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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구락부의 배일운동

이노우에가 사실상 조선을 통치하기 시작한 1894년 12월 17일 직후 조선의 개화파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배일운동이 시작되었다.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 Chŏngdong Club)’라는 정치단체가 그 중심에 있었다. 정동구락부는 일본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하고 국왕 중심의 자주적 근대화를 추구한다는 목표를 표방하고 출범했다. 이들은 조선측 기록에서는 ‘정동파’로 불리기도 했고, 미국측 기록에서는 ‘미국파(American Party)’ ‘친미파(Pro-Amenrican Party)’ 또는 ‘존왕파(Loyalist Party)’로 불리기도 했다. 이들의 배일운동이 주로 미국과 러시아의 협력 속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일본측 기록에서는 ‘구미파(歐美派)’ ‘노미파(露美波)’로도 불렸다.

정동구락부의 구성원은 크게 친미파와 친러파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가 주로 미국에 유학하거나 미국공사관과 친분을 맺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후자는 러시아공사관과 친분을 맺고 있는 사람들이다. 친미파로는 이완용(李完用), 박정양(朴定陽), 이하영(李夏榮), 이채연(李采淵), 이상재(李商在), 정경원(鄭敬源), 윤웅렬(尹雄烈), 윤치호(尹致昊), 이윤용(李允用), 민상호(閔商鎬), 현흥택(玄興澤) 등이 있다. 친러파는 이범진(李範晋), 민영환(閔泳煥), 이학균(李學均), 김홍륙(金鴻陸) 등이다.

이들 정동구락부와 서울주재 서양인 외교관들의 친목단체인 외교관구락부(Cercle Diplomatique et Consularire)가 자연스럽게 어울린 장소가 손탁의 사저였다. 손탁은 고종에게 하사받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배일의식을 갖고 있었던 조선의 정치인들과 서양의 외교관들 간에 친목을 도모했다. 이로써 그녀는 일본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이 규합되기를 기대했다. 결과적으로 손탁의 시도는 성공했고, 본격적인 호텔 업무가 시작되지 않은 이때부터 이미 손탁 사저는 정동구락부의 근거지가 되었다.

정동구락부의 배일운동은 1895년의 삼국간섭 이후 더욱 활발해졌다. ‘삼국간섭’이란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청국으로부터 뺏은 요동반도를 러시아 · 프랑스 · 독일 등 3국이 간섭하여 청국에 되돌려주게끔 한 사건이다. 러시아를 비롯한 이들 3국은 일본의 세력팽창을 우려하여 요동반도로부터 일본군의 철수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러시와 등과 전쟁할 여력이 없었던 일본은 이에 굴복하게 되었고, 마침내 1895년 5월 5일 요동반도를 반환하기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삼국간섭의 결과 조선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지위는 흔들렸고 조선에서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 열강의 발언권은 높아졌다.

이와 같은 정세변화에 발맞추어 정동구락부는 배일운동의 일차적 목표를 친일정부의 실세인 박영효에 대한 견제로 구체화했다. 박영효는 고종이 정동구락부를 통해 러시아 등 서양세력을 등에 업으려고 하자 이에 대항하여 친일정부 통제 하에 있었던 훈련대에게 왕실호위를 맡기려고 하였다. 박영효의 왕실호위대 교체시도에 대해 정동구락부는 발빠르게 대응했다. 그들은 먼저 미국과 러시아 공사관에 박영효의 ‘내각전제(內閣專制)’를 폭로하면서 왕권회복을 요청했다. 특히 미국공사관에 대해서는 왕실호위대 교체는 미국인 군사교관 다이(William M. Dye) 장군의 진퇴와도 관련되어 있음을 강조했다. 그 결과 미국공사 씰(John M. B. Sill)과 러시아공사 베베르는 일본공사관을 방문하여 박영효를 노골적으로 비판하게 되었고, 일본은 더 이상 박영효를 지원할 수 없게 되었다.

정동구락부의 지원에 힘입어 고종은 1895년 7월 2일에 정동구락부 회원인 박정양을 총리대신에 임명하여 박정양 내각을 출범시켰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도 박영효는 내무장관으로 유임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5일 뒤인 7월 7일에 반역음모죄로 박영효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박영효는 다시 일본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정동구락부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박영효와 더불어 일본공사 이노우에도 몰락했다. 삼국간섭 이후 이노우에가 조선정부에 강요한 경부철도 부설권과 금광채굴권 등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그의 야심찬 500만 환 차관도입 건도 처음에는 일본정부가 300만 환으로 결정하여 제공할 듯 했으나 공수표가 되고 말았다. 이로써 이노우에가 추진했던 조선을 보호국화하려는 계획은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정권을 장악한 정동구락부는 조선의 자주독립을 대내외에 천명하는 개국기원절 행사를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정동구락부의 이범진이 부총재직을 맡고 사무위원장은 이채연 · 이하영 · 민상호 · 윤치호 등의 회원들과 프랑스 영사 르장드르(C. W. LeGendre)가 맡았다. 그해 9월 4일에 개최된 제503회 개국기원절에서 고정은 일본의 강압으로부터 벗어난 남다른 기쁨을 토로했다.

마침내 조선을 보호국화 하려던 이노우에가 9월 17일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후임으로 육군 중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조선에 부임했다. 일본 정계의 실력자가 풀이 죽어 조선을 떠나자 고종과 정동구락부는 자주독립의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정부 내 친일파를 제거했으며 이범진의 주도로 훈련대를 해산시키고자 했다. 을미사변이 발생하기 전날인 10월 7일에 군부대신 안경수(安駉壽)는 일본공사 미우라를 방문하여 훈련대 해산방침을 통보했다. 그 다음날 얼마나 처참한 사건이 일어날지 고종과 정동구락부는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