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손탁호텔과 정동구락부

손탁(Antoniette Sontag, 1854-1925)이라는 서양 여성이 근대한국사의 한 페이지를 크게 장식하고 있다. 그녀는 러시아공사의 처형인 동시에 미국을 비롯한 서양 각국의 외교관들로부터 신뢰를 받았던 조선말의 중요 외국인이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그녀가 고종과 명성황후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고 나아가 그녀 또한 고종과 명성황후를 위하여 모험과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역할이 더욱 빛난다.

개화기 조선에서는 서양 여러 나라와 근대적 외교조약을 체결한 후 궁중에서 외교사절을 접대하는 일이 많아지자 외국어에 능통한 여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되었고, 손탁이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 손탁은 외국인을 위한 왕실 연회를 주관하면서 국내외 귀빈들에게 서양 요리를 대접했고, 고종과 명성황후에게도 서양 요리를 맛보게 했다. 특히 명성황후는 서양 열강의 소식을 재치 있게 전달하는 손탁을 총애하여 자주 접견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친일정부가 들어선 이후 고종과 명성황후는 손탁이 직접 조리하는 서양요리만을 안심하고 먹었을 정도로 손탁을 신임했다.

1895년 고종은 손탁에게 정동 29번지에 소재한 왕실 소유의 가옥 및 토지 1,184평을 하사했다. 이는 단순한 고마움의 표현을 넘어 고종의 정치적 투자였다. 이는 일본이 김홍집 친일정부를 구성하여 국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자 이에 대항하는 고종의 포석이었던 것이다. 손탁은 고종의 지원하에 본격적으로 배일운동을 추진했다. 그녀는 고종에게서 하사받은 한옥을 서양식으로 장식하여 서양 외교사절의 사교장으로 만들었고 이를 배일운동의 근거지로 활용했다.
이를 중심으로 조선의 개화파 관료와 지식인들이 모였고 여기에서 탄생된 것이 ‘정동구락부’이다. 일본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하고 국왕 중심의 자주적 근대화를 추구한다는 목표를 표방하고 출범한 정동구락부는 ‘정동파’, ‘친미파’ 또는 ‘존왕파’로 불렸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손탁의 사저를 중심으로 모였고 배일운동을 시도했으며 명성황후 시해 이후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러일전쟁까지 조선 내 일본의 영향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손탁의 배일운동이 성공하여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할 수 있게 되었고, 고종은 이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1898년 3월에 손탁의 사저에 서양식 벽돌 건물을 지어주었다. 손탁은 이를 호텔식으로 개조했고 서울에 오는 외국의 국빈들은 주로 여기에 머물렀다. 그러나 외국인들의 서울방문이 빈번해지자 방 5개로는 협소하게 되었고 이에 고종은 왕실재정으로 이를 확장해 주었다. 1902년 10월에 2층으로 된 서양식 벽돌건물이 준공되는데, 이 때 손탁호텔의 모습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사진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손탁호텔은 이화학당에 인수된 이후 소실되어 지금은 이화여고 내에 돌로 된 작은 표석만이 당시의 위치를 전해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