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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 왕국의 반석

[등장인물]

- 근초고왕
- 내신좌평
- 다섯 좌평들

[줄거리]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이루려면 무엇보다도 내실이 튼튼해야한다고 여겨오던 근초고왕이었다.
그가 계획하고 만들고자 하는 나라는 작고 영토에만 급급한 대륙에만 있지 않았다. 저 옛날 비류가 꿈꾸었던 것처럼 그는 남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바다와 해양의 중요성에 주목했다. 그를 위해서는 튼튼한 기반이 잡혀있어야만 했다. 숨 돌릴 틈도 없는 전투와 칼날 같은 외교의 와중에도 그는 나라의 기초이자 내실인 국정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번에 그대들이 다루어야 할 꽤나 중차대한 일이 있소.”

하얀 눈꽃 속에서 파르스름한 나무 싹이 고개를 쳐들 무렵이었다. 한참을 숙고하던 근초고왕이 먼저 슬쩍 운을 뗐다. 다섯 좌평들은 긴장하여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한 채 서로를 힐끔 쳐다보았다. 누구 못지않게 권력을 휘둘렀던 전 좌평 우복의 시신이 차갑게 식은 지 반년이 채 안된 시기였다. 조용했지만 신속히 처리되었던 우복의 제거는 아직도 신임 좌평들의 목덜미에 축축한 식은땀을 선사하곤 했다.

“내신좌평.”
“...예? 예, 폐하!”

조용히 자신을 부르는 왕의 목소리에 좌평들의 수장인 내신좌평은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다른 신하들도 움츠리듯 고개 숙였다. 그런 신하들의 반응에 왕은 재밌다는 듯이 말했다.

“이 자리에 병관좌평은 부르지 않았소.”
“...예?”
“ 내가 경들을 잡아먹을까봐 그러오?”

느릿느릿한 왕의 웃음기 있는 목소리에 내신좌평은 고개를 들어 비어있는 한 좌평의 자리를 확인했다. 군권을 담당하고 있는 병관좌평이었다. 그제야 좌평들은 지난 번 회의 때, 왕이 병관좌평으로 하여금 군대를 점검하고 정리하도록 국경 목책지대로 보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재위 초, 어린 자신을 꼭두각시 삼아 국정을 장악하려 했던 우복에게 근초고왕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즉위하자마자 신속하게 재외 병마사를 장악, 병관좌평과 함께 내신좌평이었던 우복을 그의 사저에 가둬버린 일이었다.
강대한 사병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꼼짝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모든 권력과 관직을 몰수당했던 우복은 이후 정계에서 강제로 은퇴당하다시피하여 쓸쓸히 죽어갔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의 배경에는 재위 2년도 되지 않았던 근초고왕과 그에 대한 충성심으로 굳게 다져진 병권좌평이 있었다.
이미 오래전 일이지만 아직도 궁성 내에서 그 일을 잊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섯 좌평들을 모두 불러놓은 자리에 병관 좌평이 없다는 뜻은, 왕이 그들에게 맡길 중차대한 일이라는 것이 적어도 군사행동을 요하는 거나 그에 관계된 일은 아니라는 것으로 해석해도 무방하였기에 좌평들은 한시름 놓은 표정으로 왕을 바라보았다.
웃음으로 신하들을 차분히 둘러보던 왕이 드디어 한마디를 꺼냈다.

“이것이 이번에 그대들이 맡아 힘써주어야할 사항들이오.”

왕이 곁에 있던 내신들을 쳐다보았다. 즉각 준비되었던 두루마리들과 목간들이 좌평들의 앞에 쏟아지듯 쌓여졌다.

“중국 고대 은, 주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집필되었던 공식, 비공식 역사서들과 그에 따른 주석과 주석에 대한 편찬서, 해석서 그리고 참고자료들이오. 대부분 이제껏 중국에 보냈던 사절들과 요서 쪽의 우리 사람들이 보내온 사본은 좀 살펴보니 꽤 쓸 만한 듯 보이오 만 후연에서 보내온 자료들은 어느 정도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내용들이 많소. 하지만 참고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을 듯싶구려.”

“폐하... 이것들은 대체?”

좌평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왕을 쳐다보았다. 적어도 백여 개는 될 듯 한 두루마리와 목간들을 보며 왕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백제 시조께서 나라를 세운지 기백년 이상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의 체계는 바로잡혀있지 않소. 더 큰 나라로 뻗기 위해서 수천 년이 지나도 흔들리지 않을 튼튼한 나라가 나는 필요하오. 경들이 그 일에 앞장서서 우리 백제의 반석을 다지는 기초 작업을 해줬으면 싶소.”
“기초 작업이라 하심은....”
“우리만의, 우리에게 맞는, 백제만의 율령과 관직체계, 그리고 문자 체계를 정리하시오.”

명이 내려졌다.
시대를 앞선 식견을 가졌던 근초고왕. 그가 가장 먼저 손을 대었던 부분은 그 동안 정비되어 있지 못하던 백제의 국가 체계였다. 명을 받은 좌평들은 바삐 움직였고 혼신의 힘을 기울인 결과 백제는 369년, 한반도 국가 중 최초로 율령을 반포하였다. 율령의 반포는 그것을 집행할 수 있는 관직의 체계와 관료층의 양성을 필요로 하였는데 율령에 크게 흡족스러워 하던 근초고왕은 이에 예전부터 신하들에게 진행시켜왔던 국립교육기관의 설립을 서두르게 하고 이어 박사제도를 도입하며 외국인들도 주저 않고 등용하는 등 신료 양성에 만전을 기울였다. 근초고왕은 강력한 국가뿐만 아니라 모든 곳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토대와 기반을 삼국 중 가장먼저 구축함으로써 해상왕국의 기틀을 잡은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참고 :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