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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파고다공원

1919년 1월 22일, 고종의 폭붕소식이 전해져 왔다. 고종 급서의 원인에 대해서는 독살설, 자살설 등 여러가지 설이 많았으나 , 당시 조선인들은 태자 이은이 일본 왕녀와 결혼을 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자살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이러한 소문은 전국의 백성들에게 퍼져나갔고, 그들에게 고종의 죽음은 조선민족의 죽음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3월 1일, 독립선언문 서명자 33인 중 29인은 인사동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 모여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만찬을 들었다. 그들은 탈출이란 부질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독립선언문이 일본당국에 들어가는 즉시 자신들이 체포되거나 처형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경찰에게 전화해서 자신들이 투옥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리고 경찰에게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끌려갔다. 평양에서 오느라 선언문 낭독에 늦었던 길선주목사는 종로경찰서에 자진 출두하여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처벌을 받겠다고 했다.

민족대표 33인인 독립선언을 하던 바로 그 시간, 전국 대도시에서는 일제히 독립운동시위가 전개되었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시민들은 시위를 벌이기로 한 장소에 집결했다.

시위는 처음부터 무저항적인 것이었다. 군중들은 무장하지 않았고,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곡에 맞춘 한국의 국가를 부르고 국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메웠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국에 가까워지면서 유럽에서 일어난 민족독립운동은 신문과 잡지를 통해 전세계에 전파되었다. 1918년 11월 독일 · 오스트리아의 항복으로 대전이 끝나고, 그해 1월 미국대통령 윌슨이 강화의 기초조건으로 발표한 14개의 원칙 중 1항이었던 “민족자결의 원칙”은 전세계 피압박민족들에게 큰 희망이 되었다.

당시 조선인들은 독립의 가능을 믿었고, 독립이 성취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기회에 조선이 일본의 치하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세계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해외에 있는 조선인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과 재외교포의 동향은 점차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지도층 인사들은 독립운동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고, 이민족의 차별에 의해 “민족”의식이 각인되기 시작한 조선인들 사이에는 민중궐기에 대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고종황제의 폭붕과 동경유학생들의 독립선언의 소식은 이러한 기운에 불을 질렀다.

3 · 1운동은 서울거사와 같은 날 평양 · 진남포 · 안주 · 의주 · 선천 · 원산 · 함흥에서 동시에 발발하였고, 3월 2일에는 해주 · 수안 · 황주 · 중화 · 강서 · 대동에서 터졌는데, 5일까지는 주로 경기 이북이 연일 시위를 계속했고, 5일에 군산, 8일에 대구, 10일에 철원 · 강경 · 광주, 11일에 부산, 19일에 괴산 등 순차로 전국에 확대되어 요원의 불길처럼 막을 수 없이 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