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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로 보는 근대서울

갑오기념비 갑오기념비
갑오기념비 갑오기념비
갑오기념비 갑오기념비
갑오기념비 갑오기념비
박문사
1932년 일본은 장충단공원의 맞은 편 지금의 신라호텔이 들어선 곳에 이등박문의 사당인 박문사를 세워 이곳에 얽힌 우리의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말살하려 하였다. 그 후 박문사와 공원 안에 있던 일본인 동상은 광복후 철거되었다. 박문사
1932년 일본은 장충단공원의 맞은 편 지금의 신라호텔이 들어선 곳에 이등박문의 사당인 박문사를 세워 이곳에 얽힌 우리의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말살하려 하였다. 그 후 박문사와 공원 안에 있던 일본인 동상은 광복후 철거되었다.
박문사
1932년 일본은 장충단공원의 맞은 편 지금의 신라호텔이 들어선 곳에 이등박문의 사당인 박문사를 세워 이곳에 얽힌 우리의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말살하려 하였다. 그 후 박문사와 공원 안에 있던 일본인 동상은 광복후 철거되었다. 박문사
1932년 일본은 장충단공원의 맞은 편 지금의 신라호텔이 들어선 곳에 이등박문의 사당인 박문사를 세워 이곳에 얽힌 우리의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말살하려 하였다. 그 후 박문사와 공원 안에 있던 일본인 동상은 광복후 철거되었다.
박문사
1932년 일본은 장충단공원의 맞은 편 지금의 신라호텔이 들어선 곳에 이등박문의 사당인 박문사를 세워 이곳에 얽힌 우리의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말살하려 하였다. 그 후 박문사와 공원 안에 있던 일본인 동상은 광복후 철거되었다. 박문사
1932년 일본은 장충단공원의 맞은 편 지금의 신라호텔이 들어선 곳에 이등박문의 사당인 박문사를 세워 이곳에 얽힌 우리의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말살하려 하였다. 그 후 박문사와 공원 안에 있던 일본인 동상은 광복후 철거되었다.
박문사
1932년 일본은 장충단공원의 맞은 편 지금의 신라호텔이 들어선 곳에 이등박문의 사당인 박문사를 세워 이곳에 얽힌 우리의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말살하려 하였다. 그 후 박문사와 공원 안에 있던 일본인 동상은 광복후 철거되었다. 박문사
1932년 일본은 장충단공원의 맞은 편 지금의 신라호텔이 들어선 곳에 이등박문의 사당인 박문사를 세워 이곳에 얽힌 우리의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말살하려 하였다. 그 후 박문사와 공원 안에 있던 일본인 동상은 광복후 철거되었다.
박문사
1932년 일본은 장충단공원의 맞은 편 지금의 신라호텔이 들어선 곳에 이등박문의 사당인 박문사를 세워 이곳에 얽힌 우리의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말살하려 하였다. 그 후 박문사와 공원 안에 있던 일본인 동상은 광복후 철거되었다. 박문사
1932년 일본은 장충단공원의 맞은 편 지금의 신라호텔이 들어선 곳에 이등박문의 사당인 박문사를 세워 이곳에 얽힌 우리의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말살하려 하였다. 그 후 박문사와 공원 안에 있던 일본인 동상은 광복후 철거되었다.
박문사
1932년 일본은 장충단공원의 맞은 편 지금의 신라호텔이 들어선 곳에 이등박문의 사당인 박문사를 세워 이곳에 얽힌 우리의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말살하려 하였다. 그 후 박문사와 공원 안에 있던 일본인 동상은 광복후 철거되었다. 박문사
1932년 일본은 장충단공원의 맞은 편 지금의 신라호텔이 들어선 곳에 이등박문의 사당인 박문사를 세워 이곳에 얽힌 우리의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말살하려 하였다. 그 후 박문사와 공원 안에 있던 일본인 동상은 광복후 철거되었다.
박문사
1932년 일본은 장충단공원의 맞은 편 지금의 신라호텔이 들어선 곳에 이등박문의 사당인 박문사를 세워 이곳에 얽힌 우리의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말살하려 하였다. 그 후 박문사와 공원 안에 있던 일본인 동상은 광복후 철거되었다. 박문사
1932년 일본은 장충단공원의 맞은 편 지금의 신라호텔이 들어선 곳에 이등박문의 사당인 박문사를 세워 이곳에 얽힌 우리의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말살하려 하였다. 그 후 박문사와 공원 안에 있던 일본인 동상은 광복후 철거되었다.
박문사
1932년 일본은 장충단공원의 맞은 편 지금의 신라호텔이 들어선 곳에 이등박문의 사당인 박문사를 세워 이곳에 얽힌 우리의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말살하려 하였다. 그 후 박문사와 공원 안에 있던 일본인 동상은 광복후 철거되었다. 박문사
1932년 일본은 장충단공원의 맞은 편 지금의 신라호텔이 들어선 곳에 이등박문의 사당인 박문사를 세워 이곳에 얽힌 우리의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말살하려 하였다. 그 후 박문사와 공원 안에 있던 일본인 동상은 광복후 철거되었다.
박문사
1932년 일본은 장충단공원의 맞은 편 지금의 신라호텔이 들어선 곳에 이등박문의 사당인 박문사를 세워 이곳에 얽힌 우리의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말살하려 하였다. 그 후 박문사와 공원 안에 있던 일본인 동상은 광복후 철거되었다. 박문사
1932년 일본은 장충단공원의 맞은 편 지금의 신라호텔이 들어선 곳에 이등박문의 사당인 박문사를 세워 이곳에 얽힌 우리의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말살하려 하였다. 그 후 박문사와 공원 안에 있던 일본인 동상은 광복후 철거되었다.
박문사
1932년 일본은 장충단공원의 맞은 편 지금의 신라호텔이 들어선 곳에 이등박문의 사당인 박문사를 세워 이곳에 얽힌 우리의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말살하려 하였다. 그 후 박문사와 공원 안에 있던 일본인 동상은 광복후 철거되었다. 박문사
1932년 일본은 장충단공원의 맞은 편 지금의 신라호텔이 들어선 곳에 이등박문의 사당인 박문사를 세워 이곳에 얽힌 우리의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말살하려 하였다. 그 후 박문사와 공원 안에 있던 일본인 동상은 광복후 철거되었다.
동본원사
일본세력의 팽창과 함께 일본불교의 포교활동의 일환으로 독립한 사찰들을 설치하기 시작하였는데 서울에서는 특히 남산을 중심으로 많은 일제의 사찰이 이루어졌다. 남산 동본원사는 가장 규모가 컸던 것으로 처음 1906년에 건축할 때에도 남산의 큰 목재와 돌을 작벌 사용하였으며 1907년에는 용문산 상원사에 있던 신라시대의 대범종을 가져다 달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6년에는 경희궁의 숭정전 회양전을 헐어서 조계사 전각을 짓는 등 기세를 올렸다. 동본원사
일본세력의 팽창과 함께 일본불교의 포교활동의 일환으로 독립한 사찰들을 설치하기 시작하였는데 서울에서는 특히 남산을 중심으로 많은 일제의 사찰이 이루어졌다. 남산 동본원사는 가장 규모가 컸던 것으로 처음 1906년에 건축할 때에도 남산의 큰 목재와 돌을 작벌 사용하였으며 1907년에는 용문산 상원사에 있던 신라시대의 대범종을 가져다 달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6년에는 경희궁의 숭정전 회양전을 헐어서 조계사 전각을 짓는 등 기세를 올렸다.
별리궁 별리궁
세검정 세검정
전차와 전차노선도
일한와사전기주식회사에서 운영하는 전철노선도가 표시된 지도 최초의 전차가 1898년 서대문에서 청량리 사이에 개설된 이래 서울의 대중교통수단을 정착되었는데, 엽서에서 보이는 지도에서는 서대문에서 마포로 연결되는 전차노선과 보신각이 위치한 남대문로 시작점에서 남대문로를 따라 남대문, 서울역을 거쳐 용산에 이르는 노선이 보인다. 전차와 전차노선도
일한와사전기주식회사에서 운영하는 전철노선도가 표시된 지도 최초의 전차가 1898년 서대문에서 청량리 사이에 개설된 이래 서울의 대중교통수단을 정착되었는데, 엽서에서 보이는 지도에서는 서대문에서 마포로 연결되는 전차노선과 보신각이 위치한 남대문로 시작점에서 남대문로를 따라 남대문, 서울역을 거쳐 용산에 이르는 노선이 보인다.
전통한옥의 모습 전통한옥의 모습
대원군릉 대원군릉
장충단 공원
1900년에 고종황제의 어명으로 갑오개혁 이후에 순절한 장병들의 넋을 기리는 제사를 봄, 가을에 올리게 하고 원수부에 명하여 단을 쌓게 한것이 장충단이다. 장충단 공원
1900년에 고종황제의 어명으로 갑오개혁 이후에 순절한 장병들의 넋을 기리는 제사를 봄, 가을에 올리게 하고 원수부에 명하여 단을 쌓게 한것이 장충단이다.
장충단 공원
공원 안에는 아름다운 돌다리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 다리는 원래 지금의 수표동과 관수동 사이의 청계천 위에 세웠던 것이다. 장충단 공원
공원 안에는 아름다운 돌다리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 다리는 원래 지금의 수표동과 관수동 사이의 청계천 위에 세웠던 것이다.
장충단 공원
공원 안에는 아름다운 돌다리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 다리는 원래 지금의 수표동과 관수동 사이의 청계천 위에 세웠던 것이다. 장충단 공원
공원 안에는 아름다운 돌다리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 다리는 원래 지금의 수표동과 관수동 사이의 청계천 위에 세웠던 것이다.
경성법원 경성법원
세종로와 소공로가 보이는 서울전경
1925년 남산 조선신궁 완공, 1925년 경성부청 완공, 1926년 조선총독부 신청사 완공으로 식민도시 경성에서 식민지배를 위한 지배기구 건축의 대강이 완성되었다. 본 엽서에서 보이는 전경은 조선총독부 신청사가 완공된 직후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총독부에서 경성부청을 거쳐 남대문에 이르는 광화문통과 태평통은 관아의 거리와 언론사의 거리로 성격지워졌고, 경성부청에서 조선은행앞 광장에 이르는 소공로는 사무소건축의 거리로 성장하게 된다. 세종로와 소공로가 보이는 서울전경
1925년 남산 조선신궁 완공, 1925년 경성부청 완공, 1926년 조선총독부 신청사 완공으로 식민도시 경성에서 식민지배를 위한 지배기구 건축의 대강이 완성되었다. 본 엽서에서 보이는 전경은 조선총독부 신청사가 완공된 직후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총독부에서 경성부청을 거쳐 남대문에 이르는 광화문통과 태평통은 관아의 거리와 언론사의 거리로 성격지워졌고, 경성부청에서 조선은행앞 광장에 이르는 소공로는 사무소건축의 거리로 성장하게 된다.
서울의 전경
남산에서 남대문로를 바라본 서울의 전경. 멀리 조선은행이 보인다 서울의 전경
남산에서 남대문로를 바라본 서울의 전경. 멀리 조선은행이 보인다
서울의 전경
남산에서 바라본 육조거리와 경복궁. 서울의 전경
남산에서 바라본 육조거리와 경복궁.
서울의 전경
남산에서 바라본 본정일대 서울의 전경
남산에서 바라본 본정일대
서울의 전경
남산에서 바라본 태평로 일대와 정동 서울의 전경
남산에서 바라본 태평로 일대와 정동
서울의 전경
남산에서 바라본 남대문로 일대. 중앙에 조선은행이 보인다. 서울의 전경
남산에서 바라본 남대문로 일대. 중앙에 조선은행이 보인다.
광화문통, 태평로, 남대문 일대가 보이는 서울전경
본 프로젝트에서 다루는 주요 도시공간(광화문통에서 태평로 / 보신각에서 조선식산은행을 거쳐 조선은행이 이르는 남대문로 등)이 한눈에 보이는 전경사진이다. 새로 신축중인 조선총독부는 보이지만 경성부청사가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다. 현 을지로 입구 근처에는 조선식산은행(현 롯데백화점)이 보인다. 주 간선도로를 제외한 가로 안쪽은 대부분 한옥으로 가득차 있음을 알 수 있다. 광화문통, 태평로, 남대문 일대가 보이는 서울전경
본 프로젝트에서 다루는 주요 도시공간(광화문통에서 태평로 / 보신각에서 조선식산은행을 거쳐 조선은행이 이르는 남대문로 등)이 한눈에 보이는 전경사진이다. 새로 신축중인 조선총독부는 보이지만 경성부청사가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다. 현 을지로 입구 근처에는 조선식산은행(현 롯데백화점)이 보인다. 주 간선도로를 제외한 가로 안쪽은 대부분 한옥으로 가득차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의 전경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전경. 멀리 좌측으로 조선총독부가 보인다. 서울의 전경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전경. 멀리 좌측으로 조선총독부가 보인다.
서울의 전경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전경. 멀리 좌측으로 조선총독부가 보인다. 서울의 전경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전경. 멀리 좌측으로 조선총독부가 보인다.
서울의 전경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전경. 중앙 좌측에 경성부청이 보인다. 서울의 전경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전경. 중앙 좌측에 경성부청이 보인다.
서울의 전경 서울의 전경
서울의 전경
남산에서 바라본 조선은행 일대. 서울의 전경
남산에서 바라본 조선은행 일대.
서울의 전경
남산에서 바라본 조선은행 일대. 서울의 전경
남산에서 바라본 조선은행 일대.
서울의 전경
남산에서 바라본 본정일대. 중앙에 명동성당이 보인다. 서울의 전경
남산에서 바라본 본정일대. 중앙에 명동성당이 보인다.
서울의 전경 서울의 전경
서울의 전경
서울의 전경. 앞쪽으로 남촌일대의 주거지들이 보이고 멀리 육조거리가 보인다. 서울의 전경
서울의 전경. 앞쪽으로 남촌일대의 주거지들이 보이고 멀리 육조거리가 보인다.
서울의 전경
서울의 풍경 서울의 전경
서울의 풍경
서울의 전경
서울의 풍경 서울의 전경
서울의 풍경
서울의 전경
서울의 풍경 서울의 전경
서울의 풍경
서울의 전경
서울의 풍경 서울의 전경
서울의 풍경
서울의 전경
서울의 풍경 서울의 전경
서울의 풍경
서울의 전경
서울의 풍경 서울의 전경
서울의 풍경
서울의 전경
서울의 풍경 서울의 전경
서울의 풍경
서울의 전경
서울의 풍경 서울의 전경
서울의 풍경
서울의 전경
서울의 풍경 서울의 전경
서울의 풍경
보신각과 남대문로의 시작
사진에서는 이색적인 풍경이 여럿 보인다. 우선 보신각이 오늘날의 보신각과는 규모도 다르고 위치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보신각 앞에 보이는 ‘고등빙수상점’ 플래카드다. ‘빙수’가 새로운 기호상품으로 등장하였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플래카드가 새로운 광고방법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남대문로 쪽으로는 가로수도 보인다. 가로수의 키가 크지 않아서 식재한지 오래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데, 가로변에 가로수를 식재하는 것 역시 근대의 새로운 풍경이다. 보신각과 남대문로의 시작
사진에서는 이색적인 풍경이 여럿 보인다. 우선 보신각이 오늘날의 보신각과는 규모도 다르고 위치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보신각 앞에 보이는 ‘고등빙수상점’ 플래카드다. ‘빙수’가 새로운 기호상품으로 등장하였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플래카드가 새로운 광고방법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남대문로 쪽으로는 가로수도 보인다. 가로수의 키가 크지 않아서 식재한지 오래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데, 가로변에 가로수를 식재하는 것 역시 근대의 새로운 풍경이다.
파고다공원
파고다 공원은 면적이 약 11,003㎡으로 공원 내에 의암 손병희의 동상과 3·1운동 기념부조, 국보2호인 원각사10층탑과 보물3호인 원각사비가 자리하고 있다. 파고다공원
파고다 공원은 면적이 약 11,003㎡으로 공원 내에 의암 손병희의 동상과 3·1운동 기념부조, 국보2호인 원각사10층탑과 보물3호인 원각사비가 자리하고 있다.
