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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 서기, 편찬되다

[등장인물]

- 근초고왕
- 태자 근구수
- 내신좌평
- 위사좌평
- 내두좌평

[줄거리]

“요즘도 폐하께서는 태화궁에서 나오시질 않는 모양일세그려.”
“혹 용체에 무리라도 가면 큰일인데 말입니다. 치양에서 대승을 올리고 돌아오신지 이제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매일 일곱 시간 넘게 업무에 대한 보고를 받고 계시니…….”
“폐하의 용력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노고가 너무 크신 것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 사람.. 좌평 쪽 인사입니까?”

370년 초, 아직 봄이 다가오지 않은 2월의 날씨는 쌀쌀하기 그지없었다. 밤늦게 좌평회의를 끝마치고 내궁 쪽으로 한적하게 걸으며 대화를 나누던 내신좌평과 위사좌평쪽으로 자색 복장의 한 사람이 다가왔다.

“어두워서 잘 보이질 않는구먼.. 키가 훤칠한 것을 보니... 내두좌평이구만 그래. 아니, 저사람 언제 저렇게 헬쓱해졌누.”

과연 그들 곁으로 다가와 목례를 꾸벅한 내두좌평의 얼굴에는 검은 기미가 선으로 내리그은 듯 죽죽 그어져 마치 사흘 밤 잠 못잔 사람처럼 초췌해 보였다. 내신좌평이 혀를 끌끌 차면서도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 또 밤을 샜는가. 젊은 사람이 고생이 많구먼.”
“별말씀을요... 그나저나 이거야 일이 밀려서..... 좌평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폐하께서 내린 도량형 통일에 대한 특별안을 맡고 있다고 들었네.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하루 이틀에 끝낼 일이 아닐 텐데 열심히 하는 게 장하지... 좌평회의에는 당분간 자네 쪽의 달솔을 참가시켜 기록하게 할 터이니 참고하면 될 걸세. 여기는 걱정하지 말고.”
“감사합니다. 내신좌평어른. 그렇지 않아도 방금 막 폐하를 찾아뵙고 오는 길입니다.”
“아니, 폐하께서 아직까지도 업무를 보고 계신단 말인가?”
내두좌평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말도 마십시오. 또 무엇을 생각하고 계시는지 산더미 같은 자료들을 쌓아놓고 보고 계셨는데... 율령 반포 전에 죽간을 쌓아두고 부르셨던 게 생각나서 잠시 아찔했습니다.”
내두좌평의 웃음에 내신좌평과 위사좌평도 껄껄 웃었다. 위사좌평이 웃음을 닦아내고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덕분에 나라의 기강이 꽤나 단단히 다져졌지 않은가. 참고하라며 내려주셨던 고서들 파던 기억은 끔찍하네만 그래도 그로 인해서 더욱 나라가 실해져가고 있으니 나는 보람되기 그지없네.”
“맞습니다. 밤을 새면서도 힘든 줄을 모르겠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폐하께서 격려차 황림하신 이후로 저희 부 사람들을 비롯해서 왜쪽에서 등용된 사람들이나 중국인사들도 거듭 매진하고 있어 효과가 큽니다.”
“아, 저기 보십시오.”

내두좌평이 가리킨 문에서 한 젊은 무리가 막 나오고 있었다. 뽀얀 얼굴에 발그레한 뺨을 가지고 있었으나 전장의 흙내와 갈수록 위용과 위엄이 덧붙은 세월에 그만 쑥쑥 커버린 태자의 모습이었다.
어느 정도 거리가 멀지 않아 태자가 그들을 알아볼 법도 했지만 무엇이 그리 바쁜지 그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휙휙 날랜 걸음으로 금세 태화궁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폐하께서 또 태자마마를 부르신 모양이군.”
“요새 부르심이 부쩍 느셨습니다.”
“그나마 태자께서 좌우로 잘 보필해주시니 우리도 한결 나은 편이지.”
“병술에만 뛰어나신 줄 알았더니 문무에 능통하셔서 어찌 그리 폐하를 닮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에 대한 칭찬이 대신들 사이에서 춤을 추고 있는 줄도 모른 채 태자는 걸음도 바쁘게 궁 안쪽으로 접어들었다.
초기에 미진했던 나랏일과는 달리 근초고왕의 노력과 뛰어난 운영 수완으로 어느 정도 국정이 정비되어가던 370년의 이른 봄, 근초고왕은 우연히 중국에서 건너온 역사 사료 두어 권을 손에 넣게 되었다. 바쁜 업무와 격무 중에도 조용히 옥좌에 앉아 찬찬히 사서를 한참 동안 살펴본 이후, 왕은 조용히 태자를 불러 일렀다.

