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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사건

1895년 10월 8일 새벽 6시경에 일본군과 낭인무사들이 경복궁에 난입했다. 이들은 거침없이 궁궐 안을 휘젓고 돌아다녔다. 이들 중 한 무리는 건청궁으로 달려가고 다른 한 무리는 옥호루로 몰려갔다. 건청궁으로 간 낭인들은 잠결에 일어나 공포에 떨고 있는 고종과 태자의 옷을 찢었고 태자는 상투가 잡힌 채 낭인이 휘두르는 칼에 맞아 의식을 잃었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는 그곳에 없었다.

옥호루로 몰려간 낭인들은 그들을 제지하는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稙)을 칼로 내리쳐 죽이고 내실로 들어갔다. 마침내 그들의 목표인 명성황후를 발견하자 서슴지 않고 칼로 쳐서 살해했다. 같이 있던 궁녀들도 무참히 살해했다. 그들은 명성황후의 시신을 옥호루 옆의 숲속으로 옮겨 놓고 장작을 쌓아 태워버렸다. 이들이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는 동안 경복궁은 일본군과 일본에 의해 키워진 훈련대 군인들의 삼엄한 경비 속에 철통같이 통제되었다.

이날 아침 7시경 이 모든 만행의 지휘자인 미우라 일본공사는 당당하게 고종을 알현했다. 고종은 공포에 질려 그에게 사건 수습을 요청했다. 미우라는 이 사건을 해산에 직면한 훈련대의 난동으로 규정하여 고종에게 훈련대 군인들을 처벌할 것과 무단으로 궁궐을 탈출한 명성황후를 서인(庶人)으로 만드는 조치를 취할 것을 강요했다. 참으로 뻔뻔한 행동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각국 외교사절들이 일본공사관을 찾아갔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일본의 관련여부를 추궁했다. 그러자 미우라는 태연히 이를 부인하면서 악의에 찬 조선인의 말보다 일본 외교관의 말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 러시아공사 베베르가 목격자가 조선인이 아니라 서양인임을 밝혔다. 그러자 미우라는 당황하면서 사실을 확인하겠다고 얼버무렸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현장에서 목격한 서양인은 러시아인 건축기사 사바찐과 미국인 군사교관 다이 장군이었다. 이들의 목격에 따르면 이날의 사건은 일본인 낭인무사들이 명성황후를 목표로 치밀하게 준비하여 저지른 만행이었다. 사바찐과 다이의 목격을 근거로 베베르는 조선정부의 외무아문을 방문하여 “살인자와 살인 교사자는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고 선언했으며, 조선주재 외교관들 사이에서 “일본은 야만의 나라”로 각인되었다. 결국 국제여론에 밀린 일본정부는 사건 일주일 후에 미우라를 비롯한 관련자 40여 명을 자국으로 소환해 재판절차를 밟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무죄 방면되었다.

한편 조선정부의 실권은 다시 일본으로 넘어갔다.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경복궁이 일본군에 의해 장악되자 정동구락부는 일시에 힘을 잃고 산개할 수밖에 없었다. 이완용 · 이하영 · 이채연 · 민상호 · 현홍택 등은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했고, 이범진 · 이학균 등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 곧바로 일본에 의해 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친일정부가 수립되었다. 순직한 궁내부대신 이경직의 후임에는 이재면(李載冕)이, 군부대신은 안경수 후임에 조희연(趙羲淵)이, 학부대신은 이완용 후임에 서광범이 겸임하고, 경무사는 이윤용 후임에 조희연이 겸임했으며, 내무부 협판에 유길준이, 농상공부 협판에는 정병하(鄭秉夏)가 임명되었다. 박정양은 형식상 내부대신에 유임되었지만 며칠 후 내각의 업무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중추원의장으로 좌천당했다.

고종은 신임 일본공사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의 감시 아래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다시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현명하고 다정한 부인을 잃은 상태에서 밤에는 자객이 무서워 잠을 못 자고 낮에는 독살이 무서워 음식을 마음 놓고 먹을 수 없었다. 다만 믿을 수 있는 것은 날마다 고종의 안위를 확인하는 서양인 외교관들과 선교사들뿐이었다. 특히 고종에게 서양음식을 제공한 손탁 여사는 믿음직한 동지였으며 정동구락부와 연결할 수 있는 연락선이었다.

손탁은 고종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정동구락부와 연계하여 고종을 일본의 손아귀로부터 구출했다. 그해 11월 28일 정동구락부 인사들은 미국과 러시아공사의 협조 및 아펜젤러, 언더우드 등과 협력하여 고종을 구출하기 위한 군사행동을 감행했다. 이들은 800여 명의 군대를 동원했으나 사전에 이 계획을 알고 있던 친일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들이 경복궁의 춘생문(春生門)의 담을 넘으려 했기 때문에 이를 ‘춘생문사건’이라고 부른다. 춘생문사건이 실패하자 이범진과 윤웅렬은 상해로 망명한다. 그러나 정동구락부는 고종을 일본으로부터 구출하겠다는 의지를 꺾지 않았고, 마침내 1896년 2월 11일에 그들은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시키는 데 성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