파고다공원
파고다 공원은 면적이 약 11,003㎡으로 공원 내에 의암 손병희의 동상과 3·1운동 기념부조, 국보2호인 원각사10층탑과 보물3호인 원각사비가 자리하고 있다. 파고다공원
파고다 공원은 면적이 약 11,003㎡으로 공원 내에 의암 손병희의 동상과 3·1운동 기념부조, 국보2호인 원각사10층탑과 보물3호인 원각사비가 자리하고 있다.
파고다공원, 원각사지10층석탑
파고다 공원은 면적이 약 11,003㎡으로 공원 내에 의암 손병희의 동상과 3·1운동 기념부조, 국보2호인 원각사10층탑과 보물3호인 원각사비가 자리하고 있다. 파고다공원, 원각사지10층석탑
파고다 공원은 면적이 약 11,003㎡으로 공원 내에 의암 손병희의 동상과 3·1운동 기념부조, 국보2호인 원각사10층탑과 보물3호인 원각사비가 자리하고 있다.
파고다공원, 원각사지10층석탑
파고다 공원은 면적이 약 11,003㎡으로 공원 내에 의암 손병희의 동상과 3·1운동 기념부조, 국보2호인 원각사10층탑과 보물3호인 원각사비가 자리하고 있다. 파고다공원, 원각사지10층석탑
파고다 공원은 면적이 약 11,003㎡으로 공원 내에 의암 손병희의 동상과 3·1운동 기념부조, 국보2호인 원각사10층탑과 보물3호인 원각사비가 자리하고 있다.
YMCA(중앙기독교청년관)
좌측의 사진이 YMCA건물이다. 기독교청년회(基督敎靑年會)는 미국인 질렛의 지도 하에 대한제국기인 광무 7년(1903)에 되었으며 YMCA(중앙기독교청년관)건물은 1908년 12월 3일 당시로는 최고층인 지상 3층으로 준공되었다. YMCA(중앙기독교청년관)
좌측의 사진이 YMCA건물이다. 기독교청년회(基督敎靑年會)는 미국인 질렛의 지도 하에 대한제국기인 광무 7년(1903)에 되었으며 YMCA(중앙기독교청년관)건물은 1908년 12월 3일 당시로는 최고층인 지상 3층으로 준공되었다.
YMCA YMCA
한성전기회사는 종로2가에 가장 먼저 들어선 서양식 건축이다.
한일합방후 경성와사회사로 바뀌었다. 중앙의 현관과 상부의 시계탑 그리고 전면부의 현관 양측 창호처리는 전형적인 르네상스풍의 신고전주의양식을 따르고 있다. 특히, 사옥 중앙탑에 위치한 시계는 경성부민들에게 근대적 의미의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외에도 경성에서 전차를 최초로 운영했던 한성전기회사의 성격상 차량의 운행시간을 알려주는 기능도 함께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성전기회사는 종로2가에 가장 먼저 들어선 서양식 건축이다.
한일합방후 경성와사회사로 바뀌었다. 중앙의 현관과 상부의 시계탑 그리고 전면부의 현관 양측 창호처리는 전형적인 르네상스풍의 신고전주의양식을 따르고 있다. 특히, 사옥 중앙탑에 위치한 시계는 경성부민들에게 근대적 의미의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외에도 경성에서 전차를 최초로 운영했던 한성전기회사의 성격상 차량의 운행시간을 알려주는 기능도 함께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화신백화점 화신백화점
화신백화점 화신백화점
남대문로의 시작
일제강점기 사대문 안에서 가장 번화했던 곳의 한 곳인 보신각 네거리의 모습이다. 보신각이 45도 틀어져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근대적 교통수단의 도입에 따라 안전과 시야확보를 위해서 가각(가로 모퉁이 자르기)를 정리하면서 건물을 옮겼기 때문이다. 보신각 옆으로 남대문로가 시작되는 곳에 있었던 육의전 장랑이 있던 곳에는 동일은행이 새롭게 들어서 있다. 동일은행을 지나서 근대적 상업기능을 수용하면서 변화해가는 가로변 한옥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의 오른편에는 현 조흥은행의 전신인 한성은행이 보인다. 남대문로의 시작
일제강점기 사대문 안에서 가장 번화했던 곳의 한 곳인 보신각 네거리의 모습이다. 보신각이 45도 틀어져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근대적 교통수단의 도입에 따라 안전과 시야확보를 위해서 가각(가로 모퉁이 자르기)를 정리하면서 건물을 옮겼기 때문이다. 보신각 옆으로 남대문로가 시작되는 곳에 있었던 육의전 장랑이 있던 곳에는 동일은행이 새롭게 들어서 있다. 동일은행을 지나서 근대적 상업기능을 수용하면서 변화해가는 가로변 한옥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의 오른편에는 현 조흥은행의 전신인 한성은행이 보인다.
남대문로의 시작
일제강점기 사대문 안에서 가장 번화했던 곳의 한 곳인 보신각 네거리의 모습이다. 가로의 바닥이 아스팔트가 아닌 석재로 포장된 것이 이채롭다. 남대문로의 시작
일제강점기 사대문 안에서 가장 번화했던 곳의 한 곳인 보신각 네거리의 모습이다. 가로의 바닥이 아스팔트가 아닌 석재로 포장된 것이 이채롭다.
종로-남대문로 로타리 (화신백화점)
화신백화점은 1937년 11월에 동관 및 서관을 완공하였으며, 박길용에 의해 설계된 한국계 백화점이다. 건물의 규모는 대지 324.8평에 지하 1층 지상 6층의 연건평 2,034.4평의 근대식 상업건축물로 세련되고 개방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 외벽은 화강석을 두르고 현관 주위는 대리석으로 꾸며 웅장한 감을 주었다고 한다. 1939년 4월에 화신의 설립자인 박흥식(朴興植)은 화신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화신 뿐만 아니라 화신연쇄점(和信連鎖店) · 선일지물(鮮一紙物) · 대동흥업(大同興業) 등 4개의 사업체를 통합하여 운영하였다. 종로-남대문로 로타리 (화신백화점)
화신백화점은 1937년 11월에 동관 및 서관을 완공하였으며, 박길용에 의해 설계된 한국계 백화점이다. 건물의 규모는 대지 324.8평에 지하 1층 지상 6층의 연건평 2,034.4평의 근대식 상업건축물로 세련되고 개방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 외벽은 화강석을 두르고 현관 주위는 대리석으로 꾸며 웅장한 감을 주었다고 한다. 1939년 4월에 화신의 설립자인 박흥식(朴興植)은 화신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화신 뿐만 아니라 화신연쇄점(和信連鎖店) · 선일지물(鮮一紙物) · 대동흥업(大同興業) 등 4개의 사업체를 통합하여 운영하였다.
종로2가 거리풍경2: 양식건축과 거리풍경
종로거리에는 전차가 부설되면서 전봇대가 새로운 가로경관의 주된 요소로 등장하고 있음을 사진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사진의 왼편에는 전래의 육의전 행랑의 지붕위에 간판이 올라서 있는 모습이 근대 자본주의사회로 진입된 경성의 풍경을 보여준다. 육의전 행랑 뒤편으로 새롭게 건설된 한성전기회사 사옥과 황성 YMCA건물이 보이고, 사진의 오른편에는 가로변 행랑 사이 사이로 조적조 다층건물이 건축되는 모습이 보인다. 종로2가 거리풍경2: 양식건축과 거리풍경
종로거리에는 전차가 부설되면서 전봇대가 새로운 가로경관의 주된 요소로 등장하고 있음을 사진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사진의 왼편에는 전래의 육의전 행랑의 지붕위에 간판이 올라서 있는 모습이 근대 자본주의사회로 진입된 경성의 풍경을 보여준다. 육의전 행랑 뒤편으로 새롭게 건설된 한성전기회사 사옥과 황성 YMCA건물이 보이고, 사진의 오른편에는 가로변 행랑 사이 사이로 조적조 다층건물이 건축되는 모습이 보인다.
종로2가 거리풍경2: 근대거리의 풍경
한일합방은 되었지만 종로2가는 한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했던 북촌의 중심가로였다. 전통적인 육의전이 위치했던 이곳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조선의 강제점령이 신축되면서 부터다. 시계탑이 있는 건물이 조선에서 최초로 전차를 운영했던 한미전기주식회사 건물이다. 종로2가 거리풍경2: 근대거리의 풍경
한일합방은 되었지만 종로2가는 한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했던 북촌의 중심가로였다. 전통적인 육의전이 위치했던 이곳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조선의 강제점령이 신축되면서 부터다. 시계탑이 있는 건물이 조선에서 최초로 전차를 운영했던 한미전기주식회사 건물이다.
종로2가에서 종로네거리를 바라본 1930년대 초의 모습이다.
보차가 분리된 종로가로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는데, 길가의 가로수가 식재한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화신백화점이 신축되기 전의 풍경으로 후에 화신백화점이 인수하는 종로백화점 동아의 초기 모습이 보인다. 모더니즘풍으로 건축된 종로백화점 동아는 화재후 건축가 박길룡에 의해 역사주의 건축양식으로 개축되었다. 종로2가에서 종로네거리를 바라본 1930년대 초의 모습이다.
보차가 분리된 종로가로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는데, 길가의 가로수가 식재한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화신백화점이 신축되기 전의 풍경으로 후에 화신백화점이 인수하는 종로백화점 동아의 초기 모습이 보인다. 모더니즘풍으로 건축된 종로백화점 동아는 화재후 건축가 박길룡에 의해 역사주의 건축양식으로 개축되었다.
종로2가에서 종로네거리를 바라본 모습
자전거를 타고 가는 시민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가로의 끝에는 신축중인 화신백화점의 모습이 보인다. 종로2가에서 종로네거리를 바라본 모습
자전거를 타고 가는 시민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가로의 끝에는 신축중인 화신백화점의 모습이 보인다.
종로2정목 거리 (보신각)
이 종각은 1915년 도로를 보수할 때 원래 있던 위치에서 약간 뒤로 옮겨졌으며, 한국전쟁으로 파괴되었으나, 1953년 그 위치에서 다시 뒤로 물려 중건되었고, 1979년 다시 뒤로 물려 대지를 145평에서 850여 평으로 확장하고 주위에 돌난간을 돌렸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 연건평 144평의 중층(重層) 누각을 철근 콘크리트조로 재건하고 상층에 종을 걸었다. 종로2정목 거리 (보신각)
이 종각은 1915년 도로를 보수할 때 원래 있던 위치에서 약간 뒤로 옮겨졌으며, 한국전쟁으로 파괴되었으나, 1953년 그 위치에서 다시 뒤로 물려 중건되었고, 1979년 다시 뒤로 물려 대지를 145평에서 850여 평으로 확장하고 주위에 돌난간을 돌렸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 연건평 144평의 중층(重層) 누각을 철근 콘크리트조로 재건하고 상층에 종을 걸었다.
종로2정목 거리 (화신백화점 동/서관)
보차가 분리된 종로가로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는데, 길가의 가로수가 식재한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화신백화점이 신축되기 전의 풍경으로 후에 화신백화점이 인수하는 종로백화점 동아의 초기 모습이 보인다. 모더니즘풍으로 건축된 종로백화점 동아는 화재후 건축가 박길룡에 의해 역사주의 건축양식으로 개축되었다. 종로2정목 거리 (화신백화점 동/서관)
보차가 분리된 종로가로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는데, 길가의 가로수가 식재한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화신백화점이 신축되기 전의 풍경으로 후에 화신백화점이 인수하는 종로백화점 동아의 초기 모습이 보인다. 모더니즘풍으로 건축된 종로백화점 동아는 화재후 건축가 박길룡에 의해 역사주의 건축양식으로 개축되었다.
종로2정목 거리 (화신백화점 동관/YMCA)
보차가 분리된 종로가로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는데, 길가의 가로수가 식재한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화신백화점이 신축되기 전의 풍경으로 후에 화신백화점이 인수하는 종로백화점 동아의 초기 모습이 보인다. 모더니즘풍으로 건축된 종로백화점 동아는 화재후 건축가 박길룡에 의해 역사주의 건축양식으로 개축되었다. 종로2정목 거리 (화신백화점 동관/YMCA)
보차가 분리된 종로가로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는데, 길가의 가로수가 식재한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화신백화점이 신축되기 전의 풍경으로 후에 화신백화점이 인수하는 종로백화점 동아의 초기 모습이 보인다. 모더니즘풍으로 건축된 종로백화점 동아는 화재후 건축가 박길룡에 의해 역사주의 건축양식으로 개축되었다.
한성전기회사와 황성YMCA가 있는 가로 경관
한성전기회사와 황성YMCA는 종로의 가장 대표적인 양식건축으로 한인의 중심가로였던 종로의 성격에 맞게 일인자본의 개입되지 않았다. 후에 한성전기회사는 종로경찰서로 사용되었다. 한성전기회사와 황성YMCA가 있는 가로 경관
한성전기회사와 황성YMCA는 종로의 가장 대표적인 양식건축으로 한인의 중심가로였던 종로의 성격에 맞게 일인자본의 개입되지 않았다. 후에 한성전기회사는 종로경찰서로 사용되었다.
경성역(구)
1900년 8월 8일 한강철교가 개통되면서, 같은 해 서울 남대문역까지 기차가 들어오게 되었다. 1900년 겨우 10평짜리 목조 바라크 건물을 염천교 아래 논 가운데에 대충 짓고 ‘남대문정거장’이라 불렀다. 이것이 경성역의 시초이며, 이 역사는 1910년 경성역으로 개명되었다. 경성역(구)
1900년 8월 8일 한강철교가 개통되면서, 같은 해 서울 남대문역까지 기차가 들어오게 되었다. 1900년 겨우 10평짜리 목조 바라크 건물을 염천교 아래 논 가운데에 대충 짓고 ‘남대문정거장’이라 불렀다. 이것이 경성역의 시초이며, 이 역사는 1910년 경성역으로 개명되었다.
경성역(구) - 경부철도개통식
1900년 8월 8일 한강철교가 개통되면서, 같은 해 서울 남대문역까지 기차가 들어오게 되었다. 1900년 겨우 10평짜리 목조 바라크 건물을 염천교 아래 논 가운데에 대충 짓고 ‘남대문정거장’이라 불렀다. 이것이 경성역의 시초이며, 이 역사는 1910년 경성역으로 개명되었다. 경성역(구) - 경부철도개통식
1900년 8월 8일 한강철교가 개통되면서, 같은 해 서울 남대문역까지 기차가 들어오게 되었다. 1900년 겨우 10평짜리 목조 바라크 건물을 염천교 아래 논 가운데에 대충 짓고 ‘남대문정거장’이라 불렀다. 이것이 경성역의 시초이며, 이 역사는 1910년 경성역으로 개명되었다.
남대문 도성밖 거리
서울역과 남대문 사이의 거리 남대문 도성밖 거리
서울역과 남대문 사이의 거리
남대문 도성밖 거리
서울역과 남대문 사이의 거리 남대문 도성밖 거리
서울역과 남대문 사이의 거리
남대문 도성밖 거리
서울역과 남대문 사이의 거리 남대문 도성밖 거리
서울역과 남대문 사이의 거리
남대문 도성밖 거리
서울역과 남대문 사이의 거리 남대문 도성밖 거리
서울역과 남대문 사이의 거리
남대문 도성밖 거리
서울역과 남대문 사이의 거리 남대문 도성밖 거리
서울역과 남대문 사이의 거리
남대문 도성밖 거리
서울역과 남대문 사이의 거리 남대문 도성밖 거리
서울역과 남대문 사이의 거리
남대문 도성밖 거리 - 조선총독부 2주년 기념
서울역과 남대문 사이의 거리 남대문 도성밖 거리 - 조선총독부 2주년 기념
서울역과 남대문 사이의 거리
동일은행 동일은행
한성은행 한성은행
광통관 광통관
광통관 광통관
남대문로 1정목
식민지 조선의 제1 도시인 경성이 서구식 역사주의 양식건축의 거리로 변했음을 보여주는 널리 알려진 사진이다. 그러나 남대문통 1정목에서 이와 같은 장면이 연출되는 곳은 이곳 뿐으로 이 부분의 건너편이나 을지로에 가까운 1정목 부분에는 이와같은 류의 근대건축물이 들어서지 않았다. 사진에서 보이는 양식건축은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광통관, 대동보험, 한성은행이며 멀리 돔이 보이는 건물은 동일은행이다. 이들 건물의 성격이 말해주듯 일제 강점기 동안 남대문로는 상업의 중심가로였지만 특히 은행이 밀집한 금융거리로 성장하게 된다. 남대문로 1정목
식민지 조선의 제1 도시인 경성이 서구식 역사주의 양식건축의 거리로 변했음을 보여주는 널리 알려진 사진이다. 그러나 남대문통 1정목에서 이와 같은 장면이 연출되는 곳은 이곳 뿐으로 이 부분의 건너편이나 을지로에 가까운 1정목 부분에는 이와같은 류의 근대건축물이 들어서지 않았다. 사진에서 보이는 양식건축은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광통관, 대동보험, 한성은행이며 멀리 돔이 보이는 건물은 동일은행이다. 이들 건물의 성격이 말해주듯 일제 강점기 동안 남대문로는 상업의 중심가로였지만 특히 은행이 밀집한 금융거리로 성장하게 된다.
