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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 도자 선생

[등장인물]

- 왕인
- 도공

[줄거리]

왕인이 학사 벽에 있는 작은 창문에 시선을 내밀어 하늘을 보니 햇빛이 너무 따사롭고 바람도 적적히 부는 것이 바깥에서 놀기 딱 알맞은 날씨였다. 그러자 경서를 읽는 학우의 목소리도, 아울러 경서의 뜻을 풀이하고 있는 선사의 가르침마저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는 낮은 상에 놓인 경서를 보았다. 어느 쪽을 읽고 있는지도 헷갈렸다. 그는 자신의 친우이자 가문의 친우인 굴부를 쳐다보았다. 옆자리에 앉아서 경서만을 묵묵히 보던 굴부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굴부의 등을 치며 손을 버쩍 들었다. 화장실에 간다는 수신호였다. 왕인은 선사가 그것을 보았는지 안 보았는지도 확인하지도 않고 살금살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입에서 웅얼거리며 한자를 외는 무리들에서 벗어나 신선한 공기와 새소리를 느끼니 명치가 확 트이는 것 같았다. 그래봤자 한 인간의 넋두리 아닌가. 또 그것을 가지고 자기가 해석을 해서 직접 이해하고 느껴야 할 것이지, 남이 이해한 뜻을 베껴서 이해하는 것은 또 무엇인가? 정말 할 짓이 아니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학사에서 수학하는 것이 어느 세월에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게 되어 강제로 아버지에게 붙들려 학사에 온지 어언 5년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낮에는 산과 들을 하인들과 함께 다니며 산짐승과 물고기, 약초들을 보았고, 밤에는 중국에서 구해 온 경서들을 읽으며 나름대로 풀이하고 해석본을 쓰곤 했었는데 학사를 가기만 하면 예습과 복습을 숙제로 내어 주니 낮에는 학사, 밤에는 숙제를 하니 도저히 놀 틈이 생길 구석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아버지 몰래 학사시간에 중간에 나와 휴식하기를 즐겼다.

"무얼 할까? 장터로 가서 지자패들을 불러 노름이나 할까? 아니면 또 뒷산 개릉골 바위위에서 낮잠이라도 거하게 퍼질러 잘까. 대나무 낚시로 고기나 낚아 볼까.... 아니다 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아. 오늘은 특별한 걸 해야한다. 이런 하늘의 은혜를 헐값으로 쓰면 내가 죄를 받지."

그가 야트막한 봉우리 사이의 길을 지나며
"좋다. 오늘은 이 길을 따라 쭉 걸어가 내가 못 가본 곳을 가보자."
하여, 젊은 혈기의 왕인은 무작정 결정을 내리고 길을 걸었다. 가며 가며 지나가는 풍경은 살던 마을과는 사뭇 달랐다. 구름이 따라오는 것 같아 하늘을 보며 걸었다.
지나가던 아낙이 미쳤나보다 하고 중얼거리며 피했다. 왕인은 속으로 웃었다. 마을의 장터로 들어서니 그 장터가 제법 크기가 커서 그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닭 두 어 마리와 계란 뭉치를 맡에 두고 있는 상인과 생선절임을 고함으로 팔려는 상인을 지났다. 그의 마을보다 두 배는 더 늘어서 있는 장사치들을 보며 왕인은 허리춤에 찬 돈 꾸러미를 만졌다. 꽤 오래 걸어와 배도 목도 빠듯하게 비어 있었다.

