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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과 친일정부

고종이 손탁에게 손탁호텔의 부지를 제공했을 당시 조선은 김홍집 친일정부에 의해 실질적으로 통치되고 있었다. 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조선정부는 일본의 군사력에 의해 강압적으로 수립된 정부이다. 이 정부는 김홍집을 비롯해서 김윤식, 어윤중, 유길준 등 온건 개화파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이 정부는 청일전쟁의 과정에서 수립되었다.

1894년 6월 23일, 아산만 앞바다에 떠 있던 청국 군함 2척이 갑작스러운 함포사격을 받아 불길에 휩싸였다. 아무런 선전포고도 없이 일본 군함 3척이 기습적으로 공격했던 것이다. 이 때 청국이 무기와 병력을 수송하기 위해 빌린 영국 수송선이 청국 군함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났다. 일본 군함은 영국 수송선도 격침한 후 영국 선원만을 구조했고 청국 군함을 나포하여 인천으로 진격했다.

일본은 이날의 전투가 청국 군함이 먼저 발포했기 때문에 발발했다고 거짓 발표했다. 이로 말미암아 청국은 일본과의 전쟁에 휘말렸다. 갑신정변 때와는 달리 일본과의 전면전을 회피하고 있었던 리훙장으로서도 일본이 ‘깡패’ 같은 수법으로 도발해 오자 더 이상 전쟁을 피할 수만은 없었다. 결국 갑신정변 이후 군사력, 특히 해군력을 대폭 강화한 일본이 자신감을 갖고 저지른 도발에 대해 청국은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마침내 청국 육군이 평양에서 일본군에 의해 패배하고 뤼순(旅順)에 있었던 북양함대마저 일본 함대에 의해 격침당했으며, 그해 11월에 뤼순이 일본군에 의해 점령당함으로써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동아시아의 세력판도를 바꾼 청일전쟁이 발발한 원인은 조선의 동학농민혁명에 있다. 1894년 2월 17일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학정에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동학 접주 전봉준(全琫準)을 중심으로 민란을 일으켰다. 이 민란은 조선정부의 대응으로 해산되었으나, 그 해 4월 25일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하여 조선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도모하는 동학혁명군이 봉기했다. 이들 4,000여 명의 혁명군은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고 왕의 정치를 깨끗이 한다(逐滅倭夷 澄淸聖道)”, “군대를 이끌고 서울로 가서 권세귀족을 없앤다(驅兵入京 盡滅權貴)”는 등의 4대 강령을 내걸고 조선정부군과 접전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들은 마침내 전주성을 점령하고 조선정부와 개혁협상을 벌였다.

당시 조선정부는 갑신정변 이후 수립되었던 친청정부였다. 이 조선정부는 동학혁명군과 협상하는 동시에 청국에 이들을 공격할 군대의 파병을 요청했다. 이에 청국은 2,500명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했다. 한편 톈진조약(天津條約) 톈진조약은 갑신정변 후 1885년에 청국과 일본이 체결한 조약으로서, 청 · 일 양국 군대의 철수와 군대 파견시 사전통보 의무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에 따라 청군의 파병을 확인한 일본은 조선에 일본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한다.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 주재로 참모총장들을 출석시킨 내각회의의 결과에 따라 그 해 6월 9일부터 약 6,000명의 일본군이 조선에 파병되었다. 동시에 일본공사 오도리 게이스케(大鳥圭介)는 1894년 7월 23일 일본 보병 21연대를 이끌고 경복궁을 점령하였고 조선군을 무장 해제시켰다.

경복궁을 강점한 일본은 대원군을 섭정으로 추대하고 김병시(金炳始)를 영의정으로 하는 과도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고종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곧이어 나흘 뒤인 7월 27일, 김홍집(金弘集) · 김윤식(金允植) · 어윤중(魚允中) · 유길준(兪吉濬) 등을 중심으로 친일정부를 수립했다. 일본은 조선정부의 내정간섭의 명분을 ‘개혁’으로 내세웠으며, 대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기관으로 군국기무처를 수립했다. 김홍집은 영의정(후에 총리대신으로 개칭)인 동시에 군국기무처 총재로서 친일정부의 개혁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이 때의 개혁을 갑오개혁(甲午改革)이라고 부른다.

군국기무처는 여러 가지 개혁안을 시행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연호 폐지, 신분 철폐, 과부의 재가 허용, 노비제도 철폐, 국왕의 관리임명권을 의정부로 이관, 예산제도 시행, 은본위제도 채택, 조세 금납제, 과거제 폐지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정책들은 조선의 근대화를 촉진하는 것이었지만, 당시 조선의 현실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개혁안들도 허다했다. 군국기무처는 3개월 동안 200여 건의 개혁안을 발표했는데, 조선 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하지 않은 상태에서 입안된 것으로서 많은 경우 실효성이 없었다. 오직 확실한 것은 일본의 노골적인 내정간섭이었다.

1894년 10월 25 일본의 거물정치인 이노우에 카오루가 신임 일본공사로서 서울에 부임하여 대원군의 섭정 직을 박탈하고 군국기무처의 기능을 정지시켰다. 그리고 나서 이노우에는 고종을 전면에 내세우는 동시에 자신은 고종의 고문으로 자처했다. 12월 17일 고종의 친정체제가 수립되었고 군국기무처를 폐지하는 칙령이 반포되었다. 이날 수립된 제2차 김홍집 친일정부 내에는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박영효와 서광범이 각각 내무대신과 법무대신으로 입각했다. 나아가 이노우에는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하여 개혁자금 500만 환의 차관을 일본으로부터 도입하는 계획도 추진했다. 바야흐로 이노우에에 의한 조선통치가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