남대문1정목거리 (광통관, 대동생명, 한성은행)
식민지 조선의 제1 도시인 경성이 서구식 역사주의 양식건축의 거리로 변했음을 보여주는 널리 알려진 사진이다. 그러나 남대문통 1정목에서 이와 같은 장면이 연출되는 곳은 이곳 뿐으로 이 부분의 건너편이나 을지로에 가까운 1정목 부분에는 이와같은 류의 근대건축물이 들어서지 않았다. 사진에서 보이는 양식건축은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광통관, 대동보험, 한성은행이며 멀리 돔이 보이는 건물은 동일은행이다. 이들 건물의 성격이 말해주듯 일제 강점기 동안 남대문로는 상업의 중심가로였지만 특히 은행이 밀집한 금융거리로 성장하게 된다. 남대문1정목거리 (광통관, 대동생명, 한성은행)
식민지 조선의 제1 도시인 경성이 서구식 역사주의 양식건축의 거리로 변했음을 보여주는 널리 알려진 사진이다. 그러나 남대문통 1정목에서 이와 같은 장면이 연출되는 곳은 이곳 뿐으로 이 부분의 건너편이나 을지로에 가까운 1정목 부분에는 이와같은 류의 근대건축물이 들어서지 않았다. 사진에서 보이는 양식건축은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광통관, 대동보험, 한성은행이며 멀리 돔이 보이는 건물은 동일은행이다. 이들 건물의 성격이 말해주듯 일제 강점기 동안 남대문로는 상업의 중심가로였지만 특히 은행이 밀집한 금융거리로 성장하게 된다.
상업은행 상업은행
조지아백화점(미도파)
조지아백화점(정자옥, 丁子屋)은 본정(현 충무로)에서 소림양복점(小林洋服店)을 경영하여 오던 소림씨 일가(小林門中)가 1939년에 현 남대문로에 건립하였다. 이 건물은 현존하고 있으며 남대문로의 롯데백화점(옛 미도파백화점)으로 리노베이션되었지만 건물의 구조나 외형으로 예전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조지아백화점(미도파)
조지아백화점(정자옥, 丁子屋)은 본정(현 충무로)에서 소림양복점(小林洋服店)을 경영하여 오던 소림씨 일가(小林門中)가 1939년에 현 남대문로에 건립하였다. 이 건물은 현존하고 있으며 남대문로의 롯데백화점(옛 미도파백화점)으로 리노베이션되었지만 건물의 구조나 외형으로 예전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식산은행 식산은행
식산은행 식산은행
식산은행 식산은행
식산은행 식산은행
일본생명 일본생명
일본생명 일본생명
조선총독부 도서관
조선총독부는 1923년 소공동 소재 남별궁(南別宮별궁)터에 ,<조선총독부도서관>을 건립했다. 사진에 보이는 총독부도서관 정문인 광선문(光宣門)은 원구단 정문이었다고 한다. 원구단은 고종이 대한제국의 선포와 함께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건설한 것으로 원구단 건설 2년 뒤인 1899년에는 그 북쪽에 황궁우를 짓고 천신지기인 위패와 함께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또 1901년 원구단 동쪽에 석고단을 쌓고 그 정문을 광선문이라 했다고 한다. 이 석고단은 고종 황제 탄신 40주년을 맞이하여 그 성덕을 기리는 기념비였다. 원구단을 위시하여 황궁우 및 석고단의 설계 및 시공은 당시 내무부 기사 심의석이 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총독부 도서관
조선총독부는 1923년 소공동 소재 남별궁(南別宮별궁)터에 ,<조선총독부도서관>을 건립했다. 사진에 보이는 총독부도서관 정문인 광선문(光宣門)은 원구단 정문이었다고 한다. 원구단은 고종이 대한제국의 선포와 함께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건설한 것으로 원구단 건설 2년 뒤인 1899년에는 그 북쪽에 황궁우를 짓고 천신지기인 위패와 함께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또 1901년 원구단 동쪽에 석고단을 쌓고 그 정문을 광선문이라 했다고 한다. 이 석고단은 고종 황제 탄신 40주년을 맞이하여 그 성덕을 기리는 기념비였다. 원구단을 위시하여 황궁우 및 석고단의 설계 및 시공은 당시 내무부 기사 심의석이 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치요다생명보험
가옥, 창고 기타의 건조물 및 상점 가구 기계등의 동산. 부동산에 대한 화재보험, 일반의 해상보험 및 운송보험의 사업을 영업.남대문로 2정목에 위치 치요다생명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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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요다생명보험 -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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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요다생명보험 - 내부
가옥, 창고 기타의 건조물 및 상점 가구 기계등의 동산. 부동산에 대한 화재보험, 일반의 해상보험 및 운송보험의 사업을 영업.남대문로 2정목에 위치 치요다생명보험 - 내부
가옥, 창고 기타의 건조물 및 상점 가구 기계등의 동산. 부동산에 대한 화재보험, 일반의 해상보험 및 운송보험의 사업을 영업.남대문로 2정목에 위치
로타리 - 일본생명 앞
남대문로와 황금정이 만나는 곳으로 남대문1정목에서 남대문2정목을 바라본 사진이다. 일본생명과 그 옆으로 경성전기회사가 보인다. 로타리 - 일본생명 앞
남대문로와 황금정이 만나는 곳으로 남대문1정목에서 남대문2정목을 바라본 사진이다. 일본생명과 그 옆으로 경성전기회사가 보인다.
로타리 - 일본생명 앞
남대문로와 황금정이 만나는 곳으로 황금정에서 바라본 사진이다. 로타리 - 일본생명 앞
남대문로와 황금정이 만나는 곳으로 황금정에서 바라본 사진이다.
남대문2정목거리 (식산은행)
조선총독부가 1918년에 공포한「조선식산은행령」에 의해 산업자금의 공급을 전담하는 독자적인 금융기관의 설립을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남대문2정목거리 (식산은행)
조선총독부가 1918년에 공포한「조선식산은행령」에 의해 산업자금의 공급을 전담하는 독자적인 금융기관의 설립을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남대문로 2정목의 조선식산은행
식민지 지배를 위한 관청이외에는 2-3층의 조적조건축이 주를 이루는 가로풍경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전경의 끝이 조선은행앞 광장으로 주변에 조선은행 경성우편국 등이 위치해 있다. 미쓰코시 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이 건축되기 전 모습이다. 남대문로 2정목의 조선식산은행
식민지 지배를 위한 관청이외에는 2-3층의 조적조건축이 주를 이루는 가로풍경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전경의 끝이 조선은행앞 광장으로 주변에 조선은행 경성우편국 등이 위치해 있다. 미쓰코시 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이 건축되기 전 모습이다.
남대문2정목거리 (식산은행)
조선총독부가 1918년에 공포한「조선식산은행령」에 의해 산업자금의 공급을 전담하는 독자적인 금융기관의 설립을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남대문2정목거리 (식산은행)
조선총독부가 1918년에 공포한「조선식산은행령」에 의해 산업자금의 공급을 전담하는 독자적인 금융기관의 설립을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남대문2정목거리 (식산은행)
조선총독부가 1918년에 공포한「조선식산은행령」에 의해 산업자금의 공급을 전담하는 독자적인 금융기관의 설립을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남대문2정목거리 (식산은행)
조선총독부가 1918년에 공포한「조선식산은행령」에 의해 산업자금의 공급을 전담하는 독자적인 금융기관의 설립을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남대문로 2정목 전경
조선식산은행전경이 보이는 남대문로 2정목의 가로풍경이다. 엽서의 오른편에서 차도와 가로수 그리고 인도의 관계가 선명하게 보이고, 인도쪽에서 보이는 측면은 삼화은행과 경성전기주식회사다. 남대문로 2정목 전경
조선식산은행전경이 보이는 남대문로 2정목의 가로풍경이다. 엽서의 오른편에서 차도와 가로수 그리고 인도의 관계가 선명하게 보이고, 인도쪽에서 보이는 측면은 삼화은행과 경성전기주식회사다.
한성은행
후에 조흥은행의 전신이되는 남대문통 1정목의 한성은행 사옥의 모습이다. 한성은행 오른편에 전래의 가로변 한옥상가가 보이고, 가로변에는 가로수와 전봇대가 새로운 도시경관 요소로 등장했음을 보여준다. 가로변 한옥상가 앞에 인력거 2대가 대기하고 있는데, 이는 이 건물에 음식점이 있어 음식점 이용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성은행
후에 조흥은행의 전신이되는 남대문통 1정목의 한성은행 사옥의 모습이다. 한성은행 오른편에 전래의 가로변 한옥상가가 보이고, 가로변에는 가로수와 전봇대가 새로운 도시경관 요소로 등장했음을 보여준다. 가로변 한옥상가 앞에 인력거 2대가 대기하고 있는데, 이는 이 건물에 음식점이 있어 음식점 이용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행(한국은행)
조선은행은 1907년에 기공하여 1912년에 준공하였다. 식민지배를 위해 건축된 양식건축 중에서 가장 오래된 철근콘크리트 건축물이다. 일본근대건축의 1세대인 다쯔노 깅코(辰野金吾)가 설계했으며, 철근콘크리트구조에 석재로 마감된 건축물이다. 1층의 영업장은 이태리 팔라찌오의 중정에 지붕을 씌운 모습을 하고 있으며, 천창에서 채광이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공간구성은 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은행이라는 근대기능이 양식건축과 결합할 때 나타나는 초기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은행에 비해 20여년 후에 건축된 조선저축은행 본점(제일은행 남대문지점)의 경우 같은 양식건축임에도 불구하고, 내부공간구성에 있어서는 근대건축의 단일공간으로 구성된 것과 비교된다. 조선은행(한국은행)
조선은행은 1907년에 기공하여 1912년에 준공하였다. 식민지배를 위해 건축된 양식건축 중에서 가장 오래된 철근콘크리트 건축물이다. 일본근대건축의 1세대인 다쯔노 깅코(辰野金吾)가 설계했으며, 철근콘크리트구조에 석재로 마감된 건축물이다. 1층의 영업장은 이태리 팔라찌오의 중정에 지붕을 씌운 모습을 하고 있으며, 천창에서 채광이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공간구성은 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은행이라는 근대기능이 양식건축과 결합할 때 나타나는 초기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은행에 비해 20여년 후에 건축된 조선저축은행 본점(제일은행 남대문지점)의 경우 같은 양식건축임에도 불구하고, 내부공간구성에 있어서는 근대건축의 단일공간으로 구성된 것과 비교된다.
조선은행(한국은행)
조선은행은 1907년에 기공하여 1912년에 준공하였다. 식민지배를 위해 건축된 양식건축 중에서 가장 오래된 철근콘크리트 건축물이다. 일본근대건축의 1세대인 다쯔노 깅코(辰野金吾)가 설계했으며, 철근콘크리트구조에 석재로 마감된 건축물이다. 1층의 영업장은 이태리 팔라찌오의 중정에 지붕을 씌운 모습을 하고 있으며, 천창에서 채광이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공간구성은 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은행이라는 근대기능이 양식건축과 결합할 때 나타나는 초기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은행에 비해 20여년 후에 건축된 조선저축은행 본점(제일은행 남대문지점)의 경우 같은 양식건축임에도 불구하고, 내부공간구성에 있어서는 근대건축의 단일공간으로 구성된 것과 비교된다. 조선은행(한국은행)
조선은행은 1907년에 기공하여 1912년에 준공하였다. 식민지배를 위해 건축된 양식건축 중에서 가장 오래된 철근콘크리트 건축물이다. 일본근대건축의 1세대인 다쯔노 깅코(辰野金吾)가 설계했으며, 철근콘크리트구조에 석재로 마감된 건축물이다. 1층의 영업장은 이태리 팔라찌오의 중정에 지붕을 씌운 모습을 하고 있으며, 천창에서 채광이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공간구성은 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은행이라는 근대기능이 양식건축과 결합할 때 나타나는 초기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은행에 비해 20여년 후에 건축된 조선저축은행 본점(제일은행 남대문지점)의 경우 같은 양식건축임에도 불구하고, 내부공간구성에 있어서는 근대건축의 단일공간으로 구성된 것과 비교된다.
조선은행(한국은행)
조선은행은 1907년에 기공하여 1912년에 준공하였다. 식민지배를 위해 건축된 양식건축 중에서 가장 오래된 철근콘크리트 건축물이다. 일본근대건축의 1세대인 다쯔노 깅코(辰野金吾)가 설계했으며, 철근콘크리트구조에 석재로 마감된 건축물이다. 1층의 영업장은 이태리 팔라찌오의 중정에 지붕을 씌운 모습을 하고 있으며, 천창에서 채광이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공간구성은 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은행이라는 근대기능이 양식건축과 결합할 때 나타나는 초기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은행에 비해 20여년 후에 건축된 조선저축은행 본점(제일은행 남대문지점)의 경우 같은 양식건축임에도 불구하고, 내부공간구성에 있어서는 근대건축의 단일공간으로 구성된 것과 비교된다. 조선은행(한국은행)
조선은행은 1907년에 기공하여 1912년에 준공하였다. 식민지배를 위해 건축된 양식건축 중에서 가장 오래된 철근콘크리트 건축물이다. 일본근대건축의 1세대인 다쯔노 깅코(辰野金吾)가 설계했으며, 철근콘크리트구조에 석재로 마감된 건축물이다. 1층의 영업장은 이태리 팔라찌오의 중정에 지붕을 씌운 모습을 하고 있으며, 천창에서 채광이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공간구성은 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은행이라는 근대기능이 양식건축과 결합할 때 나타나는 초기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은행에 비해 20여년 후에 건축된 조선저축은행 본점(제일은행 남대문지점)의 경우 같은 양식건축임에도 불구하고, 내부공간구성에 있어서는 근대건축의 단일공간으로 구성된 것과 비교된다.
조선은행앞 광장 (상업은행)
미스꼬시 백화점에서 내려다 본 남대문로2정목. 근대적인 풍경의 서울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진이다. 조선은행앞 광장 (상업은행)
미스꼬시 백화점에서 내려다 본 남대문로2정목. 근대적인 풍경의 서울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진이다.
조선은행앞 광장
조선은행앞 광장에서 바라본 남대문로 3정목 사진. 왼쪽으로 청목당건물이 보인다. 조선은행앞 광장
조선은행앞 광장에서 바라본 남대문로 3정목 사진. 왼쪽으로 청목당건물이 보인다.
조선은행앞 광장과 미쓰코시백화점
일본인 상권의 중심인 남촌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곳이 조선은행 앞 광장이고, 그 중에서 조선은행과 경성우편국이 관공서로서 정보와 금융의 핵심이었다면 미쓰코시 백화점은 식민지 자본주의의 상징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따라서 금융과 정보통신망 그리고 자본주의의 상징인 조선은행, 경성우편국, 미쓰코시백화점이 입지한 조선은행 앞 광장은 경성 제일의 상업금융의 중심지였고, 이러한 도시공간의 성격은 해방이후에도 지속된다. 왼편의 경성우편국과 정면의 미쓰코시 백화점 사이에 오늘날에는 2호터널로 이어지는 길이 있으나 일제 강점기에는 이 길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은행앞 광장과 미쓰코시백화점
일본인 상권의 중심인 남촌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곳이 조선은행 앞 광장이고, 그 중에서 조선은행과 경성우편국이 관공서로서 정보와 금융의 핵심이었다면 미쓰코시 백화점은 식민지 자본주의의 상징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따라서 금융과 정보통신망 그리고 자본주의의 상징인 조선은행, 경성우편국, 미쓰코시백화점이 입지한 조선은행 앞 광장은 경성 제일의 상업금융의 중심지였고, 이러한 도시공간의 성격은 해방이후에도 지속된다. 왼편의 경성우편국과 정면의 미쓰코시 백화점 사이에 오늘날에는 2호터널로 이어지는 길이 있으나 일제 강점기에는 이 길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은행앞 광장 (상업은행)
조선은행앞 광장에서 바라본 남대문로 3정목 입구 풍경. 조선은행앞 광장 (상업은행)
조선은행앞 광장에서 바라본 남대문로 3정목 입구 풍경.
