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총독부와 일제지배체제

총독부청사는 인도나 싱가포르의 위풍당당한 총독부건물처럼 조선총독부청사를 지음으로써 일본의 강함을 드러내려는 목적에서 지어졌다. 1916년 총독부 신청사가 착공되기 1년전,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50일 동안 경복궁에서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열었다. 공진회는 박람회의 다른 말로, 박람회가 큰 규모의 국제적인 것이었다면, 공진회는 작은 규모의 국내에서 열리는 박람회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조선에서 열린 박람회를 공진회로 지칭함은 조선이 일본에 속한 나라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공진회는 총독부 청사가 경복궁터에 들어서기 전, 비교의 시선을 통해 옛 왕조와 현 총독부, 조선과 일본의 차이를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열렸다. 이러한 비교의 시선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열등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일본의 조선통치를 정당화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조선휘보』1915년 10월을 보면 “공진회의 회장인 경복궁의 역사는 (구정(舊政)의 역사를) 고쳐 돌이켜 보게 하는 면도 있다”라고 밝히고 있다. 경복궁이야말로 조선의 구정(舊政)과 일제의 신정(新政)의 대조를 확연하게 드러내줄 수 있는 장소였다고 그들은 인식한 것이다. 즉 조선의 공진회는 전근대-근대, 야만-문명, 구정-신정의 차이를 드러내는 공간이었다.

이러한 대조는 시각적으로 드러났다. 광화문과 근정전 사이에 들어서 있던 공진회 건물들은 정적(靜的)이고 나지막한 경복궁의 건물들과는 달리 높은 위용을 보여주었다. 공진회장의 모습은 비밀스럽고 조용한 왕들의 폐쇄적 공간을 강하고 진취적인 선과 공간들이 빠른 속도로 열고 침범해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근정문 앞에 홍화문과 유화문(維和門), 용성문(用成門), 협생문(協生門)이 한꺼번에 헐렸고, 근정문 앞을 흐르던 금천의 영제교는 돌사자 세 마리와 함께 뜯겨 나가 경복궁 서쪽 창고인 내사복(內司僕) 바깥 정원으로 옮겨졌다. 동궁인 자선당(慈善堂)도 함께 사라졌다. 조선총독부청사의 건립은 일본의 조선침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