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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 나를 원하는 곳에 내가 가리라

[등장인물]

- 왕인

[줄거리]

“아, 형님 큰일 났어!!”
와공 채쟁이가 모래가루를 손에 묻힌 채 달려왔다. 그는 왕인의 노름 친구 저자패 중 한 명이었다. 왕인은 밭에 거름을 주다 말고 달려온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 내 뻔히 알겠다. 이 녀석아.”
“아니, 무슨 일인지 아시오?”
“또 노름 쳐서 돈 잃었다고, 돈 빌리러 온 거 아니냐?”
“아~ 진짜. 내가 지금 그런 일로 왔겠소? 지금 형님 집에 임금님 사자가 와있어.”

그는 왕인이 밭 근처 냇가로 천천히 걸어가 거름 묻은 손과 발을 대충 대충 씻어대는 것을 보고 닦달했다.

“빨리빨리 동작하시우. 아니 또 이 거름은 어디서 구해왔대? 냄새가 지독시리 독하구먼...속이 안 좋은 놈일게 분명해.”
“아, 그냥 또 무슨 강연이나 해달라고 부르는 거겠지, 뭐.”
“형님은 참. 그 뭐지 오경박사인가 뭔가 그 자리에 무슨 책임감 같은 건 없는 거요?”
“책 파먹고 어찌 배부르겠느냐.....땅도 밟고 똥도 밟고 해야지....”

속편하게 걸어온 왕인과 대조적으로 그의 집 문 앞에는 굉장히 진지하고 엄숙한 무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연이나 요청하러 온 떠중이 사절 따위가 아니었다. 신분이 확실하고 귀한 복장이었다. 대체 임금은 어떤 이유로 자신을 부르는 걸까. 왕인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분명 무거운 임무를 맡길 터였다.

“안녕하십니까, 박사님.”
“어쩐 일이요? 또 무슨 강연 물어보려고 오셨으면..... ”
“그런 일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왕께서 속히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채비하시고 나오시지요.”
“아...그리하지.....”

강연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일까, 경서해석? 그런 건 귀찮은데.
왕인은 한숨을 쉬며 발과 손을 소금으로 문질러 닦고 먼지가 쌓인 궁궐용 예복을 갖춰 입었다. 미처 손질을 다하지 않은 밭이 마음에 걸렸다. 신을 신고 나가려고 마당으로 나서는데 이미 그들이 말을 탄채 검은 말 한 필을 이끌고 문 앞에 서 있었다. 부담스러운 마음을 주체할 수 가 없었다. 그는 예의상 목례만 한 채 말에 훌쩍 올라탔다. 옆에서 채쟁이가 잘 갔다 오시오-하고 외칠 뿐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궁궐은 있었다. 왕인이 이따금씩 중얼거리는 소리 빼고 거의 침묵인 상태에서 몇 십 분을 달리고 잠시 쉬다가 몇 십 분을 달려서 마침내 궁궐에 도착했다. 왕은 약간 초조해 보이는 모습이었다가 왕인을 보자 반가이 웃으며 달려가 그의 손을 잡았다.

“잘 왔소, 박사.”
“이리 환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어쩐 일이신지요.”
“성질도 급하오, 편전으로 가서 얘길 하십시다.”

왕이 끌고 가다시피 간 편전에는 기다란 동진 형식의 탁자와 의자가 놓여있었고 옥과 비단은 물론 파사국의 비단과 흑치국의 도자기 등 진기한 문물들이 치장되어 있었다. 편전은 예전과 거의 다름없었다. 허나 예전에는 저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 두 명은 없었다. 한 명은 어디선가 본 듯한 사람이고 한 사람은 일본인임에 분명한 키와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둘 다 일본의 고급 복식을 차려입고 진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전하, 박사, 오셨군요.”

그 중 본 듯한 사람이 반가이 외쳤다.
백제 사람인데다가 자신을 알고 있는 듯이 말하는 그 사람 때문에 왕인은 잠시 놀랐다.