조선은행앞 광장 (조선은행)
남대문로 3정목 입구 풍경 조선은행앞 광장 (조선은행)
남대문로 3정목 입구 풍경
조선은행앞 광장 (조선은행)
남대문로 3정목 입구 풍경 조선은행앞 광장 (조선은행)
남대문로 3정목 입구 풍경
조선은행앞 광장에서 바라본 남대문방향 남대문통
1912년에 완공된 조선은행은 프랑스 성관풍 르네상스 절충주의 건축물로 일본의 1세대 근대건축가인 다쯔노 킹코에 의해 디자인되었다. 거리는 보차분리가 정착되기 전에 전차와 보행자는 물론 수레 등이 서로 혼재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은행앞 광장에서 바라본 남대문방향 남대문통
1912년에 완공된 조선은행은 프랑스 성관풍 르네상스 절충주의 건축물로 일본의 1세대 근대건축가인 다쯔노 킹코에 의해 디자인되었다. 거리는 보차분리가 정착되기 전에 전차와 보행자는 물론 수레 등이 서로 혼재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은행앞 광장에서 바라본 종로방향 남대문통
조선은행앞 광장 주변이 조선은행과 경성우편국으로 그 위용을 한껏 과시하는데 반해 종로방향의 남대문통 주변은 1~2층의 저층건물이 주를 이룸에 따라 전봇대와 전차운행을 위해 기에 늘어있는 전선이 오히려 지배적인 경관요소가 되고 있다. 조선은행앞 광장에서 바라본 종로방향 남대문통
조선은행앞 광장 주변이 조선은행과 경성우편국으로 그 위용을 한껏 과시하는데 반해 종로방향의 남대문통 주변은 1~2층의 저층건물이 주를 이룸에 따라 전봇대와 전차운행을 위해 기에 늘어있는 전선이 오히려 지배적인 경관요소가 되고 있다.
남대문3정목 거리
남대문4정목에서 바라본 3정목 거리풍경 남대문3정목 거리
남대문4정목에서 바라본 3정목 거리풍경
남대문로 4정목에서 남대문 방향을 바라본 모습
화면의 가운데에 있는 3개의 2층한옥을 중심으로 건설된 4층 안팎의 상가건물군과 주변 광고탑의 모습은 무르익은 식민지 자본주의의 풍경을 잘 보여준다. 광고 간판을 걸치는 것이 고려되지 않은 2층 한옥상가의 경우 건물2층의 상당부분이 간판으로 가려지곤 했다. 남대문로 4정목에서 남대문 방향을 바라본 모습
화면의 가운데에 있는 3개의 2층한옥을 중심으로 건설된 4층 안팎의 상가건물군과 주변 광고탑의 모습은 무르익은 식민지 자본주의의 풍경을 잘 보여준다. 광고 간판을 걸치는 것이 고려되지 않은 2층 한옥상가의 경우 건물2층의 상당부분이 간판으로 가려지곤 했다.
남대문3정목 거리
조선은행앞 광장에서 바라본 남대문로 3정목 입구 풍경. 남대문3정목 거리
조선은행앞 광장에서 바라본 남대문로 3정목 입구 풍경.
남대문과 관폐대사 조선신궁 참도
1925년에 완공된 남산의 관폐대사 조선신궁으로 이르는 참도가 시작되는 곳임을 보여준다. 전형적인 조선의 대표적인 문루와 일본 신사의 모티브로 구성된 신사 참도 조형물의 대비가 식민지 경성의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남대문 뒤편으로는 1929년에 완공된 조선총독부 상공장려관이 보인다. 남대문과 관폐대사 조선신궁 참도
1925년에 완공된 남산의 관폐대사 조선신궁으로 이르는 참도가 시작되는 곳임을 보여준다. 전형적인 조선의 대표적인 문루와 일본 신사의 모티브로 구성된 신사 참도 조형물의 대비가 식민지 경성의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남대문 뒤편으로는 1929년에 완공된 조선총독부 상공장려관이 보인다.
남대문
성벽이 훼철되기전 남대문과 남대문성곽의 바깥 모습이다. 남대문
성벽이 훼철되기전 남대문과 남대문성곽의 바깥 모습이다.
남대문
성벽이 훼철되기전 남대문과 남대문성곽의 바깥 모습이다. 전차가 개통된 이후 한동안 전차가 문루 아래로 지나다녔음을 보여준다. 남대문
성벽이 훼철되기전 남대문과 남대문성곽의 바깥 모습이다. 전차가 개통된 이후 한동안 전차가 문루 아래로 지나다녔음을 보여준다.
남대문
성벽이 훼철된 후의 남대문 풍경 남대문
성벽이 훼철된 후의 남대문 풍경
남대문
서울역과 남대문 사이의 거리풍경 남대문
서울역과 남대문 사이의 거리풍경
남대문
성벽이 훼철되기전 남대문과 남대문성곽의 바깥 모습이다. 전차가 개통된 이후 한동안 전차가 문루 아래로 지나다녔음을 보여준다. 사진의 좌편에는 조선시대부터 존재했던 2층한옥이 보이는데, 이 2층 한옥은 상가인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안에는 게시판도 보이고 인력거가 보여 새로운 근대풍경이 기존의 도시풍경과 어우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남대문
성벽이 훼철되기전 남대문과 남대문성곽의 바깥 모습이다. 전차가 개통된 이후 한동안 전차가 문루 아래로 지나다녔음을 보여준다. 사진의 좌편에는 조선시대부터 존재했던 2층한옥이 보이는데, 이 2층 한옥은 상가인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안에는 게시판도 보이고 인력거가 보여 새로운 근대풍경이 기존의 도시풍경과 어우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남대문 (독일)
성벽이 훼철되기전 남대문 풍경이 담긴 엽서 남대문 (독일)
성벽이 훼철되기전 남대문 풍경이 담긴 엽서
남대문 (한일합방 기념)
성벽이 훼철된 후 남대문 풍경이 담긴 엽서 남대문 (한일합방 기념)
성벽이 훼철된 후 남대문 풍경이 담긴 엽서
상공장려관
총독부(總督府) 상공장려관(商工奬勵館)이라고도 하는 본(本) 건물은 남대문 서쪽의 현 대한상공회의소 앞에 있었다. 1912년 11월 대한제국 농상공부(農商工部)의 청사를 개조하여 상품진열관으로 개관하였다. 1929년 11월에 다시 남산의 상품진열관을 보수하고 총독부상공장려관이라 개칭하여 낙성식이 거행되었다. 이 곳에 진열되는 상품은 한국내에서 생산되는 것 이외에도 만주와 일본의 상품도 진열되었다. 총독부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하여 관할하였다. 상공장려관
총독부(總督府) 상공장려관(商工奬勵館)이라고도 하는 본(本) 건물은 남대문 서쪽의 현 대한상공회의소 앞에 있었다. 1912년 11월 대한제국 농상공부(農商工部)의 청사를 개조하여 상품진열관으로 개관하였다. 1929년 11월에 다시 남산의 상품진열관을 보수하고 총독부상공장려관이라 개칭하여 낙성식이 거행되었다. 이 곳에 진열되는 상품은 한국내에서 생산되는 것 이외에도 만주와 일본의 상품도 진열되었다. 총독부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하여 관할하였다.
상공장려관
상품진열관은 합리주의(合理主義) 건축으로서 당시 일본 국내의 경향과 동일한 것이나 한국내에 있어서는 전위적(前衛的)인 형식의 건축물이다. 건물의 양식은 스틸 새쉬(steel-sash)에 의한 넓은 창(窓)과 캔틸레버(Cantilever)로 된 각층의 발코니, 만곡(彎曲)된 대지(垈地)를 이용한 비대칭의 입면(立面) 등으로 보아 완전한 근대주의적인 건물이다. 상공장려관
상품진열관은 합리주의(合理主義) 건축으로서 당시 일본 국내의 경향과 동일한 것이나 한국내에 있어서는 전위적(前衛的)인 형식의 건축물이다. 건물의 양식은 스틸 새쉬(steel-sash)에 의한 넓은 창(窓)과 캔틸레버(Cantilever)로 된 각층의 발코니, 만곡(彎曲)된 대지(垈地)를 이용한 비대칭의 입면(立面) 등으로 보아 완전한 근대주의적인 건물이다.
상공장려관
상품진열관은 합리주의(合理主義) 건축으로서 당시 일본 국내의 경향과 동일한 것이나 한국내에 있어서는 전위적(前衛的)인 형식의 건축물이다. 건물의 양식은 스틸 새쉬(steel-sash)에 의한 넓은 창(窓)과 캔틸레버(Cantilever)로 된 각층의 발코니, 만곡(彎曲)된 대지(垈地)를 이용한 비대칭의 입면(立面) 등으로 보아 완전한 근대주의적인 건물이다. 상공장려관
상품진열관은 합리주의(合理主義) 건축으로서 당시 일본 국내의 경향과 동일한 것이나 한국내에 있어서는 전위적(前衛的)인 형식의 건축물이다. 건물의 양식은 스틸 새쉬(steel-sash)에 의한 넓은 창(窓)과 캔틸레버(Cantilever)로 된 각층의 발코니, 만곡(彎曲)된 대지(垈地)를 이용한 비대칭의 입면(立面) 등으로 보아 완전한 근대주의적인 건물이다.
조선신문사 조선신문사
로타리 - 남대문앞 로타리 및 남대문4정목 거리
남대문로 4정목 입구 풍경 로타리 - 남대문앞 로타리 및 남대문4정목 거리
남대문로 4정목 입구 풍경
로타리 - 남대문 앞
남대문 주변 풍경 로타리 - 남대문 앞
남대문 주변 풍경
로타리 - 남대문 앞
남대문 주변 풍경 로타리 - 남대문 앞
남대문 주변 풍경
로타리 - 남대문 앞
남대문 주변 풍경 로타리 - 남대문 앞
남대문 주변 풍경
로타리 - 남대문 앞
남대문 주변 풍경 로타리 - 남대문 앞
남대문 주변 풍경
로타리 - 남대문 앞(조선신문사)
남대문 주변 풍경 로타리 - 남대문 앞(조선신문사)
남대문 주변 풍경
로타리 - 남대문 앞(조선신문사)
남대문 주변 풍경 로타리 - 남대문 앞(조선신문사)
남대문 주변 풍경
남대문 4정목의 남대문통
엽서의 큰 장면은 남대문 4정목의 풍경으로 3, 4층 상가건물이 곳곳에 들어차서 번화해진 남대문통의 모습을 보여준다. 거리 왼편의 자전거상이 이채로와 보이지만 이시기에 자전거는 중요한 교통수단의 하나로 정착하고 있었다. 엽서 우측 상단은 현 을지로 입구에서 경성운동장(현 서울운동장)방향의 황금정을 바라다 본 모습이다. 우측의 건물은 일본생명보험주시회사 경성지점 사옥이다. 엽서의 좌측 하단은 을지로 입구에서 조선은행방향의 남대문로를 바라본 모습이다. 왼편에 일본생명보험주식회사와 경성전기주식회사 사옥이 보인다. 남대문 4정목의 남대문통
엽서의 큰 장면은 남대문 4정목의 풍경으로 3, 4층 상가건물이 곳곳에 들어차서 번화해진 남대문통의 모습을 보여준다. 거리 왼편의 자전거상이 이채로와 보이지만 이시기에 자전거는 중요한 교통수단의 하나로 정착하고 있었다. 엽서 우측 상단은 현 을지로 입구에서 경성운동장(현 서울운동장)방향의 황금정을 바라다 본 모습이다. 우측의 건물은 일본생명보험주시회사 경성지점 사옥이다. 엽서의 좌측 하단은 을지로 입구에서 조선은행방향의 남대문로를 바라본 모습이다. 왼편에 일본생명보험주식회사와 경성전기주식회사 사옥이 보인다.
남대문4정목 거리
남대문로 4정목 입구 풍경 남대문4정목 거리
남대문로 4정목 입구 풍경
남대문에서 바라본 남대문통 전경
경성 인구30여만(한인 25만명, 일인 6만5천명) 시절의 남대문통 전경이다. 엽서의 좌측으로는 2층상가가 즐비해 있고, 오른 편으로는 경성우편국 너머로 명동성당이 보인다. 엽서의 오른편에 보이는 창고군은 남대문시장 기능의 일부인 것으로 추정된다. 남대문에서 바라본 남대문통 전경
경성 인구30여만(한인 25만명, 일인 6만5천명) 시절의 남대문통 전경이다. 엽서의 좌측으로는 2층상가가 즐비해 있고, 오른 편으로는 경성우편국 너머로 명동성당이 보인다. 엽서의 오른편에 보이는 창고군은 남대문시장 기능의 일부인 것으로 추정된다.
경성부청(서울시청)
경성부청사는 1925년 3월에 착공하여 1926년 10월에 지하 1층, 지상 3층의 근대식 건물로 총 건평은 2,502평으로 건축되었다. 신청사의 중앙탑과 돔은 일본의 국회의사당과 유사한 모습을 갖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비대칭의 평면구성임에도 불구하고, 좌우대칭의 정면구성과 기단부처리 등은 장식이 제거된 고전주의건축의 구성을 따르고 있다. 경성부청(서울시청)
경성부청사는 1925년 3월에 착공하여 1926년 10월에 지하 1층, 지상 3층의 근대식 건물로 총 건평은 2,502평으로 건축되었다. 신청사의 중앙탑과 돔은 일본의 국회의사당과 유사한 모습을 갖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비대칭의 평면구성임에도 불구하고, 좌우대칭의 정면구성과 기단부처리 등은 장식이 제거된 고전주의건축의 구성을 따르고 있다.
경성부청 경성부청
경성일보 신사옥
경성부청에 원 자리를 내어준 후 신축된 벽돌조 경성일보 사옥이다. 열주가 위치한 전면부와 1층부분의 창호 및 정면 파사드의 양단부 구성은 르네상스풍의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경성일보 신사옥
경성부청에 원 자리를 내어준 후 신축된 벽돌조 경성일보 사옥이다. 열주가 위치한 전면부와 1층부분의 창호 및 정면 파사드의 양단부 구성은 르네상스풍의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경성일보 사옥
경성부청에 원 자리를 내어준 후 신축된 벽돌조 경성일보 사옥이다. 열주가 위치한 전면부와 2층부분의 창호 및 정면 파사드의 양단부 구성은 르네상스풍의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경성일보 사옥
경성부청에 원 자리를 내어준 후 신축된 벽돌조 경성일보 사옥이다. 열주가 위치한 전면부와 2층부분의 창호 및 정면 파사드의 양단부 구성은 르네상스풍의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경성일보 구사옥
경성부청이 들어오기 이전에 있었던 경성일보 구사옥 모습 경성일보 구사옥
경성부청이 들어오기 이전에 있었던 경성일보 구사옥 모습
경성일보 구사옥
경성부청이 들어오기 이전에 있었던 경성일보 구사옥 모습 경성일보 구사옥
경성부청이 들어오기 이전에 있었던 경성일보 구사옥 모습
경성일보 구사옥
경성부청이 들어오기 이전에 있었던 경성일보 구사옥 모습 경성일보 구사옥
경성부청이 들어오기 이전에 있었던 경성일보 구사옥 모습
부민관
부민관은 태평1정목 60번지3(현 태평로1가 3번지)에 위치하였으며, 면적은 1,780평이다. 1935년 12월에 완공하였으며 총공사비는 61만 853원이며 건평 584평 연건평 1,717평이다. 건물 층수는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건물의 높이는 63척, 탑의 높이는 144척인 근대적인 외관을 가진 건물이다. 경성부에서는 당시의 경성부민(府民)을 위한 강연회나 오락, 연극, 영화, 음악, 무용 등의 공연을 위한 공간으로 부민관(府民館) 설립을 계획하였다. 부민관
부민관은 태평1정목 60번지3(현 태평로1가 3번지)에 위치하였으며, 면적은 1,780평이다. 1935년 12월에 완공하였으며 총공사비는 61만 853원이며 건평 584평 연건평 1,717평이다. 건물 층수는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건물의 높이는 63척, 탑의 높이는 144척인 근대적인 외관을 가진 건물이다. 경성부에서는 당시의 경성부민(府民)을 위한 강연회나 오락, 연극, 영화, 음악, 무용 등의 공연을 위한 공간으로 부민관(府民館) 설립을 계획하였다.