그 때에 그의 허리도 안 되는 검은 것이 그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머리 좋은 사람이 아니라도 알 수 있듯이, 그 검은 것은 돈 꾸러미와 함께 사람들 틈사이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너무나 빠르게 일어난 일에 잠시 멍해 있던 그는 그 인영을 향해 재빠르게 쫓았다. 저 돈을 다 잃으면 아버지가 화를 낼 것이 분명했다. 저 검은 것에게 일순 증오가 치밀어 올랐다. 시장에 있는 사람의 어깨란 어깨는 다 스치고 갔을 만큼 달렸다. 숨이 가쁘게 차올라 쉬고 싶었지만 달리면 달릴수록 검은 것의 끄트머리는 빠르게도 사라졌다. 한참을 뛰니 이것 또한 흥분이 되었다.
왕인은 점점 웃으며 검은 것을 향해 달렸다. 잡을 것 같기도 하고 잡을 수 없을 것 같기도 한 거리에서 안달복달하는 마음은 아드레날린을 점점 분비시켜 그를 더욱 더 활달히 뛰도록 했다. 이것이 하늘이 내게 준 오늘의 색다른 경험인가? 나름 재미있군. 하여튼 상관없다, 어떻게든 잡고 말리라. 근육이 고조되고 땀이 구멍에서 솟아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팔을 있는 대로 뻗었다. 힘을 준 손가락 속에 질기고 거친 천의 질감이 느껴졌다. 검은 것은 더욱 더 뛰며 저항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검은 것은 왕인보다 몸이 절반은 작았다. 쭉정이 같은 몸에서 힘을 짜내어 벗어나려고 했으나 왕인이 그의 어깨를 잡고 자신의 쪽으로 비틀자 비로소 멈추었다.
속눈썹에 붙은 땀 사이로 흐릿흐릿하게 보이는 상이, 아. 거지아이로구나. 하기는 부잣집 도련님이 돈꾸러미를 훔치고 시장바닥을 뛰어다니진 않겠지. 잡혀진 어깨가 바릿바릿하게 흔들리자 그는 어깨를 놓고 손목을 살짝 잡았다. 아이는 머리카락 사이로 그를 쳐다보더니 손목을 다시 쳐낸채 다시 뛰어가 버렸다.

"야!!! 이런......"

다시 쫓아 뛰어가려고 했으나 잠시 긴장이 풀어진 탓인지 무릎이 힘없이 땅바닥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낭패였다. 낯선 마을에서 가지고 있는 돈을 다 빼앗기고, 아버지가 경서를 사라고 주신 돈인데다가 배도....... 고팠다. 젠장, 아무렴 어때. 될 대로 되라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그 자리에서 누워버렸다. 아까 따라오던 구름이 없었다. 그런 하늘은 더욱 그를 짜증스럽게 했다.

"이 고깃덩어리는 뭔가? 숨도 쉬고 땀도 흘리는 것이 살아 있는 것 같은데 길바닥에 누워 있는 것을 보니 다 죽어가는 것이로구나. 에라 내가 잡아다가 끓여먹어야겠다."
".......?! 이보쇼, 누굴 끓여먹는단말이요."

그가 놀라 일어나니 머리맡에 늙은 노인이 서 있었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낮은 신분임에 분명했다.

"아니, 뭘 그렇게 놀라나. 나는 이것을 보고 일렀으이."

노인이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반 죽은 토끼를 들어 가리켰다. 그는 괜히 민망해져서 입을 삐죽이 내밀었다.

"아....나는 몰랐소. 미안하오."
"도련님을 보아하니 귀한 집 자제인 듯 한데 여기까진 웬일이오?"
"여기가 어디요? 나는 내 돈 꾸러미를 훔쳐간 도둑 꼬맹이를 잡으러 이까지 왔소."
"여기는 도기촌이오. 정확히 말하면 북쪽 도기 가마 열 아흔 번째 화덕의 앞이외다."
"도기촌? 그릇 만드는 곳이란 말이오?"

그가 놀라 옆을 돌아보니 노인의 말대로 진흙으로 덕지덕지 만든 우스꽝스러운 흙집이 보였다. 다른 흙집들도 주위에 늘어서 있었지만 유독 그 흙집은 어디 부분이 주저앉은 듯 더 낡고 망가져 보였다.
도기촌은 아버지께 한번 들어본 곳이었다. 아버지는 왕이 평민 이하의 것과 죄인을 수용하기 위해 만든 집단 가마터라고 했다. 그릇 만드는 것이 궁금했던 어린 왕인이 도기촌에 한번 놀러가자고 조르자 갈 생각더러 말아라. 문둥병이들도 있다. 하며 아버지가 겁주었었다.
문둥병이들!! 생각이 나자 왕인은 의식적으로 노인에게서 물러섰다. 다행히 노인의 몸은 어디도 일그러지지 않았다.

