쌓아 강성해지고, 그 토대로 인해 힘을 가져 고구려와 대적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고자 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물거품처럼 사그라들었다. 이젠 그 계획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비류는 후회했다. 마음의 정리를 하러 온 곳에서 그의 마음은 더욱 더 심란해졌다. 소금기 있는 진흙이 그의 신발을 보드랍게 감쌌다. 그는 다시 바닷물이 미치지 않는 뭍으로 향했다. 갯벌을 앞두고 있는 약간 가파른 모래절벽 위에 구부러진 소나무들이 몇 그루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 때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 외딴 집 한 채가 있었다. 사람이 살지 않을 것 같았던 이 해안에, 사람이 살고 있었구나. 무얼하고 살꼬. 그가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그 집의 형체는 더욱 분명해졌다. 그 집은 나무를 주축으로 하여 흙과 돌로 벽을 만들고 지붕을 판자와 짚과 돌로 여며 형편없이 엉성했다. 오랜 시간 그 곳에 있었던 듯 색이 바래 있었고 소금기 때문에 돌 위에 하얀 자국이 성성히 남아 있었다. 변변한 탱자 울타리조차 치지 않아 마당이라고는 부르기 힘들 그 공간에는 무언가 창고 같기도 한 것이 서 있었다. 점점 다가갈수록 그 창고는 창고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앞에는 한 사내가 웅크려 앉아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비류는 호기심이 생겼다. 저것이 뭘까? 그는 점차 그 집으로 발길이 향했다.

“거~보시오.”

일부러 짐짓 소리내어 사내를 불렀다. 그러나 사내는 꿈쩍하지 않았다. 큰 소리로 불렀음 직한데, 분명 소리가 들릴만한 거리인데, 사내는 죽은듯이 가만히 있었다. 너무나 조용히 가만히 있어 정말 죽은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정도였다. 벙어리일지도 모른다 하고 생각한 비류는 아예 사내의 곁으로 가보기로 했다. 점점 자세히 보이는 그와 그 창고같은 것을 보면서 그는 그것이 창고가 아님을 깨달았다. 또 멀리서 본 사내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나 가까이의 사내는 무언가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비류는 그의 등 뒤에서

“이보시오.”

하고 외쳤으나 사내는 당연히 듣지 못했다. 하는 수없이 그는 그의 어깨를 두어번 살짝 두드렸다. 그제서야 사내는 하던일을 멈추고 등 뒤를 돌아보았다. 새까맣고 살집이 있었으나 순박한 얼굴의 그는 잠시 멍하니 보다가 깜짝 놀라 엉덩이로 뒤를 기었다.

“...누,누,누,누,누구시오?”

“놀라게 해서 죄송하오. 나는 잠시 이 곳을 지나가던 사람인데, 사람이 있을지 않을 것 같던 곳에 이 외딴 집이 한 채 떡하니 있으니 궁금하여 한번 들렀다오.”
하고 그가 하던일을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군은 무슨 일을 하시는거요?”
“..나는....이,이걸 만들고 있소...”

그가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을 두드렸다.

“아하.... 멀리서 나는 이것이 창고인줄 알았지요. 그런데 창고는 아닌 것 같고. 어디에서 쓰는 물건이요?”

사내가 묘한 표정으로 비류를 바라 보았다. 당연한 것을 왜 물어보느냐는 식의 표정과 또 말하는 것이 자랑스럽고 우위에 찬듯한 표정이 한데 섞여 있는 듯했다. 허나 그래도 그는 여전히 어벙해 보였다.

“...배......”
“배?”

배? 바다와 강에서 쓰는 이동수단.. 바다에서 타고다니는 것은 알았지만 비류가 인생에서 배라는 것과 배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저 꽤나 큰 강을 건널때 뿐이었다. 그런 그는 당연히 배의 모습을 작은 나룻배정도로만 한정하여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굉장히 크구랴...........? 이런 것은 처음이오. 이 부분이 그럼...?”
“미... 밑바닥....이오...”
“이 창고만한것이 밑바닥이라고 하셨소? 그렇다면 배 크기는 대체 얼마나 하는 것이오?”
“...저..적어도 이것...여섯배는.....되. 되겠지요.”

여섯배!! 비류는 황홀경에 가득 차 그 판자 떼기를 바라보았다. 허공에 그 배가 그려지는 듯했다. 그런 그를 눈치챈 사내가 자못 기뻐하며

“...아지,직 연....습중..이오.....”

하고 다시 작업에 착수했다. 허나 누군가가 자신의 작업을 인정해 준 것은 처음인 듯 들떠하기를 마지 않아, 동작이 아까보다 훨씬 커지더니 어린아이마냥 실수를 연발하였다. 비류는 배 밑바닥을 바라보는 것을 멈추고 그에게 크게 외쳤다.