부민관
부민관은 태평1정목 60번지3(현 태평로1가 3번지)에 위치하였으며, 면적은 1,780평이다. 1935년 12월에 완공하였으며 총공사비는 61만 853원이며 건평 584평 연건평 1,717평이다. 건물 층수는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건물의 높이는 63척, 탑의 높이는 144척인 근대적인 외관을 가진 건물이다. 경성부에서는 당시의 경성부민(府民)을 위한 강연회나 오락, 연극, 영화, 음악, 무용 등의 공연을 위한 공간으로 부민관(府民館) 설립을 계획하였다. 부민관
부민관은 태평1정목 60번지3(현 태평로1가 3번지)에 위치하였으며, 면적은 1,780평이다. 1935년 12월에 완공하였으며 총공사비는 61만 853원이며 건평 584평 연건평 1,717평이다. 건물 층수는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건물의 높이는 63척, 탑의 높이는 144척인 근대적인 외관을 가진 건물이다. 경성부에서는 당시의 경성부민(府民)을 위한 강연회나 오락, 연극, 영화, 음악, 무용 등의 공연을 위한 공간으로 부민관(府民館) 설립을 계획하였다.
조선화재해상보험 주식회사
화재보험, 해상보험, 운송보험 및 화재해상운송의 재보험사업을 영업 조선화재해상보험 주식회사
화재보험, 해상보험, 운송보험 및 화재해상운송의 재보험사업을 영업
로타리 - 시청 앞
경성부청앞의 로타리 풍경 로타리 - 시청 앞
경성부청앞의 로타리 풍경
경성부청과 태평로
새롭게 신축된 경성부청과 태평로를 너머 광화문통(현 세종로) 끝에 위치한 조선총독부가 한 눈에 잡히는 전경은 식민지지배기구의 정비가 끝난 식민지 근대도시 경성의 상징적인 경관을 갖추고 있다. 경성부청과 태평로
새롭게 신축된 경성부청과 태평로를 너머 광화문통(현 세종로) 끝에 위치한 조선총독부가 한 눈에 잡히는 전경은 식민지지배기구의 정비가 끝난 식민지 근대도시 경성의 상징적인 경관을 갖추고 있다.
태평로
태평로는 개설되었으나, 경성일보가 원 위치(현 서울시청)를 경성부에 넘겨주고 태평로변에 위치하였다. 오른편의 조적조건축물이 이전한 경성일보사옥이다. 경성일보가 위치했던 곳은 현재, 서울프레스센터가 위치해 있다. 사진에서 거리의 끝에 신축한 조선총독부 신관이 보인다. 태평로
태평로는 개설되었으나, 경성일보가 원 위치(현 서울시청)를 경성부에 넘겨주고 태평로변에 위치하였다. 오른편의 조적조건축물이 이전한 경성일보사옥이다. 경성일보가 위치했던 곳은 현재, 서울프레스센터가 위치해 있다. 사진에서 거리의 끝에 신축한 조선총독부 신관이 보인다.
태평통1정목 가로 (부민관, 조선일보)
태평로1정목 풍경. 부민관과 조선일보 사옥이 보인다. 태평통1정목 가로 (부민관, 조선일보)
태평로1정목 풍경. 부민관과 조선일보 사옥이 보인다.
태평로
언론과 관아의 거리로 변한 1930년대 후반 태평로의 가로풍경이다. 태평로 거리에 꽤 자란 모습의 가로수가 보이고 그 뒤로 경성부청의 측면이 보인다. 서울의 주요가로에 가로수가 설치되기 시작한 것도 일제강점기에 도시미관 개선차원에서 식재되기 시작하였다. 가로수는 거리의 전봇대와 함께 대표적인 서울의 가로경관 변화를 선도하는 요소였다. 가로 좌편의 높은 탑을 갖고 있는 건물이 부민관이며 그 앞에 체신국회관 그리고 부민관 뒤편에는 건축가 박동진이 설계한 조선일보사옥이 위치해 있었다. 태평로
언론과 관아의 거리로 변한 1930년대 후반 태평로의 가로풍경이다. 태평로 거리에 꽤 자란 모습의 가로수가 보이고 그 뒤로 경성부청의 측면이 보인다. 서울의 주요가로에 가로수가 설치되기 시작한 것도 일제강점기에 도시미관 개선차원에서 식재되기 시작하였다. 가로수는 거리의 전봇대와 함께 대표적인 서울의 가로경관 변화를 선도하는 요소였다. 가로 좌편의 높은 탑을 갖고 있는 건물이 부민관이며 그 앞에 체신국회관 그리고 부민관 뒤편에는 건축가 박동진이 설계한 조선일보사옥이 위치해 있었다.
태평통1정목 가로 (조선화재해상보험)
태평로1정목 풍경. 우측에서 두번째 건물이 조선화재해상보험 건물이다. 태평통1정목 가로 (조선화재해상보험)
태평로1정목 풍경. 우측에서 두번째 건물이 조선화재해상보험 건물이다.
태평통1정목 가로
태평로1정목 풍경. 왼쪽으로 부민관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경성부청 측면부가 보인다. 태평통1정목 가로
태평로1정목 풍경. 왼쪽으로 부민관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경성부청 측면부가 보인다.
태평통2정목 가로
태평로2정목 풍경 태평통2정목 가로
태평로2정목 풍경
경기도청
조선총독부 우측(동측)에 위치해 있었다. 조선시대 의정부 터에 건축되었는데, 지금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붉은 벽돌로 건축된 건축물로 전체적으로 서양의 역사주의 양식건축의 틀을 갖추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장식은 간략화되어있다. 경기도청
조선총독부 우측(동측)에 위치해 있었다. 조선시대 의정부 터에 건축되었는데, 지금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붉은 벽돌로 건축된 건축물로 전체적으로 서양의 역사주의 양식건축의 틀을 갖추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장식은 간략화되어있다.
경기도청
조선총독부가 신축되기전에 경성부 한복판에 경기도청이 건축된 것은 한성부가 한일합방과 함께 일국의 수도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경기도의 한 도시인 ‘경성부’로 그 격이 격하되었기 때문이다. 경기도청
조선총독부가 신축되기전에 경성부 한복판에 경기도청이 건축된 것은 한성부가 한일합방과 함께 일국의 수도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경기도의 한 도시인 ‘경성부’로 그 격이 격하되었기 때문이다.
경복궁 경회루
경복궁 경회루 사진 경복궁 경회루
경복궁 경회루 사진
경복궁 근정전
경복궁 근정전 사진 경복궁 근정전
경복궁 근정전 사진
동십자각
경복궁의 동쪽 담 끝에 위치해 있었다. 사진의 전면에 보이는 개천은 중학천이며 그 위로 석교가 단촐하게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십자각 앞의 인력거는 이곳에 고위인사가 행차할만한 곳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동십자각
경복궁의 동쪽 담 끝에 위치해 있었다. 사진의 전면에 보이는 개천은 중학천이며 그 위로 석교가 단촐하게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십자각 앞의 인력거는 이곳에 고위인사가 행차할만한 곳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경복궁 망루각
경복궁의 동쪽 담 끝에 위치해 있었다. 사진의 전면에 보이는 개천은 중학천이며 그 위로 석교가 단촐하게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십자각 앞의 인력거는 이곳에 고위인사가 행차할만한 곳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경복궁 망루각
경복궁의 동쪽 담 끝에 위치해 있었다. 사진의 전면에 보이는 개천은 중학천이며 그 위로 석교가 단촐하게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십자각 앞의 인력거는 이곳에 고위인사가 행차할만한 곳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종황제즉위40주년기념 비각
황토현광장(현 광화문 네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기념비는 전각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각으로 통하는 출입구주변의 석물은 황제의 격에 따른 정교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고종황제즉위40주년기념 비각
황토현광장(현 광화문 네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기념비는 전각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각으로 통하는 출입구주변의 석물은 황제의 격에 따른 정교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세종로
광화문과 월대 그리고 해태가 있는 풍경, 1860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복원된 경복궁의 모습이 온전하게 보이는 장면, 1926년 조선총독부의 완공과 함께 광화문은 경복궁 동측의 건축문 북쪽으로 이축되었고, 월대는 철거되었다. 거리의 좌우에는 6조의 행각이 보인다. 세종로
광화문과 월대 그리고 해태가 있는 풍경, 1860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복원된 경복궁의 모습이 온전하게 보이는 장면, 1926년 조선총독부의 완공과 함께 광화문은 경복궁 동측의 건축문 북쪽으로 이축되었고, 월대는 철거되었다. 거리의 좌우에는 6조의 행각이 보인다.
남대문과 해태상
해태상위에 어린이가 올라가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해태는 전설 속의 동물로 불을 먹는 동물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불기운을 막고 왕실을 잘 보존하여 국가 대사를 이어가려는 소망이 담겨 있다고 한다. 본 사진에서 보이는 해태상을 딛고 서 있는 어린이 모습은 유희화되고 있는 해태상이 기울어 가는 국운을 상징하는 듯해서 더욱 애처로와 보인다. 남대문과 해태상
해태상위에 어린이가 올라가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해태는 전설 속의 동물로 불을 먹는 동물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불기운을 막고 왕실을 잘 보존하여 국가 대사를 이어가려는 소망이 담겨 있다고 한다. 본 사진에서 보이는 해태상을 딛고 서 있는 어린이 모습은 유희화되고 있는 해태상이 기울어 가는 국운을 상징하는 듯해서 더욱 애처로와 보인다.
경복궁 광화문
광화문과 해태상이 보인다. 해태는 전설 속의 동물로 불을 먹는 동물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불기운을 막고 왕실을 잘 보존하여 국가 대사를 이어가려는 소망이 담겨 있다고 한다. 본 사진에서 보이는 해태상을 딛고 서 있는 어린이 모습은 유희화되고 있는 해태상이 기울어 가는 국운을 상징하는 듯해서 더욱 애처로와 보인다. 경복궁 광화문
광화문과 해태상이 보인다. 해태는 전설 속의 동물로 불을 먹는 동물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불기운을 막고 왕실을 잘 보존하여 국가 대사를 이어가려는 소망이 담겨 있다고 한다. 본 사진에서 보이는 해태상을 딛고 서 있는 어린이 모습은 유희화되고 있는 해태상이 기울어 가는 국운을 상징하는 듯해서 더욱 애처로와 보인다.
경복궁 광화문
광화문 앞 육조거리 풍경 경복궁 광화문
광화문 앞 육조거리 풍경
경복궁 광화문
광화문 풍경. 경복궁 광화문
광화문 풍경.
경복궁 광화문
광화문 풍경. 경복궁 광화문
광화문 풍경.
태평로
남대문 앞에서 경성일보사옥(현 서울시청)을 바라본 태평로 풍경. 경성부청이 신축되기전에 위치했던 경성일보사옥이 터미널 비스터를 형성하고 있다. 1925년 이전의 거리풍경으로 좌우에는 한옥2층상가와 일식2층 상가가 입지해 있다. 태평로
남대문 앞에서 경성일보사옥(현 서울시청)을 바라본 태평로 풍경. 경성부청이 신축되기전에 위치했던 경성일보사옥이 터미널 비스터를 형성하고 있다. 1925년 이전의 거리풍경으로 좌우에는 한옥2층상가와 일식2층 상가가 입지해 있다.
경복궁 광화문
광화문 풍경. 경복궁 광화문
광화문 풍경.
조선총독부
지층과 지상 4층 건물로서 평면은 낱일(日)자형으로 총 9,600여 평으로 되어 있다. 구조는 철근 콘크리트로서 기둥 사이의 벽을 벽돌로 채우고 외부에 면하는 부분과 중정(中庭) 내 징두리는 화강석을 첨부하고 기타 중정 내 외벽은 전부 인조석 바르기로 하고 있다. 이 건물의 내외부에 사용한 화강석과 대리석은 전부 한국산이다. 높이 165척의 중앙탑옥의 돔은 원설계도에는 사각추에 가까운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지 건물의 그것은 둥글게 완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르네상스 양식에 바로크건축양식이 절충된 역사주의양식건축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데, 건물의 전면과 좌우에 베란다가 설치된 것은 유럽의 건축양식이 동남아시아를 거치면서 형성된 베란다식 식민지스타일이다. 조선총독부
지층과 지상 4층 건물로서 평면은 낱일(日)자형으로 총 9,600여 평으로 되어 있다. 구조는 철근 콘크리트로서 기둥 사이의 벽을 벽돌로 채우고 외부에 면하는 부분과 중정(中庭) 내 징두리는 화강석을 첨부하고 기타 중정 내 외벽은 전부 인조석 바르기로 하고 있다. 이 건물의 내외부에 사용한 화강석과 대리석은 전부 한국산이다. 높이 165척의 중앙탑옥의 돔은 원설계도에는 사각추에 가까운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지 건물의 그것은 둥글게 완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르네상스 양식에 바로크건축양식이 절충된 역사주의양식건축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데, 건물의 전면과 좌우에 베란다가 설치된 것은 유럽의 건축양식이 동남아시아를 거치면서 형성된 베란다식 식민지스타일이다.
조선총독부
독일인 건축가로 조선호텔 설계자인 ‘게 데라란데’에 의해 설계되었으나 ‘게 데라란데’의 사망으로 전 대만 총독부 기사이던 야촌일랑(野村一郞)이 설계를 마무리했다. 조선총독부
독일인 건축가로 조선호텔 설계자인 ‘게 데라란데’에 의해 설계되었으나 ‘게 데라란데’의 사망으로 전 대만 총독부 기사이던 야촌일랑(野村一郞)이 설계를 마무리했다.
조선총독부
1916년에 착공하여 1926년에 완공되어, 남산의 총독부가 이전하였다. 독일건축가 게에 데 라 란데에 의해서 설계되었으며, 건물의 전면과 좌우에 베란다가 설치되어 있는 콜로니얼건축양식의 외관을 갖추고 있다. 전면의 열주와 중앙의 돔 그리고 좌우 대칭과 건물 양단의 매스 구성 등은 고전주의의 틀을 갖고 있으나 거대기둥의 사용, 차량용 램프, 양단부의 처리 등은 네오바로크 건축양식의 특징을 갖고 있다. 1995년 철거되었으며 돔의 상부는 잘려서 독립기념관에 옮겨져 있다. 조선총독부
1916년에 착공하여 1926년에 완공되어, 남산의 총독부가 이전하였다. 독일건축가 게에 데 라 란데에 의해서 설계되었으며, 건물의 전면과 좌우에 베란다가 설치되어 있는 콜로니얼건축양식의 외관을 갖추고 있다. 전면의 열주와 중앙의 돔 그리고 좌우 대칭과 건물 양단의 매스 구성 등은 고전주의의 틀을 갖고 있으나 거대기둥의 사용, 차량용 램프, 양단부의 처리 등은 네오바로크 건축양식의 특징을 갖고 있다. 1995년 철거되었으며 돔의 상부는 잘려서 독립기념관에 옮겨져 있다.
조선총독부 그림
독일인 건축가로 조선호텔 설계자인 ‘게 데라란데’에 의해 설계되었으나 ‘게 데라란데’의 사망으로 전 대만 총독부 기사이던 야촌일랑(野村一郞)이 설계를 마무리했다. 조선총독부 그림
독일인 건축가로 조선호텔 설계자인 ‘게 데라란데’에 의해 설계되었으나 ‘게 데라란데’의 사망으로 전 대만 총독부 기사이던 야촌일랑(野村一郞)이 설계를 마무리했다.
조선총독부 청사내부
이 건물의 내부에 사용한 화강석과 대리석은 전부 한국산이다. 조선총독부 청사내부
이 건물의 내부에 사용한 화강석과 대리석은 전부 한국산이다.
조선총독부 항공사진
경복궁내에 위치한 조선총독부 배치를 보여주는 항공사진. 조선총독부 항공사진
경복궁내에 위치한 조선총독부 배치를 보여주는 항공사진.