"영감은 문둥병자가 아닐세 그려?"

노인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허허 문둥병자? 여기 사람들 어디가 일그러지고 다쳤소? 이 사람들을 이곳에 넣은 사람들이 일그러졌을 게요."
"영감, 없으면 없는 거지 큰일 날 소리를 하시오. 임금님이 문둥병이 마냥 일그러졌단 말이오?"
"도련님은 알고 보니 겁쟁이구랴. 임금님이야 옥같이 빛나는 분이시지만 그 주위를 둘러싼 귀족이란 놈들의 생각과 정신이 문드러졌소. 거기에 병균이 퍼졌단 말이오....허허.. 어쨌든 어디서 무엇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여기는 문둥촌이 아니라 그저 남들 보이지 않는데서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이 있는 데요."
"영감도 그럼 남들 보이지 않는 데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란 말이오?"
"그렇지. 그건 또 어떻게 똘똘히 잡아내는 것인고. 도련님은 머리가 좋은가 보오. 그런데 배는 고프지 않소, 도련님?"

그가 애써 귀족의 품위를 지키려 사양하려 했으나 배가 먼저 답하였다. 꼬르륵. 노인이 웃으며

"곧 있으면 해도 질 터이니 누추하지만 이곳으로 드시는 것이 나을 거요. 아무래도 거기 땅바닥보다는 이 문드러진!! 집이 그나마 더 온기가 있을 테니."

집에 가는 게 나을 거 같은데 마지못해 따라간 토방의 안은 의외로 덥덥한 온기가 흙내와 섞여 감돌았다. 천장 축대를 가로질러 드러누워진 새끼줄 위에 드문드문 옷가지가 걸려 있었고 붙박이 진흙 책상과 옆에는 쭈글한 등잔이 다 타버린 지방 덩어리를 안고 덩그러니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머문 곳은 누더기 이불 같은 것 사이로 보이는 책더미였다. 언뜻 봐도 이제껏 경서 꽤나 읽었다는 왕인조차 처음 본 경서들이 노끈에 묶인 것이 여럿 되었다. 그는 신도 벗다시피 무릎걸음으로 기어가 경서 더미를 훑어보았다. 그것들은 오랫동안 펼쳐지지 않은 듯 표지 부분의 글자가 닳아 있었다. 그러나 또 오랫동안 읽었던 듯 책장 끝부분이 헤지고 부르트도록 닳아있었다.
이 영감은 무얼 하는 작자인가? 이토록 많은 경서를 많이 읽고, 또 지금은 거의 쓰레기마냥 방치해 두었구나. 한낱 도공이 아니란 말인가? 그 때에 노인이 쪽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으후우..... 춥다. 바람이 벌써 차갑구먼. 도련님이 바깥에 있었으면 지금쯤 추워서 벌벌 떨었을 게요..... 뭘 그렇게 보고 있소? 가마 안에다가 아까 그 토끼 고기로 죽을 해서 넣어 놓았는데. 아! 죽 말고 그냥 고기가 더 맛있었으려나? 에라.. 그냥 잡수시오. 따질게 뭐가 있겠소. 배가 고픈데 말이요.......거기 이불 좀 냅다 던져 주오. 손과 발이 진창 고드름이 돼 버렸지 뭐요."
"이불? 이불이라면 여기 이 거적때기를 말하는 거요? 여기 있소."

그는 샐쭉이 이불을 던졌다. 이불을 던지자 책더미는 더욱 선명히 몸을 드러냈다.