“모시고 오느라 힘들었습니다, 왕인박사. 여기 앉으시오.”
“아.. 예.. 예....... 그런데 이쪽은 누구십니까?”
“아하!! 내가 애초에 통성명을 하지 아니 했군. 박사, 직접 하시지요.”

박사라고 불림 받은 남자는 다소곳이 일어나 예의를 갖추어 왕인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말을 하기를
“박사님의 존함은 익히 들어 알고 있사옵니다.. 저는 아직기라고 하옵고, 백제에서는 궁궐의 학사에서 약간의 경서를 공부한 바 있습니다. 지금은 전하의 명을 받아 일본에서 태자 토도추랑자의 스승을 맡고 있습니다.”
“아직기는 처음에 승마술과 말 사육방법을 가르치러 갔는데, 그만 거기서 학문의 출중함을 인정받아서 왜 태자의 스승이 되었지.”
왕이 잽싸게 아직기에 대한 부연설명을 붙였다.

왕인은 떨떠름히 왕과 아직기를 번갈아 보았다.
“아...아직기박사...알겠소. 근데, 용건이 뭐요?”
“박사님, 제가 예전부터 박사님을 흠모했다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라옵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천황이 어느 날 저를 금에 비하여 칭찬하며 저보다 대단한 학자가 백제에 있느냐고 넌지시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나는 작은 사금에 지나지 않다. 내가 아는 분은 금으로 된 용과 같은 분이 있다.]고 하였고 그가 놀라 그 존함을 여쭈니 [그의 이름은 왕인이라 하며 비록 입신양명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산야에 머물고 있으나 그의 학문의 깊이는 끝을 모를 정도로 깊고 넓어 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존재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다시 놀란 천황이 임금 전하께 전갈을 하여 저와 이 '아라타와케상'과 같이 함께 박사님을 꼭 모셔와 모쪼록 왜가 그 학문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뭐라고요?!!!”

임금이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박사는 익히 나라의 백성과 친한 학문을 널리 베풀었소. 그 학문을 헐벗은 섬나라 사람들에게도 나누어주는 것이 어떠하겠소. 내 오경박사들을 붙여드리리다"하고 “내 친히 부탁드리는 걸세.”

이렇게 임금이 친히 부탁하니 어쩌지도 못하고 저쩌지도 못하고 왕인은 못내 애만 탔다. 조금의 말미를 주시면 생각을 해보고 말씀드리겠다 하고 물러났으나 사실은 명령으로 내릴 수도 있었던 것을 친히 불러 손수 부탁까지 하는 왕의 태도에 거절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집에 돌아와 속을 끙끙 앓으며 수없이 생각하였다. 어쩔 수 없이 왜로 가야만 하는가? 허나 이 땅은? 이 마을과, 이 백성들은 어찌하나? 이들을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데, 어찌 또 알고 왔는지 저자패놈들이 집을 찾아와 헤집었다.

“형님!! 왕인 형님 있으시오!!”
“왕인이!! 어디 있는가? 얼굴 좀 봄세!!”

대문을 열고 창고문과 부엌문, 그리고 옆문을 무턱대고 훌쩍훌쩍 열어대더니 마침내 왕인이 있는 방문을 잡아 당겼다. 그새 왕인이 걸어 채운 문고리에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은 더 크게 소리 질렀다.

“이 문 빨리 열어!!”

왕인은 저 장정들의 커다란 소리들을 더 이상 들을 자신이 없어 못내 문을 열어주고 말았다.

“여기서 뭐하는가. 인이? 임금님이 불렀다고 하지 않았는가.”

지자패의 큰형님격인 격비였다. 허옇게 센 수염을 달고 있지만 근육이 우락 바락하고 정력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 불렀긴 불렀소.”
“근데 여기서 뭣하는겐가 말이야. 강연을 갔으면 강연을 갔고, 어디 출장을 갔으면 출장을 갔을 터인데. 피다리가 지나가는 길에 자네가 집으로 가는 얼굴을 봤다고 해서 혹시나 해서 왔더니 진짜 집에 있을 줄이야. 무슨 일이였나?”
“말도 마시오.......”

왕인이 엎드려 누워 있다가 다시 격기를 향해 돌아누우며 말했다.