조선총독부 통신국
조선보병대가 주둔했던 곳은 육조거리라는 말이 뜻하듯이 원래 예조(禮曹)가 있던 자리였다. 그러다가 이곳에 군사기구가 들어선 것은 대원군 시절의 일이다.1931년 4월에 조선보병대가 해산된 뒤로는 여기에 조선총독부의 체신국 분실 즉 보험관리국이 들어선다. 이는 1929년에 도입된 조선간이생명보험을 관리하던 기구였다. 그리고 이 기구의 기능과 위치는 해방이 되고도 체신부에서 넘겨받아 그대로 이어진다. 조선총독부 통신국
조선보병대가 주둔했던 곳은 육조거리라는 말이 뜻하듯이 원래 예조(禮曹)가 있던 자리였다. 그러다가 이곳에 군사기구가 들어선 것은 대원군 시절의 일이다.1931년 4월에 조선보병대가 해산된 뒤로는 여기에 조선총독부의 체신국 분실 즉 보험관리국이 들어선다. 이는 1929년에 도입된 조선간이생명보험을 관리하던 기구였다. 그리고 이 기구의 기능과 위치는 해방이 되고도 체신부에서 넘겨받아 그대로 이어진다.
체신요원양성소 체신요원양성소
경복궁 총독부박물관
일본은 물산공진회를 위해 건축한 유일한 내화건물을 본관으로 하여 박물관을 개관하였다. 이것이 바로 조선 총독부 박물관이다. 이 건물은 백악의 서양식 지하 1층, 지상 2층의 석조 건물로 정면에 석조기둥을 세웠고 내부에는 중앙의 큰 홀을 중심으로 좌우 2실씩 모두 5실로 나뉘어 있었으며 바로 이곳에 고미술품을 전시했다. 경복궁 총독부박물관
일본은 물산공진회를 위해 건축한 유일한 내화건물을 본관으로 하여 박물관을 개관하였다. 이것이 바로 조선 총독부 박물관이다. 이 건물은 백악의 서양식 지하 1층, 지상 2층의 석조 건물로 정면에 석조기둥을 세웠고 내부에는 중앙의 큰 홀을 중심으로 좌우 2실씩 모두 5실로 나뉘어 있었으며 바로 이곳에 고미술품을 전시했다.
경복궁 총독부박물관
일본은 물산공진회를 위해 건축한 유일한 내화건물을 본관으로 하여 박물관을 개관하였다. 이것이 바로 조선 총독부 박물관이다. 이 건물은 백악의 서양식 지하 1층, 지상 2층의 석조 건물로 정면에 석조기둥을 세웠고 내부에는 중앙의 큰 홀을 중심으로 좌우 2실씩 모두 5실로 나뉘어 있었으며 바로 이곳에 고미술품을 전시했다. 경복궁 총독부박물관
일본은 물산공진회를 위해 건축한 유일한 내화건물을 본관으로 하여 박물관을 개관하였다. 이것이 바로 조선 총독부 박물관이다. 이 건물은 백악의 서양식 지하 1층, 지상 2층의 석조 건물로 정면에 석조기둥을 세웠고 내부에는 중앙의 큰 홀을 중심으로 좌우 2실씩 모두 5실로 나뉘어 있었으며 바로 이곳에 고미술품을 전시했다.
경성상공회의소
경성상공회의소는 1919년 4월 19일 기공하여 같은 해 6월 22일에 정초식(定礎式)을 가지고 1920년 7월 준공되었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연건평 211평 3합으로 지하는 숙직실 주방 창고, 1층은 현관 사무실 회의실 도서실 응접실, 2층은 공회당 변소, 3층은 휴게실, 4층은 탑옥이다. 설계자는 조선은행 기사(技師)인 중재여자화(中材與資華)이다. 위치는 중구 소공동에 있다. 경성상업회의소는 1915년 7월 15일 제령(制令) 제4호의 공포에 의하여 조선인 경성상업회의소와 일본인 상업회의소를 합하여 경성 상공업의 개선 발달을 도모하였다. 이 기관은 상공업계의 통제기관으로 서울은 물론 한국의 산업, 상공인의 발전 등을 주도하였다. 경성상공회의소
경성상공회의소는 1919년 4월 19일 기공하여 같은 해 6월 22일에 정초식(定礎式)을 가지고 1920년 7월 준공되었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연건평 211평 3합으로 지하는 숙직실 주방 창고, 1층은 현관 사무실 회의실 도서실 응접실, 2층은 공회당 변소, 3층은 휴게실, 4층은 탑옥이다. 설계자는 조선은행 기사(技師)인 중재여자화(中材與資華)이다. 위치는 중구 소공동에 있다. 경성상업회의소는 1915년 7월 15일 제령(制令) 제4호의 공포에 의하여 조선인 경성상업회의소와 일본인 상업회의소를 합하여 경성 상공업의 개선 발달을 도모하였다. 이 기관은 상공업계의 통제기관으로 서울은 물론 한국의 산업, 상공인의 발전 등을 주도하였다.
조선철도호텔
원구단 터(남별궁) 6,750평에 1913년 4월에 기공하여 1914년 9월 30일에 준공한 지하 1층 지상 3층의 벽돌건물로서 허리벽 기타 요소에 돌을 붙이고 외벽에는 흑갈색 유약을 바른 화장(化粧)타일을 붙였으며 장식품은 대부분 영국산(英國産)이다. 조선철도호텔
원구단 터(남별궁) 6,750평에 1913년 4월에 기공하여 1914년 9월 30일에 준공한 지하 1층 지상 3층의 벽돌건물로서 허리벽 기타 요소에 돌을 붙이고 외벽에는 흑갈색 유약을 바른 화장(化粧)타일을 붙였으며 장식품은 대부분 영국산(英國産)이다.
조선철도호텔
중요설비를 보면 1층은 정면앞 중앙에 회전식문, 현관 뒤쪽의 대홀은 일반객의 휴게실 또는 대합실로 충당하고 식당은 30여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기타 독서실, 당구장, 주장(酒場), 음악실 등이 설비되어 있고, 2층 이상은 약간의 객실을 제외하고는 침실과 부속실로서 그 수는 69실(室)이다. 그 중 귀빈실 5, 특별실 10, 상등침실 29, 보통침실 17, 부청인실 5, 급사실 3이다. 지하실은 조리실, 제빙실, 세탁실 등으로 되어있다. 설계는 독일인 게에데라란데가 담당하였고 양식은 르네상스식이다. 조선철도호텔
중요설비를 보면 1층은 정면앞 중앙에 회전식문, 현관 뒤쪽의 대홀은 일반객의 휴게실 또는 대합실로 충당하고 식당은 30여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기타 독서실, 당구장, 주장(酒場), 음악실 등이 설비되어 있고, 2층 이상은 약간의 객실을 제외하고는 침실과 부속실로서 그 수는 69실(室)이다. 그 중 귀빈실 5, 특별실 10, 상등침실 29, 보통침실 17, 부청인실 5, 급사실 3이다. 지하실은 조리실, 제빙실, 세탁실 등으로 되어있다. 설계는 독일인 게에데라란데가 담당하였고 양식은 르네상스식이다.
조선철도호텔
이 건물은 1968년에 헐려지고 그 자리에 지금은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 호텔의 후원에는 3층의 팔각당이 있는데 이것은 고종이 황제로 즉위할 때 천신지지(天神地祗)와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에게 고제(告祭)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며 이를 환구단(**丘壇)이라 한다. 1910년 합방 후 일제의 침략 목적에서 각 방면으로 철도가 설치되자 경성이 교통의 요충지로서 외국인들의 내왕이 많아졌다. 철도국에서는 외국인 여행자들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호텔을 설립하였다. 조선철도호텔
이 건물은 1968년에 헐려지고 그 자리에 지금은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 호텔의 후원에는 3층의 팔각당이 있는데 이것은 고종이 황제로 즉위할 때 천신지지(天神地祗)와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에게 고제(告祭)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며 이를 환구단(**丘壇)이라 한다. 1910년 합방 후 일제의 침략 목적에서 각 방면으로 철도가 설치되자 경성이 교통의 요충지로서 외국인들의 내왕이 많아졌다. 철도국에서는 외국인 여행자들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호텔을 설립하였다.
조선철도호텔 내부
조선철도호텔 내부 사진 조선철도호텔 내부
조선철도호텔 내부 사진
장곡천 거리
경성부청과 경성우편국을 잊는 거리 풍경 장곡천 거리
경성부청과 경성우편국을 잊는 거리 풍경
본정 거리
본정(지금의 명동) 풍경 본정 거리
본정(지금의 명동) 풍경
본정 거리
본정(지금의 명동) 풍경 본정 거리
본정(지금의 명동) 풍경
본정 거리
본정(지금의 명동) 풍경 본정 거리
본정(지금의 명동) 풍경
본정 거리
본정(지금의 명동) 풍경 본정 거리
본정(지금의 명동) 풍경
경성우편국
경성우편국의 청사는 1913년 10월에 착공하여 1915년 9월에 준공되었다. 지하 3층의 연건평 1,320평 넓이로 지어진 이 건물은 구조 양식이 르네상스식으로 웅장하고 화려했으며 외양(外樣)은 벽돌과 석조로 혼합하여 건축되었다. 조선은행 · 경성부청사 · 총독부청사와 같이 중앙에는 근대형식적인 돔을 얹었고 창틀은 아치 형식으로 꾸몄으나 6·25전쟁 때 폭격으로 인하여 소실되었다. 경성우편국
경성우편국의 청사는 1913년 10월에 착공하여 1915년 9월에 준공되었다. 지하 3층의 연건평 1,320평 넓이로 지어진 이 건물은 구조 양식이 르네상스식으로 웅장하고 화려했으며 외양(外樣)은 벽돌과 석조로 혼합하여 건축되었다. 조선은행 · 경성부청사 · 총독부청사와 같이 중앙에는 근대형식적인 돔을 얹었고 창틀은 아치 형식으로 꾸몄으나 6·25전쟁 때 폭격으로 인하여 소실되었다.
경성우편국과 본정통 입구
정면의 경성우편국은 비록 붉은 벽돌로 건축되었지만 바로크풍의 화려한 장식과 규모를 자랑하는 대표적인 초기 역사주의건축양식의 관공서다. 경성우편국 우측에는 남촌의 대표적인 상업과 유행의 중심지인 혼마치(본정통) 입구가 보인다. 경성우편국과 본정통 입구
정면의 경성우편국은 비록 붉은 벽돌로 건축되었지만 바로크풍의 화려한 장식과 규모를 자랑하는 대표적인 초기 역사주의건축양식의 관공서다. 경성우편국 우측에는 남촌의 대표적인 상업과 유행의 중심지인 혼마치(본정통) 입구가 보인다.
미쓰코시백화점
미쓰코시백화점은 1934년에 준공된 지하 1층, 지상 4층 연건평 3,000여평의 건물로서 양식주의에서 근대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양식이다. 위치는 당시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맞은편의 본정 입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는 신세계백화점 건물로 활용되고 있다. 미쓰코시백화점
미쓰코시백화점은 1934년에 준공된 지하 1층, 지상 4층 연건평 3,000여평의 건물로서 양식주의에서 근대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양식이다. 위치는 당시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맞은편의 본정 입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는 신세계백화점 건물로 활용되고 있다.
미쓰코시백화점 미쓰코시백화점
미나카이백화점
미나카이백화점(삼중정백화점, 三中井)은 1922년에는 오복점(吳服店)을 경영하여 오던 중강승치랑(中江勝治郞)이라는 일본상인이 본정1정목(현, 충무로 1가 45번지)에 설립하였다. 미나카이백화점
미나카이백화점(삼중정백화점, 三中井)은 1922년에는 오복점(吳服店)을 경영하여 오던 중강승치랑(中江勝治郞)이라는 일본상인이 본정1정목(현, 충무로 1가 45번지)에 설립하였다.
조선저축은행과 미쓰코시백화점
우측 조선저축은행은 구(舊)경성부청터인 본정 1정목(현 충무로1가) 대지에서 1933년 9월 27일 기공하여 1935년 12월 2일에 석조건축물로 지어졌디.좌측 미나카이백화점(삼중정백화점, 三中井)은 1922년에는 오복점(吳服店)을 경영하여 오던 중강승치랑(中江勝治郞)이라는 일본상인이 본정1정목(현, 충무로 1가 45번지)에 설립하였다. 조선저축은행과 미쓰코시백화점
우측 조선저축은행은 구(舊)경성부청터인 본정 1정목(현 충무로1가) 대지에서 1933년 9월 27일 기공하여 1935년 12월 2일에 석조건축물로 지어졌디.좌측 미나카이백화점(삼중정백화점, 三中井)은 1922년에는 오복점(吳服店)을 경영하여 오던 중강승치랑(中江勝治郞)이라는 일본상인이 본정1정목(현, 충무로 1가 45번지)에 설립하였다.
조선저축은행(제일은행본점)
조선저축은행은 구(舊)경성부청터인 본정 1정목(현 충무로1가) 대지에서 1933년 9월 27일 기공하여 1935년 12월 2일에 석조건축물로 지어졌다. 조선저축은행(제일은행본점)
조선저축은행은 구(舊)경성부청터인 본정 1정목(현 충무로1가) 대지에서 1933년 9월 27일 기공하여 1935년 12월 2일에 석조건축물로 지어졌다.
본정입구 (경성우편국)
경성우편국 남측면에 위치한 본정 입구 전경 본정입구 (경성우편국)
경성우편국 남측면에 위치한 본정 입구 전경
본정1정목 거리
본정 1정목 거리풍경. 우측에 경성우편국이 보이고 로타리 너머로 청목당 건물이 보인다. 본정1정목 거리
본정 1정목 거리풍경. 우측에 경성우편국이 보이고 로타리 너머로 청목당 건물이 보인다.
본정1정목 거리
경성우편국 남측면에 위치한 본정 입구 전경 본정1정목 거리
경성우편국 남측면에 위치한 본정 입구 전경
본정2정목
본정 2정목 거리 풍경 본정2정목
본정 2정목 거리 풍경
경성재판소
경성재판소는 1929년 8월에 준공한 3층 콘크리트 건물로 연건평이 1,962평이다. 이 건물의 양식은[註42] 아케이드식 일부 창과 출입구의 아아치 등에는 고전풍(古典風)을 인용하였으나 대체적으로 양식주의(樣式主義)에서 오는 장식과 위엄감을 덜어 주었다. 경성재판소
경성재판소는 1929년 8월에 준공한 3층 콘크리트 건물로 연건평이 1,962평이다. 이 건물의 양식은[註42] 아케이드식 일부 창과 출입구의 아아치 등에는 고전풍(古典風)을 인용하였으나 대체적으로 양식주의(樣式主義)에서 오는 장식과 위엄감을 덜어 주었다.
덕수궁 대한문
정동(正東)에 동향한 정문(正門)으로, 석계(石階) 위에 삼문(三門)을 만들어 세웠다. 지금의 문은 도로 확장에 밀려 뒤로 물려졌고 석계는 노하(路下)에 매몰되어 있다. 지붕은 우진각기와지붕이다. 보통 정문은 돈화문(敦化門) · 홍화문(弘化門)과 같이 중문이나 이 문만은 단층이 되었는데 이는 중화전이 단층으로 재건됨에 따른 조화를 이룬 구성이었다고 보인다. 덕수궁 대한문
정동(正東)에 동향한 정문(正門)으로, 석계(石階) 위에 삼문(三門)을 만들어 세웠다. 지금의 문은 도로 확장에 밀려 뒤로 물려졌고 석계는 노하(路下)에 매몰되어 있다. 지붕은 우진각기와지붕이다. 보통 정문은 돈화문(敦化門) · 홍화문(弘化門)과 같이 중문이나 이 문만은 단층이 되었는데 이는 중화전이 단층으로 재건됨에 따른 조화를 이룬 구성이었다고 보인다.
