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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백화점과 신경제활동

1920년대 말, 서울의 상권을 둘러싸고 일본인들과 조선인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이때 백화점 유통업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박흥식이다.

당시 서울의 상권은 남촌(南村 : 명동, 충무로)이 중심으로, 남촌의 일본인 백화점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남촌과 대조적으로 북촌(北村 : 종로)의 상권은 부진했으며, 가난한 조선인들을 상대로 근근히 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나마 그렇게라도 이어가던 조선인의 상권이 위협받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조선은행 앞에 있는 미쓰코시(三越) 백화점이 옛 종로경찰서 자리로 옮겨온다는 소문이었다. 이 소문은 종로가 일본인들의 차지가 될 것이라는 위기감과 맞물려 종로상인들만의 백화점 건설사업을 촉발시켰다. 다른 상점들은 그다지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두 상점은 상당히 활기를 띠고 있었던 듯 하다. 그중 하나는 덕원상점을 경영하던 최남이 민규식(閔奎植)과 제휴해서 만든 동아백화점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금은방으로 준백화점급이었던 신태화의 화신상회였다.

박흥식이 백화점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때이다. 원래 박흥식은 선일지물회사라는 종이회사로 발판을 닦았고, 점차 사업을 확장해가면서 재계의 총아로 불리고 있었다. 박흥식은 화신상회에 자금을 대고 있었는데, 화신상회는 1930년, 무리한 사업확장과 점원들의 파업, 그리고 디플레이션으로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었다. 박흥식은 신태화에게 화신상회를 주식회사로 변경할 것을 요청하였고, 자신의 채권을 주식으로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 결국 1931년 9월 15일 자본금 100만원의 (주) 화신상회가 설립되었다.

박흥식은 화신상회의 경영실권을 장악하고 화신상회를 구조조정하기 시작했다. 임원과 점원을 “물갈이”하고 건물도 증개축했다. 당시 목조 2층건물이었던 화신상회를 500평 정도의 콘크리트 3층건물로 변신시켰다. 이것이 화신백화점의 시작이다.

비판과 경탄이 교차하는 가운데, 박흥식은 화신연쇄점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백화점 업계의 후발주자였던 화신이 일본인 백화점들과 경쟁하면서 성공적으로 경영을 확대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경기가 활황으로 치달으면서 상업계 전반이 호황을 누린 점에도 그 원인이 있었지만 거기에는 그럴만한 경영전략상의 배경이 있었다.(오진석, 2002, 「일제하 박흥식의 기업가활동과 경영이념」,『동방학지』참조) 첫 번째는 민족주의적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박흥식은 화신이 한국인 소유의 유일한 백화점, 즉 ‘민족백화점’임을 강조했을 때 한국인 고객의 상당수를 끌어들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언론매체를 통해 화신백화점 이야말로 한국인 전체를 대표하는 백화점이라고 주장했다. 화신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는가가 한국인 전체의 능력과 위신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에 박흥식이 벌여놓은 규모의 사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총독부와 일본은행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대인들에게 박흥식은 일본 재계가 거의 대부분의 상권을 잡고 있었던 식민지 시기에 성공한 조선인 자본가라는 자부심과 총독부와 일본금융을 등에 업고 성공한 친일이라는 상반된 평가가 교차하는, “야누스”적 존재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