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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공사관과 아관파천

서울 도심의 아름다운 산책로인 정동길에서 만나는 옛 러시아공사관의 3층 석탑에는 조선말 격동의 시기에 얽힌 가슴 아픈 우리의 근대사가 아로새겨 있다. 예원학교 옆 오르막길에 들어서면 언덕 위에 보이는 3층짜리 하얀 석탑이 조선말기의 러시아공사관 건물의 일부이다. 이 탑 아래의 정동공원 인근 지역이 옛 러시아공사관의 부지였다. 현재의 정동 러시아대사관은 1990년 한 · 러수교 이후 새로 설립된 대사관이다.

옛 러시아공사관은 조선과 러시아가 근대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관계를 수립한 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설립된 서양식 르네상스 풍의 건물이다. 이 건물의 설계는 1885년경부터 인천해관에 소속되어 활발한 건축·토목측량 활동을 보였던 러시아인 사바찐(A. I. Scredin Sabatine)이 맡았다. 옛 러시아공사관의 모습은 몇몇 사진자료로 남아 있는데, 덕수궁 쪽에서 바라보는 러시아공사관은 언덕 위에 중세 유럽의 성채처럼 그 위용을 자랑했다. 이 건물은 해방 후 한 때 소련총영사관으로 사용되었다가 6·25 한국전쟁 때 파괴되고 말았다. 다만 3층 석탑만이 남아 과거를 기억하게 해준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일본의 무력에 의해 세워진 친일정부를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숨어들어갔다. 역사적으로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부른다. 이는 국가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치욕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고종의 입장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의 피신은 일본의 강압과 명성황후 시해 등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치욕을 당하고 있던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고종은 정동구락부의 이범진 등을 통해 러시아공사에게 공사관으로 피신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러시아공사는 이를 적극 수용했으며 러시아 황제는 즉각적으로 러시아 군함을 인천에 파견했다. 나아가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병력을 증원할 것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인천에 정박해 있던 군함으로부터 러시아 수병 100명이 대포와 함께 서울로 증파되었다. 이처럼 러시아가 고종의 공사관 피신 요청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한 것은 러시아의 군사전략이 태평양 함대 중심으로 재편되었기 때문이다.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데 성공한 고종은 미리 준비한 조칙을 발표하여 친일정부의 대신들을 파면하고 정동구락부 중심의 신정부를 공표했다. 그리고 나서 각국 외교사절을 초대하여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경위를 설명했는데, 조선의 형편을 잘 알고 있었던 각국 외교사절들은 고종의 설명에 공감의 뜻을 표명했다. 이후 러시아는 청 · 일전쟁 이후 일본이 조선 내에서 독점적으로 누렸던 권리를 일본과 동등하게 나눌 수 있게 되었으며, 러시아는 미국과 더불어 각종 이권을 가져갔다. 이에 따라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갔고, 마침내 피신 375일이 되는 2월 20일에 고종은 덕수궁, 당시 명칭으로는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이후 고종은 ‘대한제국’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실험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