덕수궁 대한문
정동(正東)에 동향한 정문(正門)으로, 석계(石階) 위에 삼문(三門)을 만들어 세웠다. 지금의 문은 도로 확장에 밀려 뒤로 물려졌고 석계는 노하(路下)에 매몰되어 있다. 지붕은 우진각기와지붕이다. 보통 정문은 돈화문(敦化門) · 홍화문(弘化門)과 같이 중문이나 이 문만은 단층이 되었는데 이는 중화전이 단층으로 재건됨에 따른 조화를 이룬 구성이었다고 보인다. 덕수궁 대한문
정동(正東)에 동향한 정문(正門)으로, 석계(石階) 위에 삼문(三門)을 만들어 세웠다. 지금의 문은 도로 확장에 밀려 뒤로 물려졌고 석계는 노하(路下)에 매몰되어 있다. 지붕은 우진각기와지붕이다. 보통 정문은 돈화문(敦化門) · 홍화문(弘化門)과 같이 중문이나 이 문만은 단층이 되었는데 이는 중화전이 단층으로 재건됨에 따른 조화를 이룬 구성이었다고 보인다.
덕수궁 대한문
정동(正東)에 동향한 정문(正門)으로, 석계(石階) 위에 삼문(三門)을 만들어 세웠다. 지금의 문은 도로 확장에 밀려 뒤로 물려졌고 석계는 노하(路下)에 매몰되어 있다. 지붕은 우진각기와지붕이다. 보통 정문은 돈화문(敦化門) · 홍화문(弘化門)과 같이 중문이나 이 문만은 단층이 되었는데 이는 중화전이 단층으로 재건됨에 따른 조화를 이룬 구성이었다고 보인다. 덕수궁 대한문
정동(正東)에 동향한 정문(正門)으로, 석계(石階) 위에 삼문(三門)을 만들어 세웠다. 지금의 문은 도로 확장에 밀려 뒤로 물려졌고 석계는 노하(路下)에 매몰되어 있다. 지붕은 우진각기와지붕이다. 보통 정문은 돈화문(敦化門) · 홍화문(弘化門)과 같이 중문이나 이 문만은 단층이 되었는데 이는 중화전이 단층으로 재건됨에 따른 조화를 이룬 구성이었다고 보인다.
덕수궁 대한문
정동(正東)에 동향한 정문(正門)으로, 석계(石階) 위에 삼문(三門)을 만들어 세웠다. 지금의 문은 도로 확장에 밀려 뒤로 물려졌고 석계는 노하(路下)에 매몰되어 있다. 지붕은 우진각기와지붕이다. 보통 정문은 돈화문(敦化門) · 홍화문(弘化門)과 같이 중문이나 이 문만은 단층이 되었는데 이는 중화전이 단층으로 재건됨에 따른 조화를 이룬 구성이었다고 보인다. 덕수궁 대한문
정동(正東)에 동향한 정문(正門)으로, 석계(石階) 위에 삼문(三門)을 만들어 세웠다. 지금의 문은 도로 확장에 밀려 뒤로 물려졌고 석계는 노하(路下)에 매몰되어 있다. 지붕은 우진각기와지붕이다. 보통 정문은 돈화문(敦化門) · 홍화문(弘化門)과 같이 중문이나 이 문만은 단층이 되었는데 이는 중화전이 단층으로 재건됨에 따른 조화를 이룬 구성이었다고 보인다.
덕수궁 전경
1904년 경운궁 대화재로 중화전이 소실된 후 1층 전각으로 새로건축되었다. 본 사진은 중화전이 소실되기 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석조전이 입지하기전까지 구성헌이 입지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덕수궁 전경
1904년 경운궁 대화재로 중화전이 소실된 후 1층 전각으로 새로건축되었다. 본 사진은 중화전이 소실되기 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석조전이 입지하기전까지 구성헌이 입지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덕수궁 전경 덕수궁 전경
덕수궁 전경 덕수궁 전경
덕수궁 전경 덕수궁 전경
덕수궁 전경 덕수궁 전경
덕수궁 중화전 덕수궁 중화전
덕수궁 함령전, 덕홍전 덕수궁 함령전, 덕홍전
덕수궁 미술관
덕수궁 미술관은 중구 정동 5-1 덕수궁 내에 있으며 1938년 3월 31일에 준공되었다.평면적인 배치는 석조전과 직각으로 동쪽을 면하고, 두 건물의 연결을 위하여 중간에 보일러실을 두고 그 위에 건널복도를 만들었다. 중앙 정면은 돌계단으로 홀에 이르고, 지층(地層)은 사무실, 창고 등을 두고 2층 홀 정면은 귀빈실로 충당하고, 그 밖에는 3개 층 모두 진열실과 일반 휴식실로 하였다. 덕수궁 미술관
덕수궁 미술관은 중구 정동 5-1 덕수궁 내에 있으며 1938년 3월 31일에 준공되었다.평면적인 배치는 석조전과 직각으로 동쪽을 면하고, 두 건물의 연결을 위하여 중간에 보일러실을 두고 그 위에 건널복도를 만들었다. 중앙 정면은 돌계단으로 홀에 이르고, 지층(地層)은 사무실, 창고 등을 두고 2층 홀 정면은 귀빈실로 충당하고, 그 밖에는 3개 층 모두 진열실과 일반 휴식실로 하였다.
덕수궁 미술관
구조는 가구체(架構體)는 철근 콘크리트, 홀 지붕은 철골 천창(天窓)으로 하였다. 외장은 정면 계단 · 대석(臺石), 허리와 처마돌림띠 등은 화강석으로 하고 일반 벽체는 캐스트스톤으로 하였다. 3층 건물과 면적은 건널복도를 합하여 연 1,130여 평이다.양식은 기왕 있었던 석조전과 조화되게 하기 위하여 고전주의를 택하고 있다. 1933년 덕수궁이 일반에 공개되면서 궁내 여러 건물을 수리하고 석조전을 미술관으로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진열된 미술품들은 일본 근대 대가급(大家級)의 작품뿐이었다. 덕수궁 미술관
구조는 가구체(架構體)는 철근 콘크리트, 홀 지붕은 철골 천창(天窓)으로 하였다. 외장은 정면 계단 · 대석(臺石), 허리와 처마돌림띠 등은 화강석으로 하고 일반 벽체는 캐스트스톤으로 하였다. 3층 건물과 면적은 건널복도를 합하여 연 1,130여 평이다.양식은 기왕 있었던 석조전과 조화되게 하기 위하여 고전주의를 택하고 있다. 1933년 덕수궁이 일반에 공개되면서 궁내 여러 건물을 수리하고 석조전을 미술관으로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진열된 미술품들은 일본 근대 대가급(大家級)의 작품뿐이었다.
덕수궁 석조전
하딩에 의해 설계된 석조전은 1900년 착공하여 1910년에 완공된 비운의 건축물이다. 기단부 위의 열주와 상부의 페디먼트는 전형적인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다. 한편, 전면기둥은 원형이지만, 좌우 날개 부분에는 사각형의 이오니아 건축양식의 주두를 갖고 있다. 본 건물은 조선정부가 개명한 근대국가의 이미지를 갗주기 위해 신축한 건물이다. 덕수궁 석조전
하딩에 의해 설계된 석조전은 1900년 착공하여 1910년에 완공된 비운의 건축물이다. 기단부 위의 열주와 상부의 페디먼트는 전형적인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다. 한편, 전면기둥은 원형이지만, 좌우 날개 부분에는 사각형의 이오니아 건축양식의 주두를 갖고 있다. 본 건물은 조선정부가 개명한 근대국가의 이미지를 갗주기 위해 신축한 건물이다.
덕수궁 석조전
하딩에 의해 설계된 석조전은 1900년 착공하여 1910년에 완공된 비운의 건축물이다. 기단부 위의 열주와 상부의 페디먼트는 전형적인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다. 한편, 전면기둥은 원형이지만, 좌우 날개 부분에는 사각형의 이오니아 건축양식의 주두를 갖고 있다. 본 건물은 조선정부가 개명한 근대국가의 이미지를 갗주기 위해 신축한 건물이다. 덕수궁 석조전
하딩에 의해 설계된 석조전은 1900년 착공하여 1910년에 완공된 비운의 건축물이다. 기단부 위의 열주와 상부의 페디먼트는 전형적인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다. 한편, 전면기둥은 원형이지만, 좌우 날개 부분에는 사각형의 이오니아 건축양식의 주두를 갖고 있다. 본 건물은 조선정부가 개명한 근대국가의 이미지를 갗주기 위해 신축한 건물이다.
석조전
하딩에 의해 설계된 석조전은 1900년 착공하여 1910년에 완공된 비운의 건축물이다. 기단부 위의 열주와 상부의 페디먼트는 전형적인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다. 한편, 전면기둥은 원형이지만, 좌우 날개 부분에는 사각형의 이오니아 건축양식의 주두를 갖고 있다. 본 건물은 조선정부가 개명한 근대국가의 이미지를 갗주기 위해 신축한 건물이다. 석조전
하딩에 의해 설계된 석조전은 1900년 착공하여 1910년에 완공된 비운의 건축물이다. 기단부 위의 열주와 상부의 페디먼트는 전형적인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다. 한편, 전면기둥은 원형이지만, 좌우 날개 부분에는 사각형의 이오니아 건축양식의 주두를 갖고 있다. 본 건물은 조선정부가 개명한 근대국가의 이미지를 갗주기 위해 신축한 건물이다.
덕수궁 석조전
석조전은 광복 후에 미·소 공동위원회 등의 용도로 사용되다 한국전쟁으로 화재를 당한 것을 복구하였다. 덕수궁 석조전
석조전은 광복 후에 미·소 공동위원회 등의 용도로 사용되다 한국전쟁으로 화재를 당한 것을 복구하였다.
덕수궁 석조전
1953년부터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었으며, 박물관이 경복궁으로 옮기자 현대미술관으로 활용되다가 현재는 문화재관리국이 관리하고 있다. 덕수궁 석조전
1953년부터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었으며, 박물관이 경복궁으로 옮기자 현대미술관으로 활용되다가 현재는 문화재관리국이 관리하고 있다.
손탁호텔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 이를 도와준 손탁 여사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손탁의 사저에 서양식 벽돌 건물을 지어주었다. 손탁은 이를 호텔식으로 개조했다. 따라서 본격적인 호텔업무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손탁호텔에는 주로 서울에 오는 국빈들이 머물렀다. 손탁호텔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 이를 도와준 손탁 여사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손탁의 사저에 서양식 벽돌 건물을 지어주었다. 손탁은 이를 호텔식으로 개조했다. 따라서 본격적인 호텔업무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손탁호텔에는 주로 서울에 오는 국빈들이 머물렀다.
황궁우
중국사신이 성내에서 묶었던 남별궁에 원구단을 건축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1914년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원구단이 철거되고 총독부 철도국이 직영하는 조선철도호텔이 건축되었다. 현재는 조선호텔이 조선철도호텔자리에 입지해 있다. 황궁우
중국사신이 성내에서 묶었던 남별궁에 원구단을 건축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1914년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원구단이 철거되고 총독부 철도국이 직영하는 조선철도호텔이 건축되었다. 현재는 조선호텔이 조선철도호텔자리에 입지해 있다.
황궁우
원구단은 화강암석으로 된 3층의 단이며 중앙 상부에 황색으로 도색한 원추형의 지붕을 앉혔다는 것이요, 황궁우는 팔각 3층의 집이었다. 황궁우
원구단은 화강암석으로 된 3층의 단이며 중앙 상부에 황색으로 도색한 원추형의 지붕을 앉혔다는 것이요, 황궁우는 팔각 3층의 집이었다.
황궁우
원구단은 화강암석으로 된 3층의 단이며 중앙 상부에 황색으로 도색한 원추형의 지붕을 앉혔다는 것이요, 황궁우는 팔각 3층의 집이었다. 황궁우
원구단은 화강암석으로 된 3층의 단이며 중앙 상부에 황색으로 도색한 원추형의 지붕을 앉혔다는 것이요, 황궁우는 팔각 3층의 집이었다.
황궁우
원구단은 화강암석으로 된 3층의 단이며 중앙 상부에 황색으로 도색한 원추형의 지붕을 앉혔다는 것이요, 황궁우는 팔각 3층의 집이었다. 황궁우
원구단은 화강암석으로 된 3층의 단이며 중앙 상부에 황색으로 도색한 원추형의 지붕을 앉혔다는 것이요, 황궁우는 팔각 3층의 집이었다.
황궁우
원구단은 화강암석으로 된 3층의 단이며 중앙 상부에 황색으로 도색한 원추형의 지붕을 앉혔다는 것이요, 황궁우는 팔각 3층의 집이었다. 황궁우
원구단은 화강암석으로 된 3층의 단이며 중앙 상부에 황색으로 도색한 원추형의 지붕을 앉혔다는 것이요, 황궁우는 팔각 3층의 집이었다.
황궁우
원구단은 화강암석으로 된 3층의 단이며 중앙 상부에 황색으로 도색한 원추형의 지붕을 앉혔다는 것이요, 황궁우는 팔각 3층의 집이었다. 황궁우
원구단은 화강암석으로 된 3층의 단이며 중앙 상부에 황색으로 도색한 원추형의 지붕을 앉혔다는 것이요, 황궁우는 팔각 3층의 집이었다.
이화학당-프라이홀
이화학당은 1886년에 미국 북감리교 여선교부에서 설립한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 여자교육기관이다. 스크랜튼 부인이 시작한 이화학당은 이듬해 7명의 학생수로 출발하였으며, 명성황후로 부터 이화학당이란 명칭을 하사받았다. 이화학당-프라이홀
이화학당은 1886년에 미국 북감리교 여선교부에서 설립한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 여자교육기관이다. 스크랜튼 부인이 시작한 이화학당은 이듬해 7명의 학생수로 출발하였으며, 명성황후로 부터 이화학당이란 명칭을 하사받았다.
반도호텔 반도호텔
반도호텔 반도호텔
반도호텔 내부 반도호텔 내부
반도호텔 내부 반도호텔 내부
반도호텔 내부 반도호텔 내부
경성주식현물취인소 경성주식현물취인소
동양척식회사
1908년 일제가 조선 경제를 수탈하기 위해 설치한 일본 국책회사이다. 일본인의 조선으로의 농업 이민정책으로 조선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30만명이 만주로 떠나갔다.서울 중구 을지로 2가 외환은행 자리에 있었던 동양척식회사의 1920년대 사진 엽서이다. 동양척식회사
1908년 일제가 조선 경제를 수탈하기 위해 설치한 일본 국책회사이다. 일본인의 조선으로의 농업 이민정책으로 조선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30만명이 만주로 떠나갔다.서울 중구 을지로 2가 외환은행 자리에 있었던 동양척식회사의 1920년대 사진 엽서이다.
동양척식회사
1908년 일제가 조선 경제를 수탈하기 위해 설치한 일본 국책회사이다. 일본인의 조선으로의 농업 이민정책으로 조선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30만명이 만주로 떠나갔다.서울 중구 을지로 2가 외환은행 자리에 있었던 동양척식회사의 1920년대 사진 엽서이다. 동양척식회사
1908년 일제가 조선 경제를 수탈하기 위해 설치한 일본 국책회사이다. 일본인의 조선으로의 농업 이민정책으로 조선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30만명이 만주로 떠나갔다.서울 중구 을지로 2가 외환은행 자리에 있었던 동양척식회사의 1920년대 사진 엽서이다.
황금정 거리 (十八은행 및 동양척식회사)
1908년 일제가 조선 경제를 수탈하기 위해 설치한 일본 국책회사이다. 일본인의 조선으로의 농업 이민정책으로 조선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30만명이 만주로 떠나갔다.서울 중구 을지로 2가 외환은행 자리에 있었던 동양척식회사의 사진 엽서이다. 황금정 거리 (十八은행 및 동양척식회사)
1908년 일제가 조선 경제를 수탈하기 위해 설치한 일본 국책회사이다. 일본인의 조선으로의 농업 이민정책으로 조선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30만명이 만주로 떠나갔다.서울 중구 을지로 2가 외환은행 자리에 있었던 동양척식회사의 사진 엽서이다.
황금정 거리 (十八은행 및 동양척식회사)
남대문로에서 바라본 황금정의 풍경. 황금정 거리 (十八은행 및 동양척식회사)
남대문로에서 바라본 황금정의 풍경.
