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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과 근대시민운동의 전개

1896년 4월 『독립신문』이 창간되었다. 아관파천 후 일본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된 조선의 정치가들은 점진적인 교육을 통한 국민계몽을 급선무로 인식하고, 정부와 국민 간의 상호이해를 도모해야 한다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관민간의 이해를 촉진하고 국민을 계몽할 수 있는 신문을 발행할 것에 대해 합의했다. 독립협회과 『독립신문』의 탄생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독립협회는 국민계몽을 위한 중요한 이정표로 독립문 건립을 추진하였다. 독립문은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사대외교(事大外交)의 상징인 영은문(迎恩門)을 헌 자리에 세워졌다. 독립문의 이맛돌에는 대한제국의 문장(紋章)인 오얏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문 정면과 뒷면에는 좌우에 태극기가 새겨지고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 ‘獨立門’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현판석(懸板石)이 있다. 이것은 독립문건립을 제안한 서재필이 그 사업을 국민국가 건설의 상징으로 인식했다는 점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독립문을 건립하면서 조선시대 중국 사신에게 영접연과 전송연을 베풀었던 모화관(慕華館)도 독립관(獨立館)으로 바꾸었다. 11월 21일 대대적인 정초식(定礎式)을 거행하였고, 1897년 11월 20일에 완공되었다.

독립협회는 창간되면서 국권의 회복과 민권의 신장에 초점을 맞추고 활동을 해 나갔다. 독립협회의 계몽적 활동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당연히 독립신문의 발간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독립신문이 갖는 의의를 고찰해 보면, 종래 신지식과 신학문에 격리되어 있던 서민층을 각성시키고, 자유민권사상의 신장을 도모하고 봉건적 압정과 침체 속에 억눌려 있던 대중의 에너지를 발양시킴으로써, 국정개혁과 자주독립의 원동력을 개발하고, 개화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확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