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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총국과 갑신정변

"3일천하”라고도 불리는 근대한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궁정쿠데타가 갑신정변이다. 이는 근대화와 개혁을 부르짖던 젊은 개화파 관료와 지식인들이 일본군의 후원을 받아 감행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갑신정변의 역사적 현장이 지금도 ‘종로구 견지동 397번지’에 ‘우정총국’이라는 건물도 남아 있다.

김옥균·박영효를 비롯한 개화파는 1884년 12월 4일에 우정총국에서 열린 우정국 개국 축하연회를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그들은 고종을 경우궁으로 이궁시키고 반대파를 척살한 후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는 데까지 성공했지만, 그들이 믿었던 일본군이 청군에 의해 패퇴함으로써 역적으로 몰리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정총국 건물은 현재 남아 있는 건물 한 채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으며, 근대식 우편제도는 시행 16일만에 그 기능이 전면 중단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갑신정변을 단순히 주체의식이 약한 친일파의 망동으로 이해하거나 또는 근대화를 향한 근대혁명의 일환으로 단정할 경우 많은 역사적 사실이 그 의미를 상실한 채 과거에 묻혀버리고 만다. 갑신정변은 1876년 개항 이후 새롭게 수립된 한일관계의 맥락과 1882년 임오군란 이후 군사적으로 청국의 속국으로 전락한 한중관계의 맥락 속에서 그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아가 한·중·일 삼국관계를 넘어 미국·러시아·영국·프랑스 등 서구 열강의 힘이 조선의 국내정치에 점차 그 영향력을 확대해 가는 과정에서 서양식 근대화만이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의 유일한 길로 인식했던 개화파가 시도한 ‘위로부터의 혁명’이 갑신정변이었다.

역사는 단순한 논리로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수많은 우연과 예기치 못한 돌발변수 속에서 흘러흘러서 하나의 사건을 만들게 된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 속에는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교훈이 남겨진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가 바라보았던 당시의 조선은, 그 체질을 근저에서부터 바꾸지 않고서는 더 이상 생존이 불가능한 거역할 수 없는 근대의 물결 위에 던져져 있었다. 스스로가 원하던지 원하지 않던지 상관없이 산업화와 제국주의의 소용돌이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를 바라보지 않고 심지어는 이에 역행하는 수구파에 대한 분노와 안타까움이 저 우정총국의 건물 안에 담겨 있다. 아울러 국제관계와 세력현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의욕만 앞세워 정변을 일으킨 개화파의 한계가 민족의 비극으로 이어지는 냉혹한 현실이 가슴을 저며 온다. 이 과정에서 근대사회의 주인으로 예정되어 있는 시민의 성장과 접목하지 못한 선각자들이 방황하는 모습이 처량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