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식민지자본주의 도시의 면모

대한제국의 근대국가 의지를 짓밟고 조선을 식민지화한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미몽의 나라 조선을 문명화된 일본이 근대화시켜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의 식민지정책의 가시적인 성과가 도시에 드러낸 첫 시작은 대한제국기에 시작되었던 가로정비와 도로신설의 지속적인 추진이었다.

1911년 태평로가 새롭게 개설되었으며, 곧이어 을지로가 확대정비되었고, 동시에 식민지배를 위한 각종 관공서들이 신축되었다. 1914년에는 서울을 근대도시로 만들겠다는 조선총독부 계획의 전모가 ‘경성부명세신지도’를 통해 드러났다. 서울의 4대문 안(內)은 지형적 특성으로 엄격한 격자형 패턴을 가질 수 없었지만, 전체적으로 격자형 패턴을 근간으로 도심 주요부분에는 방사형도로망을 구축하겠다는 의지가 잘 드러나 있다.
그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한인의 주거지인 북촌의 중심을 현 ‘안국동 로타리’로, 일인의 주거지가 밀집된 남촌의 중심을 ‘황금정 3정목(현 을지로 3가)’으로 설정한 후 각각 방사형도로망을 계획하고, 종로통 2정목과 3정목 사이에 위치한 탑골공원을 남촌과 북촌을 통합하는 도시공간의 중심으로 설정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던 당시의 일제의 도시개조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빈곤한 경제는 식민지배를 위한 지배기구의 신축에도 우선 순위 설정이 불가피했다. 일순위는 조선은행(1912), 동양척식주식회사(1915), 조선식산은행, 경성우편국(1915) 등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신축의 우선 순위를 정치적 성격의 건물이 아닌 경제지배를 위한 건축물이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조선총독부가 앞서 언급한 건물들보다 먼저 세워졌지만, 한일합방 후 조선총독부는 을사조약 체결 후 남산에 건축되었던 통감부 건물을 계속해서 사용했고 그 규모도 합방 후에 세워지는 조선은행이나 동양척식주식회사 그리고 경성우편국에 비해서 매우 작았다. 경성부청의 경우는 더욱 왜소해서 합방이전 경성이사청의 건물을 그대로 사용했다.
한일합방이라는 정치적 의미를 감안할 때 식민지배의 가장 상징적 건물인 조선총독부가 목조였던 데 반해, 조선은행이 철근콘크리트조의 석재건축이었고 경성우편국이 붉은 벽돌로 건축되었다는 사실은 조선의 식민지화가 완성된 후 일본의 식민지배정책은 정치적 과시보다 지배의 효율성을 실질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경제와 정보지배력 확보를 위한 관련 시설에 집중적으로 투자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식민지배와 관련된 정치적 성격의 건축물이 완성된 것은 1920년대 중반이다.
1925년에 경성부청이 완성되었고, 1926년에는 조선총독부와 남산의 조선신궁이 완성되었으며, 남대문 밖에는 경성역이 건축되었다. 이로써 북악 아래 경복궁을 밀치고 들어선 조선총독부에서 덕수궁 앞의 경성부청을 지나 남산의 조선신궁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경성의 상징축이 완성되었다.

이 즈음에 식민도시화한 서울의 각 가로는 그 성격을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광화문통에서 태평통으로 이어지는 거리는 각종 관공서와 경성일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신문사가 위치하는 등 언론의 거리로 특성화되었고, 경성부청 앞에서 조선은행 앞으로 하세가와마치(장곡천정)는 사무소의 거리로 변모하였다. 조선왕조 이래 서울의 중심가로였던 종로와 남대문로는 각기 한인 상권과 일인 상권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특히 현 보신각 네거리에서 조선은행에 이르는 남대문통은 한성은행을 비롯하여, 동일은행, 조선식산은행, 삼화은행, 스미다은행, 조선저축은행 및 조선은행이 위치하여, 경성 제일의 금융의 거리로 성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