"허기만 면하면 되겠지. 소금은 넣었소?"
"소금? 소금이라고 이른거요? 그 귀한 소금이 여기 어디에 있겠소? 그냥 넙죽이 드시구랴. 귀한 집 도련님이라 그런지 소금 맛에 찌들었구먼. 소금은 독이오. 먹으러 덜 마시오."
"소금이 독이라고? 소금이 왜 독이오? "
"그 맛이 죽을 만큼 짜니 그것이 독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또 그 값은 죽을 만큼 비싸니 그것 또한 독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소금을 얻기 위해 또 소금을 팔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으니 그것 또한 독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오? 먹지 아니한 것만 못하외다."

또 이 도공이 하는 말이 기상천외했다. 왕인은 기꺼이 그 말에 감동을 받았으나 자존심이 상하여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체 하였다.

"하지만 소금을 넣으면 맛있잖소. 영감은 소금을 먹어본 적 없으니 그런 말이 나오는 게요"
"..그럴 테지요. 가난한 도공이라 짠 맛이라고는 그릇 굽다가 코에서 떨어진 땀 맛 밖에 모르오. 껄껄껄 ...."
"허허허.....설마 땀맛밖에 나랴."
"뭐요?! 장난꾸러기구랴. 아니, 그래. 그 맛이 묘한 것이 이상했단 말이지. 알고 보니 혹시.........??"
"크크크크.....그만두시오, 이제 음식을 자실 시간인데 더러운 얘기를 해야겠소?..크크큭....."
"흐흐흐....많이 더러운 얘기인가?...이크, 죽 좀 보고 와야겠군. 가만히 앉아 계시오."
상상을 하니 더욱 웃겼다. 도공은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많은 것을 알고 있고, 굉장히 호감을 주는 인물이었다. 정말 말 그대로 누추한 곳이었으나 도공은 그를 어디에 있을 때보다 편안하게 해주었다.

"도련님."

도공이 쪽문에서 빼꼼 얼굴을 내밀며 죽냄비를 내밀고 또 다른 한손으로는 기다란 호리병을 든 채 흔들었다.

"주반으로 죽이라니....거참.......영감도 희한하구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물로 주반을 하고도 먹는다오."
하며 각각의 그릇에 술을 부었다.

"직접 담근 술인데, 이제 막 맛있게 익었지요."
그 그릇 또한 방에 있던 등잔만큼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영감은 말솜씨는 있지, 그릇 만드는 솜씨는 별로 없는 것 같소. 도공인데 말이지요. 대체 뭐하는 사람이오?'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그는 다시 꾹 참았다.


"하지만 나또한 글 배우는 학생인데, 본분을 다하지 않고 이렇게 나와서 술이나 마시고 있지요."
"허허...부잣집 도련님이신 줄은 알았는데 또 수학하다가 뛰쳐나오신 줄은 꿈에도 몰랐구려. 어찌하다가 중도에 이곳까지 행차하셨소?"
"내 5년 전까지는 산이면 산, 들이면 들, 온갖 산수에서 배우고 느끼는 자유를 가졌으나 아버지의 권유로 그 이후 학사에서 가르침을 받게 되었소. 본디 자유의 맛을 알았던지라 학사에서 오는 압박을 쾌히 견디지 못하고 여러 변명과 이유를 대어 중간에 빠져나와 저잣거리를 돈다거나 산과 들을 노다닌다던가 하며 즐겨왔지요. 그런데 오늘따라 그냥 길을 걷고 싶어졌소. 내가 모르는 곳을 그냥 아무렇게나 걷고 싶어 이리저리 걷다가 생전 못 와본 낯선 마을에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그만 고 작은 수적이 내 돈 꾸러미를 훔쳐 그를 쫓아 예까지 오게 됐소."
"허허허허..... 어쩔 수 없이 온 것이구랴. 도련님, 이제 여기 그 자유가 있는데 그 자유에 대한 생각은 어떻소? "
"그것이 말일세, 압박이 있어서 내게 자유로 느껴졌던 것 같으이. 지금은 자유로운 느낌이 들지 않아. 자유의 환희나 두근거림은 없어. 평온할 뿐이지. 흑이 있어야 백이 있는 것과 같은 논리일까?"
"도련님 말이 맞아, 그렇지. 자유의 환희라는 것은 막상 종단에는 쓸모없는 것이라네. 항상 자유, 자유를 외치고 원하다가도 막상 자유로운 끝이 되면 그 자유의 느낌은 허무하게 사라지지. 마치 안개나 무지개 같이 잡힐 것 같지만 잡히지 않는 아지랑이라고 할까나? 억세게 조이는 쇠사슬이 있기에 그걸 푸는 맛이 생기는 것처럼."
"그래. 하지만 나는 압박도 원하지 않아. 나는 내가 알기 위해 수학하는 것이지, 의무적으로 머리에 집어넣기 위해 가르침을 받는 것은 아니야. 그런데 선사는 무엇인가, 일방적으로 내게 자신의 지식을 주입시키려고만 하시지. 난 이제 모르겠어. 내 수학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적어도 학사를 다니기 전까지는 분명했다네.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을 알기 위함이었지,"
노인의 코끝이 빨개졌다. 초점은 흐릿했지만 목소리만은 명료했다.

