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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 검은 용

[등장인물]

- 곤지 : 정로장군 좌현왕

- 모대 : 곤지의 아들(동성왕)

[줄거리]

밤의 기운으로 어두워진 복도를 촛대를 든 한 청년이 조용히 지나간다. 복도를 지나 깊숙한 곳 까지 걸어가니 발이 드리워진 작은 방이 보였다. 촘촘한 발 사이로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시는 한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아버지”
“모대로구나.”

청년은 촛대를 조심하며 발을 손으로 밀어 방안으로 들어섰다.
작은 방은 분명 왜나라의 방식으로 설계 되어있었으나 그 방을 차지하고 있는 물건들의 대 부분은 백제의 향이 물씬 풍기는 것들이었다.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은 곤지는 촛대를 조심스럽게 들고 서 있는 아들을 나직이 바라보았다.

“앉아라.”

모대는 촛대를 탁자위에 놓고 곤지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곤지는 말없이 병을 들어 다른 찻잔에 차를 또르르 따라 따뜻한 기가 나는 찻잔을 모대에게 건네었다. 하얀 김이 둘 사이를 가르고 유연하게 피어났다.

“들거라”

찻잔을 받아드니 따뜻한 기운이 손가락을 타고 전해져 왔다. 조심스럽게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자 늦은 밤의 찬 기운에도 불구하고 몸이 따뜻해져 왔다. 그 기운을 느끼며 찻잔을 손으로 감싸 쥐고 있던 모대가 입을 열었다.

“백제에서 서신이 왔다고 들었습니다.”
눈을 감고 차를 조용히 차를 마시던 곤지는 찻잔을 입에서 때고는 진지하게 바라보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나가는 말처럼 ‘그랬지’라고 답하였다. 답을 들은 모대는 의자를 조금 끌어당겨 앉으며 궁금해 하는 눈동자로 아버지에게 물었다.

“어떠한 내용이었습니까?”

가라앉은 눈으로 모대를 바라보던 곤지는 조용히 병을 들고 빈 자신의 찻잔에 차를 따라 입가에 대었다. 두 사람은 한 참을 말없이 그렇게 있었다. 촛불의 은은한 빛이 방 안을 노란빛으로 물들였고 우러난 차에서 나는 미약한 풀내음. 차를 마시는 작은 소리만이 방안을 매웠다. 말없이 차를 마시는 아버지를 가만히 바라보며 모대가 초조함을 느낄 즈음 찻잔을 내려놓은 곤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선왕의 서거에 대해서 들은바가 있을 것이다.”

갑작스런 화제에 모대는 찻잔을 조심스럽게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따뜻함에 풀어져있던 몸이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잔뜩 긴장해 정신이 날카로워 졌다. 긴장을 해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예, 고구려의 왕이 침략해 들어와 수도가 함락하여 서거하셨다고..”
“그래. 그리하여 형님께서 왕위에 오르셨지.”

그리고 잠시 찻잔 안의 차를 먼눈으로 바라보던 곤지가 그 자세로 입을 열었다.

“형님이 나를 부르는구나.”

탁자 바닥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듣던 모대는 고개를 번쩍 들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흥분한 듯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좀 더 의자를 끌어 탁자에 바짝 다가갔다.
“아버지 그렇다면...!”
“나를 내신좌평에 임명한다는 구나.”

기쁜 얼굴로 외치던 모대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벌린 입을 뻐끔대단 모대는 탁자를 치며 벌떡 일어나 외쳤다.

“내신좌평이라니요?! 아버지를 말씀입니까!”
탁자가 흔들려 엎질러진 찻잔을 씁쓸한 눈으로 바라보던 곤지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앉거라. 왜 네가 흥분하느냐.”

아직도 자신이 들은 말이 믿기지 않는 듯 분에 차 씩씩대던 모대는 아버지의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에 울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아버지는 좌현왕 이셨습니다!!”

