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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기록 - 한국

'삼국사기(三國史記)' , 卷 第24 百濟本紀 第2 近肖古王 27년
春正月 遣使入晉朝貢.
27년(372) 봄 정월에 사신을 보내어 진에 조공하였다.

-> 백제와 중국의 왕조인 동진과의 공식적인 첫 교류로 그 이전 마한의 소국 중 하나로 중국 측 기록에 나타나지만 근초고왕 대 이르러 중국대륙과 본격적으로 교류를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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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三國史記)' , 卷 第24 百濟本紀 第2 枕流王 卽位元年
九月 胡僧摩羅難陀自晉至 王迎之致宮內 禮敬焉 佛法始於此
즉위원년(384) 9월 호승 마라난타가 몸소 진으로부터 백제로 도착하니 왕이 궁으로 맞이하여 예우하여 경배하니, 이로부터 불법이 시작되었다.

-> 침류왕 대 해상을 통해 동진으로부터 처음 불교가 도래한 사실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웅진.사비시대에 이르러 백제는 화려한 불교문화를 꽃피우게 되었다. 또한 왜국에 불교를 전파하여 비조문화의 기반을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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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三國史記)' , 卷 第25 百濟本紀 第3 阿莘王 12년
春二月 倭國使者至 王迎勞之特厚
12년(403) 봄 2월 왜국 사자가 이르자 왕이 맞이하는 수고로움이 특별히 후하였다.

-> 백제와 왜국은 4세기 중엽 첫 교류이후 돈독한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아신왕 대에는 문화적인 교류뿐만아니라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하여 군사적인 동맹국으로까지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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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三國史記)' , 卷 第26 百濟本紀 第4 東城王 10년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10년(488) 위나라에서 병사를 보내어 침범해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 북중국의 북위와 백제의 전쟁에 관한 기록으로 두 나라의 지리적 위치상 바다를 통하지 않고는 전쟁을 할 수 없다. 이러한 근거로 동성왕 대 백제가 중국으로 진출했다는 설과 북위군과 해전을 벌인 것으로 여겨져 백제가 강한 해군력을 갖추었던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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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八月 王以耽羅不修貢賦 親征至武珍州 耽羅聞之 遣使乞罪 乃止
20년 8월 왕이 탐라(제주도)가 공물을 바치지 않자 친히 정벌하려 무진주에 이르자 탐라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용서를 구하자 이에 중지하였다.

-> '양직공도' 중국 측 역사서에도 탐라가 백제의 부용국으로 기록되고 있으나, 실제로 백제가 직접지배한 것은 아니다. 다만 백제의 세력권 아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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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三國史記)' , 卷 第26 百濟本紀 第4 武寧王 21년
冬十一月 遣使入梁朝貢 先是爲高句麗所破 衰弱累年 至是 上表稱 “累破高句麗 始與通好 而更爲强國”
十二月 高祖詔冊王曰 '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餘隆 守藩海外 遠修貢職 乃誠款到 朕有嘉焉 宜率舊章 授玆榮命 可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
21년(521) 겨울 11월 사신을 보내어 양나라에 조공하였다. 앞선시기 백제는 고구려에 패배하여 쇠약해진지 여러 해였다. 이 때 표문에 이르기를 ‘여러차례 고구려를 격파하여, 비로소 우호를 통하였으며,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다.
12월 양나라 고조가 조서를 내려 왕을 책봉하여 말하기를 ‘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백제왕여융은 해외에서 번작을 지키고 멀리서 직공을 닦아 이에 정성이 이르니 짐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옛 법에 의거하여 영을 내리니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이 가하다.’

-> 백제는 일찍이 중국 남조의 여러나라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는 정통한족 왕조인 남조의 우수한 기술과 문화를 수용하고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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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三國史記)' , 卷 第26 百濟本紀 第4 聖王 19년
王遣使入梁朝貢 兼表請毛詩博士.涅槃等經義幷工匠.畵師等 從之
19년(541) 왕이 사신을 보내어 양나라에 조공하고 더불어 표문을 보내어 모시박사, 열반등경의와 나란히 공장과 화사를 청하자 이를 허락하였다.

-> 백제 성왕은 군사적으로도 한강유역을 회복하는 등 전성기를 맞이하나 문화적으로도 남조, 왜와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특히 불교에 대한 관심으로 양나라로부터 경전과 기술자들을 요청하였고 심지어 승려 겸익은 바다를 통해 인도로부터 경전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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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三國史記)' , 卷 第27 百濟本紀 第5 威德王 18년
高齊後主 又以王爲使持節都督東靑州諸軍事東靑州刺史
18년(571) 고제의 후주가 왕(위덕왕)에게 사지절도독 동청주제군사 동청주자사의 직함을 주었다.

-> 청주는 현재 중국의 산동반도에 위치하고 있는 지명으로 동청주라는 것을 산동지역으로 본다면 백제가 위덕왕 시기에 백제가 다시한번 중국 해안지역에 일정한 거점을 마련한 것으로 살필 수 있다. 그러나 동청주라는 것을 '청주의 동쪽'으로 해석하여 현재의 한반도 서남지역을 뜻하는 것으로 파악, 중국진출과의 관련성을 부정하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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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三國史記)' , 卷 第27 百濟本紀 第5 武王 22년 27年
遣使入唐 獻明光鎧 因訟高句麗梗道路 不許來朝上國
27년(626)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어 명광개를 선물하면서 '고구려가 길을 가로막고 당과의 교류를 막고 있다'고 호소하였다.

-> 백제는 전통적인 중원왕조와의 우호관계를 통해 고구려를 견제하였다. 이 때 무왕이 당나라에 보낸 명광개는 당시 백제에서만 생산되던 황칠을 한 갑옷으로 이 후 당태종이 직접 백제에 황칠을 요청할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지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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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년
二月 遣子弟於唐 請入國學
41년(640) 2월 자제들을 당나라에 보내 국학에 입학시킬 것을 청하였다.

-> 백제는 이른시기부터 중국과 교류하여 상당한 수준의 학문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령왕릉 지석, 창왕사리감, 사택지적비 등은 백제의 학문, 종교, 글씨에 대한 깊은 조예를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