"그것은.......나도 한 때 많이 고민했었던 것이었네그려."
"영감이? 도자기 굽는 데 목표가 없었던 것이오? 아....하긴 이 잔을 보면 그리하지."
"껄껄껄. 원, 사람도!! 난 도자기에는 목표도 없었고 재능도 없었어. 그래서 지금 이모양 이 꼴이지. 하지만 나는 도자기를 굽지 않아. 내 생각."
그는 집게손가락으로 머리를 툭툭 치더니
"내 생각을 굽고 다니지. 도자기를 만들 때 마다 많은 생각을 한다네. 그 안엔 하늘과 땅의 이치를 묻는 질문도 있고 세상의 법도를 위한 답도 있어. 그렇게 머리로 진흙을 만진 것을 구우면 그 도자기는 세상에서 두 번 다시없는 내 고뇌의 도자기가 되는 거지. 생각의 고체화란 말이야! 나는 한번 만든 도자기를 만지면 그 때의 생각이 떠오름세. 예를 들면 도련님이 들고 있는 그 잔말일세. 그것은 내가 지렁이와 같은 것들이 발도 없이 어떤 힘으로 길 수 있는가에 대해서 한 고민으로 만들었세그려."

왕인이 놀라 먹던 술을 뿜으며 컵을 잠시 떼었다.

"...어쩐지 흐물흐물하게도 생겼다고 생각했소."

그런 그를 보며 노인은 껄껄 웃으며 술잔을 입으로 갖다 대었다. 눈빛이 어쩐지 더욱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술만 마시면 총기가 생기는 것인가?