“굉장히 멋있으시오!! 나의 사부가 되주시오. 내가 사부라 불러드리리다. 이 허허벌판에서 혼자 이런것을 만드시다니, 참으로 멋있으시오 사부!”
“나....아얏!!...아으..으....나는...그게......사부라고 불릴 놈이 못되....오.”
“아니, 뭐가 못된단 말이오? 나 같은 졸부도 사람들에게서 한때는...........”
왕이라 불렸었지요. 라는 뒷 말을 목에 다시 삼키고,
“.....노름으로 꽤나 날렸지요. 이래뵈도 나 따르는 무리들이 꽤나 있었는데, 다들 사부,사부...하면서 따르는 것이 귀찮았더란 말입니다. 그런데 사부가 하시는 작업이 제가 노름질 하는 것과 비교가 되십니까? 사부 중에 대사부이시오.”
“허허....구,군은 웃기는 사람이구랴.....난생 사부라는...소리는 처,처,음 들어보았군...그려..”
기꺼이 기뻐하는 사내를 보며 비류는 그의 옆에 털썩 주저 앉았다. 우울했던 기분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대사부, 우리 통성명이나 하오. 내 이름은 비류요.”
“.................거,...”
“뭐라구요?
“......거,거..감.....루라고 하오.”
“그럼 감루 대사부라고 부르면 되겠구랴.”
“...좋,,좋도록 하시오.....”
순진히 대답하는 그를 보며 비류는 약간 그를 떠보고 싶어졌다.
“그렇다면, 감루 대사부는 여기서 왜 혼자 배를 만들고 계시오. 나같으면 근처 소국에 몸을 의탁하여 국가적으로 배를 만들겠소. 그러면 명예는 물론 재물도 쌓이고, 심심치는 않을 터인데.”

거감루는 웃으며

“...재물,, 허허.. 명예...허허허.....그런..그런 것을 원했다면 그......렇게 했겠지요...그,그저 나는....그저....바다로 가고 싶었을 따름이오.....”

바다, 한 때는 자신도 가고 싶었던 바다. 해맑은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비류는 다시 한번 자신이 못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어린아이가 떼쓰듯 미추홀에서 자리를 잡은 주제에 배 모습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거기다 거감루의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바다에 대한 원초적인 욕망은 야심에 찌들어 앞 뒤 가리지 않고 행동한 자신의 목적과는 전혀 상반된 것이었다. 부끄럽기가 짝이 없었다.

“.....배를....타고 어디로 갈 것이오?”
“,,,바,바다는 넓소.. 아,아,아버님은 항상 바다를 원하셨,셨고...그.....래서..배를 만드는데 평생을.....바치셔..었소.내가 그 업... 업을, 잇는것.....이오...”

나무를 만지작거리며 말하는 감루의 눈빛은 비류 자신이 봤던 그 어느때보다 형형했다.

“바다는 넓고, 갈곳은 많단 말이오?”

그의 말에 감루는 고개를 돌려 비류를 쳐다보았다. 감루의 입술 끝은 귀를 향해 붙어 있었고 주름살 많은 얼굴에 박힌 검은 자위 많은 눈은 마치 장난꾸러기의 눈을 보는 듯 했다. 그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였다. 그 모습은 자못 진지했다. 바다에 자기 자신을 걸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될까? 얼마나 있는 줄은 모르겠지만 그 중에 이 자는 들어갈 것이다.

“그렇다면.....대사부... 만약에 말이요...만약에..”

입에서 말이 떨어지지않았다. 왠지 자신이 해선 안되는 말같았다.

“만약......대사부, 바다로 가신다면...나도 데려가 주실수 있겠소?”


온조의 성은 여전히 평안했다. 흑치마의 발걸음은 가뿐했고, 백성들은 비류를 보며 가끔씩 시시덕거렸다. 비류는 바삐 걸음을 옮겼다. 마굿간에 들린후 내성으로 달려갔다. 주위에서 많은 석공들이 성벽을 다듬고 있었다. 소서노의 침전 앞에 있는 여러 궁녀를 내치고 뛰쳐들어갔다. 그녀는 허리를 곧이 세우고 경서를 읽고 있었다. 급히 들어온 비류를 보며 놀란 눈치였다. 비류는 형식상의 인사를 여러 번 하고 크게 외쳤다.

“어머님,아침 인사가 늦었습니다.”
“아침인사라고? 지금 해가 중천이다. 지난밤엔 무슨 일로 들어오지 않았느냐.”
“그 건에 있어서 긴히 말씀드리고 싶은게 있습니다................”

비류의 눈이 거감루처럼 반짝였다. 이미 그의 맘은 바다였다. 드넒은 백제의 바다가 말을 자신의 계획을 어머니에게 거침없이 쏟아내는 비류의 속에서 거대하게 출렁거렸다.

참고 :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조 건국설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