“나보고 왜로 가랍니다.”
“뭐!!! 귀양 가는 거요?”

옆에서 듣고 있던 채쟁이와 피다리가 문사이로 얼굴을 내밀며 소리쳤다.

“내 저럴 줄 알았어. 만날 왕궁에서 학사에 좀 오라고 한때 안가니까 임금님이 화날 만도 하지.”
“.... 차라리 귀양이라면 좀 좋겠소. 나중에는 돌아올 수는 있을 터인데.”
“뭐야, 속 시원히 좀 말해봐. 귀양도 아니고 뭐란 말인가?”
“일본 가서 태자 좀 가르치랍디다. 아무래도 날 거기 못박아둘 셈인 것 같소.”
“뭐?!!!”
“아니, 갑자기 무슨 이게 날벼락이야?”
“그래, 거절했어?!”
“...내가 무슨 수로 거절을 합니까, 임금이 친히 부탁했다니까 그려. 죽겠소. 난 떠나기 싫은데......그쪽에선 오라고 하고.”

그가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낮은 신음소리를 냈다. 한참을 구르는데 지자패들이 이타저타 소리도 없어 실눈을 떠 살펴보니 자기네들끼리 소곤거리고 있었다. 왕인의 시선을 느낀 격비가 방 안으로 들어와 큰형님의 자세로 그의 맡에 앉고는 헛기침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채쟁이와 피다리가 좌우로 척하니, 앉으며 격비를 따라했다.. 그는 구르다 말고 엎드려 누워 고개를 들었다. 격비는 이제까지 그가 봤던 얼굴 중 제일 진지하고 엄중해 보였다.

“왜, 왜 그래, 형님.”
“제대로 앉아봐라, 우리가 친우로써 할 얘기가 있다.”

그 자못 진중한 목소리에 왕인은 얼빠진 표정으로 일어나 자세를 고쳐 앉았다.

“우리가 노름판에서 만난 지 오래 되어 이렇게 친분을 이어오고 있다고 하지만, 너와 우리는 신분이 달러. 네가 우리와 같이 놀려고 하면 쓰는가. 내생각에는 네가 그 쪽으로 가야 하것다. 그것이 좋은 것 같아.”
“뭐라고? 형님마저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오? 그럼 여기 땅은, 마을은, 여기 백성들은? 이 왕인에게도 소중한 것이 있고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 있는데, 왜 다들 저로 하여금 그걸 버리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오?!!!!”
“그 마음 다 안다. 인아. 그렇지만 말이다, 사내대장부가 이리 있을게 아니야.”
“내가 애초에 그런 입신양명을 바라고 있었다면 이런 시골 바닥엔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수다!!”
분기에 이기지 못한 그가 소리를 내질렀다.
“날 잘 안다는 형님이 어찌 그런 말을 하는 거요? 내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여기 있는지 알면서!!”
“안다. 알기에 하는 소리야. 네가 우리와 처음 술자리를 같이 했을 때 우리에게 말했지. 모든 사람이 잘살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네가 공부하는 거라고 말이야. 그 소리를 들은 우리는 네가 바보 아니면 멍청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는 네가 진짜 여기 사람들을 위하고 있는 모습을 본 것이야.”

“감나무 터울이한테 연도 만들어주고.”
“우리 동네 수로도 네가 텃잖어.”
패쟁이와 피다리가 한마디씩 던졌다.
“그리고 저기 개천 다리도......읍.”
격비가 계속 말하려고 하는 피다리의 입을 한 손으로 막았다.

“지금 우리 마을은 충분히 행복하다. 아니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그리고 그렇게 해준 너에게 너무 고마워하고 있어."
“...그건 형님 생각이지.”
“넓게 생각해라. 모든 사람이 우리 마을 사람뿐이더냐? 모든 사람은 똑같이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고 네가 네 입으로 말했었다.”
“형님, 형님은 제가 형님 곁을 떠났으면 하십니까?”
“쯧쯧...밭이나 매고 앉았더니 유약한 남자가 되었구나.”
하고 격비가 일어났다.

