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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와 베를린 마라톤

3 · 1운동은 일제의 식민지 언론탄압정책에도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3 · 1운동 직후 독립을 촉구하고 민족주의를 외치는 지하언론들이 속속들이 나타나고 있었다.『조선독립신문』,『국민신보』,『신대한보』,『각성호회보』,『국민회보』,『자유민보』,『독립운동뉴스』 등 무려 29종에 달하는 지하신문들이 바로 그 주역이었다. 3 · 1운동 초기에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일제는 운동이 점차 커지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조선의 언론을 허용해주게 되었다.

언론을 합법화시키는 것은 그 외의 언론을 불법화시키고, 언론기관을 통제하며, 내지연장주의를 선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유리한 정책이기도 했다. 그러나 합법적인 범위에서 전 조선인을 대상으로 언론활동을 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 불법적인 민족저항보다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큰 것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언론의 합법화는 실력양성론을 주장하던 민족운동가들에게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들은 1919년 10월 10여건의 한국인신문사의 설립을 신청하였다. 일제는 “일제의 통치를 교란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라는 조건을 붙여, ‘배포 전 검열제도’ 하에서 1920년 1월 6일자로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사신문의 3개 신문사 설립을 허가하였다.

동아일보는 1920년 4월 1일에 창간되었다. 동아일보는 김성수(金性洙) 등 77인의 발기로 창간된 일간지로, 조선 민중의 표현, 민주주의 지지, 문화주의의 제창을 3대 사시(社是)로 내 걸었다. 김성수와 송진우 이하 거의 모든 기자들이 2, 30대였기 때문에 청년신문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1. 조선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하노라, 2.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3.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라고 하는 3대 사시를 동아일보의 정신으로 삼고 활동했다. 총독부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해온 동아일보가 폐간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은 베를린 마라톤의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의 일장기를 삭제한 사건이었다.

이 시기는 일본 내 정치를 군벌이 장악하고,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한반도를 소위 병참기지화하던 때로, 황국신민화정책을 펴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그러므로 일장기 삭제사건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39년 9월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황민화정책에 따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언론은 모두 제거될 운명에 처해 졌다. 총독부는 1939년 11월부터 동아일보의 자진폐간을 종용하기 시작했으며 1940년 1월 15일, 자진폐간하고 매일신보와 통합할 것을 강요했다. 6개월 후 동아일보는 결국 폐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