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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의 유래

원(院)은 우리의 전근대 시대에 각 지방 교통로에 설치되었던 민간 숙박시설이었다. 우리나라에 원이 언제부터 설치 운영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주부 역원(驛院) 조에 따르면, “경주부 남쪽 6리쯤 되는 곳에 대로원(大櫓院)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신라의 김생(金生)이 그 글자를 크게 썼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토대로 추측해보면, 신라의 명필 김생이 살았던 시기가 711년(성덕왕 10)에서 791년(원성왕 7)이니, 이미 이 시기부터 신라에는 원(院)이 설치되어 운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는 소지왕 때부터 이미 우역(郵驛)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는 고대국가가 형성되어 점차 영토가 확장되던 시기에 이를 좀 더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운영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그 후 신라가 통일되기까지에는 부단한 영토 확장이 있었고, 통일이 되고 난 이후에는 전국의 행정구역을 9주 5소경으로 개편하여 지방을 통제하였다. 이 때에는 중앙 관인들의 지방 출장을 비롯하여 상인 및 일반 여행자들의 지방 왕래 등으로 인해 교통 내지 숙박시설이 더욱 크게 요청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들로 인해 역이 설치되고 난 이후에 다시 원(院)이란 숙박시설이 추가로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교통상의 요지나 고개와 하천에 인근한 지역 및 지방 관부 근처에는 우선적으로 역을 설치하되, 이에 미치지 못한 곳에는 원과 같은 민간 숙박시설이 설치되었다고 보여진다. 신라시기에 설치되었다는 원(院)에 대한 내용은 더 이상의 자료가 없어 그 내용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고려조에 들어가게 되면 역참(驛站) 제도가 획기적으로 개선되고 발전되었듯이, 원(院) 역시 이와 함께 발전을 거듭하였다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즉, 국방과 군사적 목적과 함께 중앙집권화를 위한 행정적 수요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대책들이 다양하게 제시되었고, 그 대안으로 나타난 것들이 원(院)의 설치와 함께 관(關)·진(鎭)·도(渡)·관(館) 등의 시설들이 다양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그 시설들은 어디까지나 역원(譯院)을 보조하는 차원이었다 할지라도 여러 기능을 세분화시켜 나름대로의 역할을 다하였던 것이다. 국가의 체계가 확립되어 갈수록 중앙 정부의 명령하달과 연락 업무가 폭주하게 되고, 지방에서 거둬들인 각종 세금과 공물들을 중앙으로 원활하게 수송해야 하는 한편, 사적인 여행객 또한 더욱 증가하게 됨은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