“부르셨습니까. 아버님.”
“그래. 왔느냐.”

흐릿한 촛불에 의지해 무언가를 골똘히 보고 있던 왕은 태자가 기척을 내서야 그가 왔음을 알고는 반기며 고개를 들었다.

“늦은 밤중에 아직도 침소에 드시지 않으셨습니까.”

자신의 옆에 쌓인 두루마리와 목간더미를 가리키는 부왕의 모습에 태자는 빙그레 웃었다. 치양전투에서의 2만 고구려군을 대파한 것을 시작으로 태자는 어느새 백제의 없어서는 안 될 거목으로 쑥쑥 성장하고 있었다. 왕으로서도, 아버지로서도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아들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 짓던 근초고는 문득 태자가 자신이 보고 있는 책에 눈길을 주고 있음을 알았다.

“무엇을 그렇게 심취해서 보고 계신지요.”
“중국에서 들어온 사서 몇 권이다. 내법좌평에게 일러 몇 권 구해보았다.”
“그렇군요. 사서라...”
“그래. 사서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지.”

근초고왕과 태자는 서로 묘한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태자. 내가... 사람이 필요하다. 식견이 뛰어나고 뭇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오래된 고목나무 같은 사람이면 좋겠구나.”
“명심하여 뜻을 받들겠습니다. 아바마마.”

씩씩하게 대답하는 태자를 보며 근초고왕은 기분 좋게 웃었다. 아비가 말을 하지 않아도 이미 자식이 그 눈빛만을 보고도 서로의 뜻이 통하는 이심전심이었다.
명을 받든 태자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물색하여 얼마 후, 한 인사를 천거해 올렸다.

“고씨 늙은이 이옵니다.”

흰 새치가 제법 옆머리를 파고들었으나 그런 세월조차도 단아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지런히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앉은 모습의 노학자였다.

“몇 년 전에 신설되었던 교육기관인 국학관(가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박사를 맡고 있는 사람이온데 깨끗하고 지조 있는 인물이라 생각되어 모셔왔습니다.”

태자와 함께 부복하여 앉아 조용히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남자를 근초고왕은 사뭇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내가 그대를 어디선가 본 듯도 하다. 낯이 익구나.”
“그럴 수밖에요. 범은 반드시 용 승천한 고개에서만 터 잡는다 하였습니다.”
“호오?”
“인물은 인물을 알아본다는 뜻입니다.”

재치 있는 대답에 즐거워하며 근초고왕은 그를 시험해 보기 위해 여러 가지의 난제와 주제를 제시하였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고흥은 똑부러지고 간결한 대답으로 높은 식견을 내보였다. 여덟 번째 질문이 끝났을 무렵 갑자기 황좌에서 뛰어내려오듯 내려온 근초고왕은 고흥의 손을 덥석 잡았다.

“국학관의 박사라 하였으니 이미 그 학식과 식견은 익히 짐작하고 있었네. 허나 나는 무엇보다도 그 배포와 긍지가 제법 마음에 드네. 무릇 한 나라의 사를 적겠다면 이 정도의 긍지는 있어야지.”

껄껄 웃으며 노학자를 일으킨 근초고왕의 얼굴에는 흡족함이 넘쳤고 갑작스런 부름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대답한 노학자도 입가 끝으로 빙그레 웃었다.
그가 바로 박사 고흥이었다. 고흥은 여색보다 언어와 문자를 부인 삼았으며 권력을 천하게 생각하는 지조 있는 사람이었다. 또한 아부 떨지 아니하며 돌려 말하길 싫어하고 생각한 것을 직접 말하여 뒤끝이 없고 깔끔했다. 근초고왕은 박사 고흥을 마음에 들어 했고 세간사를 안주삼아 같이 술을 마시며 국정에 관해 의논할 수 있는 말벗이기도 했다. 이에 왕이 고흥에게 일을 맡기니, 그가 일을 기록함에 있어 왕을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말을 흘리지 않았으며 객관적이면서도 계산적이며 치밀하고 신랄하게 비판도 하며 대대로의 후손들과 백제의 미래를 위해 한 글자도 놓치지 않았다.
이로써 백제는 나라에 창건한 이래로 일을 기록함이 없었지만 박사 고흥을 얻어 비로소 서기를 갖게 되었다.

참고 :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30년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