"근데 도련님은, 수학의 목표가 알고자 하는 것을 알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셨소?"
"뭐, 대략 그렇소. 당연한 것이 아니겠소?"
"일차적인 목표는 당연히 그럴 것이겠지요.....나를 위해서 학문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리 될 것이겠지요. 하지만 남을 위하여 학문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훨씬 고차원적이고 숭고한 목표가 될 것이오."
"남을 위하여? 아버지나 어머니를 위하여 공부하고 수학하여 관직에 진급하는 것을 말하시오?"
"'남'이라고 하였소. 어찌 나를 낳으신 혈육이 '남'이 되겠소? 내가 말하는 것은 내 주위가 아닌 타인을 이른 것이오. 내 이익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 말이오. "
"남의 이익을 위하여 공부한다라? 나한텐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구려."
"허허......머리 좋은 도련님이 꽉 막힌 학사에서 공부하느라 도통 머리가 굳었나보구려. 내 얘기를 해보지요. 그러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외다."
하고 쌓여있는 경서를 가리키며
" 저 책들이 보이시오? 저 책들은 내 젊을 적에 모아오던 책 중의 일부분이오. 나 역시 도련님처럼 학문을 닦는 일을 조금 한 적이 있었지. 저 종잇장들이야 한낱 죽은 지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미련을 끝끝내 버리지 못하여 몇 권을 취하여 보관하던 것이 저렇게 남아 있소.
참 우습지 않소? 내 인생을 질질 끌어오던 저 무거운 바윗덩어리를 애지중지하고 방에 갖다놓은 것이 말이오.
도련님, 나도 도련님처럼 나의 학문의 목표에 대해 방황하고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소. 어렸을 때부터 주위의 사람들은 마치 이걸 모르면 큰일이라도 되는 마냥 정확히 이것 이것 이것을 배워야 된다고 내게 그랬지. 나는 아무런 불평 없이 받아들였소. 모두 열심히 공부했지. 머리는 좋지 않았지만 나는 악착같이 노력했소.....아 여기서 머리 좋은 것은 자네한테서 제일 부러운 것이요.....난 그러지 못했거든... 아, 하여튼 그래서 남들이 부러워 할 만큼의 명예를 가졌소. 나는 솔직히 기뻤지. 젊은 혈기에 가득 차서 자만에 겨워 있었지.
그런데 어느 날 누가 나한테 묻더라구. 아니 어떻게 이렇게 많은 책을 읽었냐, 라고. 나는 그 순간 머리에 망치를 맞은 것만 같았소. 이 사람은 단지 내가 책을 여러권 많이 봐서 위대해 보고 있었던 것이오. 겉으로 보이는, 증명할 수 있는, 그런 통계적 자료로써 나를 판단하고 있었단 말이오.
그 순간 나는 떠올린 거지. 내가 왜 공부를 한 것일까. 무엇을 위하여? 이런 우대를 받고 싶은 것이었나? 이런 같잖은 지위와 명예? 모두 버리고 뛰쳐나가고 싶었지.
하지만 난 소심해서 그렇게 할 수 없었소. 아무 말 않고 그 직위, 아니 그 위로, 또 그 위로 올라갔소. 그것은 내 작은 간 덕분이기도 했지. 할 말을 안 하면 됐으니까. 아무 말도 안하고 하자는 대로 가는 쉬운 사람이니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소. 그리고 내가 나이가 들어 정말 윗자리에 서게 되었을 때 또 그 젊었을 때의 회한이 다시 떠올랐소. 주위의 모두는 권력의 맛에 길이 들어 아첨과 세력다툼으로 판을 치고 있었소. 순간 나는 정말 뛰쳐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소. 이제는 말을 해야 된다고 느꼈지. 앞으로 나아가 그들이 하는 제안이 그르다고 말씀을 드리자 그들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고, 그러자 그들은 내가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아버렸지.......
그래서 그들은 필사적인 모함과 간언을 드려 나를 이곳으로 쫓아냈소. 그것이 내가 위하고 원하던 것임을 모르고 말이요.
감사해야할 일이지. 나는 하인 하나도 없이 짐꾸러미 달랑 한 개를 들고 이곳으로 내려왔소. 그러나 나는 내가 필사적으로 택한 자유에 실망했소. 분명히 기쁘고 설렐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유는 그곳에서 나온 순간 끝이었던 거요. 아까 말했듯이 자유의 기쁨은 구속과 속박이 있었기에 느껴지는 기대감에서 끝이었던 거요.
기쁨은커녕 현실이 나를 매몰차게 몰아왔소. 당장 먹을거리와 잠자리, 입을 옷이 필요했고 왕이 억지로 몰아넣은 이 수용시설은 황폐하고 흙냄새만 났소. 그 날 아침 흙터에서 흙을 배분받아 집을 짓는데 허탈하고 허망하여 눈물이 흘렀지. 내가 원하던 삶이 아니었던 거요. 인생 내내 흙은 커녕 빗자루 한번 제대로 쓸어보지 못한 내가 집을 지을 리 만무했으며.. 기껏 지은 집은 엉성하고 구멍이 나서 곧 있으면 쓰러질 것 같았고, 또 조공으로 바칠 도자기의 양이 할당되어 있어서 의무적으로 그 도자기를 만들지 않으면 안됐는데 난 또 그 도자기의 질이 너무 저급이라 교육과 벌을 교대로 받았지....
하지만 제일 혐오스러웠던 것은 밤마다 찾아오는 후회와 외로움이었소. 찬 흙바닥에서 누더기 천을 끌어안고 눈물과 콧물을 풀면서 잠이 들었소. 내가 왜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나의 한심함을 탓하고 책을 멀리했소. 어떤 이유에서, 어떤 목적으로 내가 이곳에 왔는지도 희미해질 무렵.. 나는 무심해졌소.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조차 나는 잃어버려서 몸 안에 모든 것이 없이 비어버린 것 같았소.
그러자 보이더군. 나를 버리니 내 주위의 사람들이 보였어. 가난하고 천하다는 이유로 글자 한번 배워보지 못한 사람과 옷을 꿰매는 방법을 몰라서 더러운 천을 몸에 묶고 다니는 사람이 눈에 보였지. 한 때의 나는 귀족이었고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이곳에 온 것이지만, 그들은 한 평생 이곳에서 도자기를 구어야 하는 신세였던 거요. 그리고 난 거기서 학문의 의미를 찾았지. 그들을 위해서 글자를 가르치고, 예절과 도덕을 가르쳤소. 진흙을 퍼는 기구와 효율적인 수로 기관을 설계하여 만들기도 했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일방적으로 선생처럼 가르친 건 아니오. 나는 도자기 만드는 방법을 배우고, 또 그들은 내게 글자를 가르침 받았지.
이제 그들은 자기 이름을 쓸 줄 아오. 그 사실에 기뻐하는 그네들을 보며 나는 어느새 내가 가득 차있다는 것을 느꼈소.. 어려운 경서 따위를 많이 읽어서 자랑하는 것이 학문이 아니라 남을 위하여 서로가 부족한 것을 메워주면서 서로 가르쳐주고 보완하며 배우는 것이 진정한 학문이었던 거요.....“