분통을 터트리는 아들을 바라보지도 않고 엎질러진 찻잔을 들어 바르게 세우던 곤지는 천천히 탁자 위를 정리하였다. 찻잔에서 쏟아진 차로인해 꺼져버린 촛불을 아쉽게 바라보다 아들을 바라보고 목소리를 낮게 깔아 말했다.

“앉으래도.”
그 말에 잔뜩 억울한 표정을 지은 모대는 잠시 주먹을 꽉 쥐고는 서 있다 아버지의 근엄한 눈초리에 의자를 세워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아직 분이 삭히지 않는지 아버지에게 몸을 가까이 하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왜국에 계신다는 이유로 백부님이 왕위에 오르셨습니다. 그럼에도 분하지도 않으십니까!”
곤지는 아들을 못마땅하다는 듯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 마땅히 왕이 되실 분이 왕이 되신 것이다. 내가 억울할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
“ 아버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모대는 이를 꽉 물었다.

“....가지 마십시오. 자기들 마음대로 이 험난한 곳으로 아버지를 보내고, 왕 계승권마저 빼앗더니 이제는 그러한 직책으로 부르다니요.”

촛불이 꺼진 방에는 창으로 아스라이 들어오는 달빛만이 빛을 밝혀주고 있었다. 푸른 달빛이 아까까지만 해도 따뜻해 보이던 작은 방을 차갑게 얼리는 듯 보였다. 모대는 말을 잇지 못하여 고개를 푹 숙이며 수그러드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이었다.
“ 그 자들의 속셈이야 뻔하지 않습니까. 힘을 쓸 수 없는 요직에 아버지를 앉혀놓고 바람막이로 쓸 작정인 겁니다.”

푸른빛이 스며든 고개 숙인 아들의 머리를 우울하게 바라보던 곤지는 창밖의 새파란 달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백제의 백성이고 왕의 명령을 받들어야 한다. 명을 어기는 것은 백제를 어기게 되는 것이다. 나 하나가 이를 무시하여 따르지 아니한다면 다른 누군가가 나를 따라 또 백제를 무시하고, 그 일이 반복되면 종국엔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이 아니냐.”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이 시려 달을 바라보던 고개를 돌려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듣고 있는 모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순간 움칠 하였으나 모대는 가만히 그 손길을 느꼈다.

“아들아. 나는 그들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백제를 위하여 가는 것이야.”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대는 느끼지 못하였지만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 곤지의 표정은 따스하게 아들을 바라보던 아버지의 얼굴에서 달빛을 받아 얼음처럼 날카롭게 변해갔다.

“그리고.. 네가 나를 진정으로 위한다면, 네 스스로 갈고 닦아 너를 높이고 백제를 일으켜야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이야.”

어두운 방안에 달빛이 애처롭게 부자를 비추었다. 그렇게 시일이 흘러 며칠 후 곤지는 배를 타기 전 아들에게 다시 한 번 마지막 말을 상기 시켜주고 가족과 심복들을 두고 홀로 배를 타고 백제에 건너가게 되었다. 그렇게 세 달이 흘러갔다. 왜국에서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수양을 하기위해 열심히 노력하던 모대는 곤지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책상에서 벌떡 일어난 모대는 슬픔으로 말을 잇지 못하여 이를 악물고 울음을 참아야했다.
‘웅진의 하늘에서는 검은 용이 나타나 찢어질듯 울부짖고 사라졌다고 했다.. 그것은 백제를 위하여 힘을 쓰던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뜻하는 것이야...’
그리고 차츰 끌어 오르는 분노로 주먹을 꽉 쥐며 밖으로 나와 하늘을 바라보고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남기신 말씀을 잘 실천하여 기필코 아버지의 의지를 잇겠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백제에 기생하여 붙어있는 벌레들을 쫒아 백제를 일으켜 대국을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그렇게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한 그는 훗날 백제의 왕으로 성장하는데 그 이가 바로 동성왕이다. 곤지의 올바른 정신과 가르침을 이어받아 백제의 기상을 높이고 바로잡은 왕이 된 것이다.

참고 :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 3년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