“잘 생각하길 바란다.”
“........형님.”

왕인은 문을 나서는 격비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론상 형님의 말이 옳았다. 허나 그자신도 감정 있는 사람. 이곳을 떠나기 싫었다. 마음이 가라앉았다. 영감!! 내게 힘을 주쇼. 어딨는거요.. 도자 영감.... 나는 영감말대로 살고 있소.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 믿고 난 그들을 위하여 살고 있소. 그들이 튼튼해야 이 나라가 튼튼해질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의 학문을 때로는 그들에게 베풀고, 또 그들에게 많은 것을 배워가고 있소.......
헌대 왕이 나보고 갑자기 왜로 가라는 구랴. 어찌해야 되는 거요? 영감...옛날의 기억에 눈시울 진 왕인이 소맷부리로 눈 주위를 닦았다.

“왕인! 생각하라 왕인!”

애초에 귀족의 집을 버리고 집을 뛰쳐나와서 여기저기 거취를 옮기다가 이곳으로 정착한 것 자체가 나의 무모한 도전이 아니었는가? 그들에게 내가 도움이 된다면 그것마저 내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어린아이처럼 굴지마라. 사람이 태어나고 죽듯 떠날곳은 떠나게 된다. 이제 이곳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몸 바치는 것도 좋을 일이다. 나라를 생각하여 민중의 근본을 굳건히 하려 행한지가 시간이 꽤 지났다. 내 나라의 민중이 아닌 남이 나라 민중이지만 그 또한 헐벗은 민중. 내 도움 필요한 곳이 있다면 어디든 가야 할 것이다.
그는 마음을 다짐하고, 다짐하였다. 왜로 가는 것이다. 무모한 도전, 이번에도 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먹은 왕인이 책장을 뒤져 직접 자필한 논어와 천자문으로 짐을 싸고 있는 중이었다. 이번에는 세장정의 목소리보다 더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들은 조금씩 커지고, 커지더니 이내는 바로 코앞에서 들렸다. 또 피다리가 얼빠진 짓을 해서 동네 사람들이 피다리를 찾으러 온 것인가? 그는 문을 열어 밖을 내다봤다.

“어!! 박사님이시다!!!”

그의 마당 앞에는 마치 장날인 듯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그 중 한사람이 그를 가리켜 소리치자 많은 사람들이 왁자지껄 제멋대로 소리쳤다.

“오경박사님!!”
“왕인박사님!!”
“만물박사님!!!”

그때 피다리가 앞서서

“자자!! 그게 아니우. 다시 한 번 말해보실까.”

그러자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네박사님!!!”

이에 놀란 왕인이 피다리에게 걸어가 귀를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야, 이놈아. 이게 무슨 짓이야? 또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아이고, 형님, 이것 좀 놓고 얘기하십시오. 이들은 제가 불러 모은 사람들입니다요.”
“어쩌자고 불러 모았는데, 뭘 하려고?”
“어쩌긴요 형님이 왜국 가시는데 따라갈 사람을 모집했습니다요.”
“뭐?!!!!”

그러나 왕인의 놀란 얼굴에도 불구하고 피다리는 얼굴 꿈쩍하지 않았다.

“모두 격비 형님의 생각이시우. 저들 모두가 왕인님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굴뚝같은 사람들이오. 그들은 형님을 도와 일본에서 정착하고 그들의 기술을 전파할 생각이오. 그들은 결심하고 왔소.”

오늘은 왕인이 또 피다리의 생애 첫 진지한 얼굴을 본 날이었다.

“이제 형님만 결심하면 되오.”

말을 못내 이루지 못하던 왕인이 그들을 다시 보았다. 한 아이는 업고 한 아이는 손에 쥐고 뛰어온 아줌마에서 이빨 빠진 노인들까지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러면 빼도 박도 못하는 거잖아. 그렇지?”

웃으며 그가 말하자마자 그들의 환호성이 이어졌다. 일본의 거대한 문화의 바람을 일으킨 왕인의 탄생이었다.

참고 : '일본서기' 응신천왕 15,16년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