노인은 이미 많이 취해 있었다. 눈이 반쯤 감겨서 목소리는 해롱거리고 있었다. 왕인은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조금씩 흐르고 있었다. 노인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나는 늙어서 깨달았지만, 도련님은 젊어서 깨달았으면 한다네....나를 위한 학문이 얼마나 덧없는가를.......”

나를 위한 학문. 그렇다. 왕인의 학문은 그 자신의 알고자 하는 의욕에 의미를 두고 있었다.
그래서 학문으로써 입신양명하려고 애쓰는 자들을 경멸했었다. 허나 이 또한 그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종단에는 덧없을 학문이었다. 갑자기 그는 명치 쪽이 확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남보다 좋은 환경에 있으면서 배부른 소리를 하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갑자기 집에 있는 불씨 할멈이 떠올랐다. 한평생 남의 집 불쏘시개질만 하고 살았던 할멈은 쭈그러진 곶감 같은 얼굴로 내게 말했었다. 인이 도련님, 제 이름 좀 한 번만 지어 주시우.
뭐야 할멈은 바보야? 왜 자기 이름도 몰라?
허허.....도련님 말이 맞습니다 그려, 그러니 바보 할멈 이름 좀 하나 지어 주시오. 나중에 죽으면 무덤 비에다가 적을 이름은 있어야지 않겠수.........
바보 할멈. 알았어. 내가 지어줄게, 있어봐.
인의 눈에도 눈물이 흘렀다. 할멈이 감나무에서 여동생 추이를 위해 감을 따다가 죽은 후 그녀의 짐 보따리에서는 돌비석이 나왔다. 짚으로 소중하게 싸져있던 돌 위에, 자칫하면 그냥 이리저리 긁힌 것처럼 보일만큼 어설프게 새겨진 글자는 분명 자신이 지어준 이름“화감”이었다.
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흙벽의 작은 균열 사이에서 조그만 햇빛이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가만히 그 빛을 쳐다보았다. 눈이 부셨지만 그 빛은 마치 몸 전체를 소독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에서도 새 아침이 오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참고 : '일본서기' 응신천왕 15,16년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