명치관(시공관)
건축가 다마타(玉田橘治)에 의해 설계되었는데, 규모는 당시 황금좌와 비슷한 수용관객 1178명에 지하1층 지상 4층으로 지어졌다. 명치좌는 기존의 극장과 달리 역사주의 양식건축으로 디자인되었다. 명동 안 네거리에 위치하면서, 곡면으로 처리한 모서리는 명치정의 랜드마크가 되기에 충분했다. 특히, 타원형 장식과 저층의 매표소 그리고 타원형의 현관 홀 등은 바로크건축의 화려한 면모가 드러나는 듯하다. 남촌의 영화관을 대표하는 황금좌의 경우 지붕에 일본식 기와지붕을 씌운 제관양식으로 지어지기도 했다. 명치관(시공관)
건축가 다마타(玉田橘治)에 의해 설계되었는데, 규모는 당시 황금좌와 비슷한 수용관객 1178명에 지하1층 지상 4층으로 지어졌다. 명치좌는 기존의 극장과 달리 역사주의 양식건축으로 디자인되었다. 명동 안 네거리에 위치하면서, 곡면으로 처리한 모서리는 명치정의 랜드마크가 되기에 충분했다. 특히, 타원형 장식과 저층의 매표소 그리고 타원형의 현관 홀 등은 바로크건축의 화려한 면모가 드러나는 듯하다. 남촌의 영화관을 대표하는 황금좌의 경우 지붕에 일본식 기와지붕을 씌운 제관양식으로 지어지기도 했다.
명동성당
명동성당은 동시기에 건축된 약현성당에 비해 규모도 크고 보다 고딕성당에 가깝지만, 서구의 고딕성당이 갖는 첨두아치나 리브볼트, 플라잉버트레스가 성당외관이 본격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이는 성당의 규모와 벽돌을 주 재료로 사용한데 기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명동성당
명동성당은 동시기에 건축된 약현성당에 비해 규모도 크고 보다 고딕성당에 가깝지만, 서구의 고딕성당이 갖는 첨두아치나 리브볼트, 플라잉버트레스가 성당외관이 본격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이는 성당의 규모와 벽돌을 주 재료로 사용한데 기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명동성당
1883년 무렵 김 가밀로의 명의로 종현일대의 대지를 구입하면서 명동성당의 건립이 시작되었다. 건립 당시는 교구장이었던 불랑(Blanc)주교에 의해 신학생교육을 위한 종현서당이 운영되고 있었으며, 성당건립은 1892년 후임주교인 뮈텔(Mutel)주교에 의해 1892년 8월 5일 기공식을 갖고 본격화되었다. 성당의 설계는 유진 코스트신부(Eugene Coste)신부가 맡았으며, 1896년 2월 코스트신부의 선종에 따라 프와넬(Poisnel)신부에 의래 마무리되었다. 명동성당
1883년 무렵 김 가밀로의 명의로 종현일대의 대지를 구입하면서 명동성당의 건립이 시작되었다. 건립 당시는 교구장이었던 불랑(Blanc)주교에 의해 신학생교육을 위한 종현서당이 운영되고 있었으며, 성당건립은 1892년 후임주교인 뮈텔(Mutel)주교에 의해 1892년 8월 5일 기공식을 갖고 본격화되었다. 성당의 설계는 유진 코스트신부(Eugene Coste)신부가 맡았으며, 1896년 2월 코스트신부의 선종에 따라 프와넬(Poisnel)신부에 의래 마무리되었다.
명동성당
1883년 무렵 김 가밀로의 명의로 종현일대의 대지를 구입하면서 명동성당의 건립이 시작되었다. 건립 당시는 교구장이었던 불랑(Blanc)주교에 의해 신학생교육을 위한 종현서당이 운영되고 있었으며, 성당건립은 1892년 후임주교인 뮈텔(Mutel)주교에 의해 1892년 8월 5일 기공식을 갖고 본격화되었다. 성당의 설계는 유진 코스트신부(Eugene Coste)신부가 맡았으며, 1896년 2월 코스트신부의 선종에 따라 프와넬(Poisnel)신부에 의래 마무리되었다. 명동성당
1883년 무렵 김 가밀로의 명의로 종현일대의 대지를 구입하면서 명동성당의 건립이 시작되었다. 건립 당시는 교구장이었던 불랑(Blanc)주교에 의해 신학생교육을 위한 종현서당이 운영되고 있었으며, 성당건립은 1892년 후임주교인 뮈텔(Mutel)주교에 의해 1892년 8월 5일 기공식을 갖고 본격화되었다. 성당의 설계는 유진 코스트신부(Eugene Coste)신부가 맡았으며, 1896년 2월 코스트신부의 선종에 따라 프와넬(Poisnel)신부에 의래 마무리되었다.
명동성당
1883년 무렵 김 가밀로의 명의로 종현일대의 대지를 구입하면서 명동성당의 건립이 시작되었다. 건립 당시는 교구장이었던 불랑(Blanc)주교에 의해 신학생교육을 위한 종현서당이 운영되고 있었으며, 성당건립은 1892년 후임주교인 뮈텔(Mutel)주교에 의해 1892년 8월 5일 기공식을 갖고 본격화되었다. 성당의 설계는 유진 코스트신부(Eugene Coste)신부가 맡았으며, 1896년 3월 코스트신부의 선종에 따라 프와넬(Poisnel)신부에래 마무리되었다.을 명동성당
1883년 무렵 김 가밀로의 명의로 종현일대의 대지를 구입하면서 명동성당의 건립이 시작되었다. 건립 당시는 교구장이었던 불랑(Blanc)주교에 의해 신학생교육을 위한 종현서당이 운영되고 있었으며, 성당건립은 1892년 후임주교인 뮈텔(Mutel)주교에 의해 1892년 8월 5일 기공식을 갖고 본격화되었다. 성당의 설계는 유진 코스트신부(Eugene Coste)신부가 맡았으며, 1896년 3월 코스트신부의 선종에 따라 프와넬(Poisnel)신부에래 마무리되었다.을
명동성당
1883년 무렵 김 가밀로의 명의로 종현일대의 대지를 구입하면서 명동성당의 건립이 시작되었다. 건립 당시는 교구장이었던 불랑(Blanc)주교에 의해 신학생교육을 위한 종현서당이 운영되고 있었으며, 성당건립은 1892년 후임주교인 뮈텔(Mutel)주교에 의해 1892년 8월 5일 기공식을 갖고 본격화되었다. 성당의 설계는 유진 코스트신부(Eugene Coste)신부가 맡았으며, 1896년 4월 코스트신부의 선종에 따라 프와넬(Poisnel)신부에마무리되었다.을 을 명동성당
1883년 무렵 김 가밀로의 명의로 종현일대의 대지를 구입하면서 명동성당의 건립이 시작되었다. 건립 당시는 교구장이었던 불랑(Blanc)주교에 의해 신학생교육을 위한 종현서당이 운영되고 있었으며, 성당건립은 1892년 후임주교인 뮈텔(Mutel)주교에 의해 1892년 8월 5일 기공식을 갖고 본격화되었다. 성당의 설계는 유진 코스트신부(Eugene Coste)신부가 맡았으며, 1896년 4월 코스트신부의 선종에 따라 프와넬(Poisnel)신부에마무리되었다.을 을
조선통감부 및 갑오기념비 조선통감부 및 갑오기념비
조선통감부 조선통감부
조선통감부
을사조약 이후 1906년 발족된 조선통감부는 한일합방 후 조선총독부가 출범하기 전까지 조선의 국가실권을 장악하였다. 초대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통감부 청사를 남산 중턱에 건립하여 1907년 2월 28일 구외부(舊外部)로부터 이전하고 집무하였다. 조선통감부
을사조약 이후 1906년 발족된 조선통감부는 한일합방 후 조선총독부가 출범하기 전까지 조선의 국가실권을 장악하였다. 초대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통감부 청사를 남산 중턱에 건립하여 1907년 2월 28일 구외부(舊外部)로부터 이전하고 집무하였다.
남산 총독부관저 남산 총독부관저
남산 총독부관저 남산 총독부관저
남산 총독부관저 남산 총독부관저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1925년 완공된 조선신궁 전경
1910년 8월29일 한국을 강점한 일제는 지배기관으로 조선통감부를 확대 개편하여 조선총독부를 세우고 정신적인 지배를 위해 신사정책(神社政策)을 수립했다. 각 지역에 관립신사를 세우고 기존의 일본 거류민들이 건립한 민간신사도 관공립화하여 지원하였다. 일제가 서둘러 신사정책을 펴고 신사를 전국 각지에 세운 것은 그들의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한국인들에게 주입시키기 위해서였다. 조선총독부는 합병 2년 후인 1912년부터 ‘조선신사(神社)’ 건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신사의 장소는 시정30년사에 따르면, “반도의 중앙에 위치하여 명치성대(明治聖代)로 부터 가장 관계가 깊은 경성부대(서울)의 정지(淨地)를 선정하여 신역(神域)으로 결성하였다”고 한다. 총독부가 처음부터 눈독을 들였정던 남산의 신궁터 주변은 총면적 12만7천9백여평에 이른다. 총독부는 1920년 5월27일 남산기슭에서 지진제(地鎭祭)라는 이름의 기공식을 갖고 공사에 착수하여 5년간의 공정 끝에 1925년 10월 완공하였다. 여기에 들어간 예산은 총공사비 156만4천852엔이었다. 건축은 일본의 신사 건축양식에 따라 정전(正殿)ㆍ배전(拜殿)ㆍ신고(神庫)ㆍ참배소(參拜所)등 15개의 건물을 배치하고 여기에 오르는 384개 돌 계단과 참도(參道)를 조성하였다. 공사가 마무리 되어 가던 1925년 6월27일 일본 내각고시에 의해 사격(社格)을 높여 신사의 명칭을 종래 조선신사에서 조선신궁으로 바꾸고, 신사에 둘 3종신기(三種神器)라는 상징물들을 일본에서 가져와 그해 10월 15일 진좌제(鎭座祭)를 갖고 한국인들에게 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참고: 종교신문/ 2004년 7월 29일) 1925년 완공된 조선신궁 전경
1910년 8월29일 한국을 강점한 일제는 지배기관으로 조선통감부를 확대 개편하여 조선총독부를 세우고 정신적인 지배를 위해 신사정책(神社政策)을 수립했다. 각 지역에 관립신사를 세우고 기존의 일본 거류민들이 건립한 민간신사도 관공립화하여 지원하였다. 일제가 서둘러 신사정책을 펴고 신사를 전국 각지에 세운 것은 그들의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한국인들에게 주입시키기 위해서였다. 조선총독부는 합병 2년 후인 1912년부터 ‘조선신사(神社)’ 건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신사의 장소는 시정30년사에 따르면, “반도의 중앙에 위치하여 명치성대(明治聖代)로 부터 가장 관계가 깊은 경성부대(서울)의 정지(淨地)를 선정하여 신역(神域)으로 결성하였다”고 한다. 총독부가 처음부터 눈독을 들였정던 남산의 신궁터 주변은 총면적 12만7천9백여평에 이른다. 총독부는 1920년 5월27일 남산기슭에서 지진제(地鎭祭)라는 이름의 기공식을 갖고 공사에 착수하여 5년간의 공정 끝에 1925년 10월 완공하였다. 여기에 들어간 예산은 총공사비 156만4천852엔이었다. 건축은 일본의 신사 건축양식에 따라 정전(正殿)ㆍ배전(拜殿)ㆍ신고(神庫)ㆍ참배소(參拜所)등 15개의 건물을 배치하고 여기에 오르는 384개 돌 계단과 참도(參道)를 조성하였다. 공사가 마무리 되어 가던 1925년 6월27일 일본 내각고시에 의해 사격(社格)을 높여 신사의 명칭을 종래 조선신사에서 조선신궁으로 바꾸고, 신사에 둘 3종신기(三種神器)라는 상징물들을 일본에서 가져와 그해 10월 15일 진좌제(鎭座祭)를 갖고 한국인들에게 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참고: 종교신문/ 2004년 7월 29일)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경성신사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한 신사를 남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독립관
독립문 · 독립관 · 독립공원 사업계획이 「독립신문」을 통해 발표되자 학생에서부터 왕태자(王太子)의 1천원의 대금을 합쳐 3,825원(元)이 독립문 기금이 조성되어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정초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정초식에는 회원 · 일반시민 · 정부 각부대신(政府各部大臣) · 외국공영사(外國公領使)와 외빈 · 각학교 학도등 5∼6천명이 참석하여 「돈의문 밖(敦義門)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는 왕실의 의지가 독립협회를 통해 구현되었음을 보여준다. 독립관
독립문 · 독립관 · 독립공원 사업계획이 「독립신문」을 통해 발표되자 학생에서부터 왕태자(王太子)의 1천원의 대금을 합쳐 3,825원(元)이 독립문 기금이 조성되어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정초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정초식에는 회원 · 일반시민 · 정부 각부대신(政府各部大臣) · 외국공영사(外國公領使)와 외빈 · 각학교 학도등 5∼6천명이 참석하여 「돈의문 밖(敦義門)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는 왕실의 의지가 독립협회를 통해 구현되었음을 보여준다.
독립문
독립문 · 독립관 · 독립공원 사업계획이 「독립신문」을 통해 발표되자 학생에서부터 왕태자(王太子)의 1천원의 대금을 합쳐 3,825원(元)이 독립문 기금이 조성되어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정초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정초식에는 회원 · 일반시민 · 정부 각부대신(政府各部大臣) · 외국공영사(外國公領使)와 외빈 · 각학교 학도등 5∼6천명이 참석하여 「돈의문 밖(敦義門)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는 왕실의 의지가 독립협회를 통해 구현되었음을 보여준다. 독립문은 1897년 11월 20일에 준공되었다. 독립문
독립문 · 독립관 · 독립공원 사업계획이 「독립신문」을 통해 발표되자 학생에서부터 왕태자(王太子)의 1천원의 대금을 합쳐 3,825원(元)이 독립문 기금이 조성되어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정초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정초식에는 회원 · 일반시민 · 정부 각부대신(政府各部大臣) · 외국공영사(外國公領使)와 외빈 · 각학교 학도등 5∼6천명이 참석하여 「돈의문 밖(敦義門)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는 왕실의 의지가 독립협회를 통해 구현되었음을 보여준다. 독립문은 1897년 11월 20일에 준공되었다.
독립문
독립문 · 독립관 · 독립공원 사업계획이 「독립신문」을 통해 발표되자 학생에서부터 왕태자(王太子)의 1천원의 대금을 합쳐 3,825원(元)이 독립문 기금이 조성되어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정초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정초식에는 회원 · 일반시민 · 정부 각부대신(政府各部大臣) · 외국공영사(外國公領使)와 외빈 · 각학교 학도등 5∼6천명이 참석하여 「돈의문 밖(敦義門)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는 왕실의 의지가 독립협회를 통해 구현되었음을 보여준다. 독립문은 1897년 11월 20일에 준공되었다. 독립문
독립문 · 독립관 · 독립공원 사업계획이 「독립신문」을 통해 발표되자 학생에서부터 왕태자(王太子)의 1천원의 대금을 합쳐 3,825원(元)이 독립문 기금이 조성되어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정초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정초식에는 회원 · 일반시민 · 정부 각부대신(政府各部大臣) · 외국공영사(外國公領使)와 외빈 · 각학교 학도등 5∼6천명이 참석하여 「돈의문 밖(敦義門)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는 왕실의 의지가 독립협회를 통해 구현되었음을 보여준다. 독립문은 1897년 11월 20일에 준공되었다.
독립문
독립문 · 독립관 · 독립공원 사업계획이 「독립신문」을 통해 발표되자 학생에서부터 왕태자(王太子)의 1천원의 대금을 합쳐 3,825원(元)이 독립문 기금이 조성되어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정초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정초식에는 회원 · 일반시민 · 정부 각부대신(政府各部大臣) · 외국공영사(外國公領使)와 외빈 · 각학교 학도등 5∼6천명이 참석하여 「돈의문 밖(敦義門)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는 왕실의 의지가 독립협회를 통해 구현되었음을 보여준다. 독립문은 1897년 11월 20일에 준공되었다. 독립문
독립문 · 독립관 · 독립공원 사업계획이 「독립신문」을 통해 발표되자 학생에서부터 왕태자(王太子)의 1천원의 대금을 합쳐 3,825원(元)이 독립문 기금이 조성되어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정초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정초식에는 회원 · 일반시민 · 정부 각부대신(政府各部大臣) · 외국공영사(外國公領使)와 외빈 · 각학교 학도등 5∼6천명이 참석하여 「돈의문 밖(敦義門)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는 왕실의 의지가 독립협회를 통해 구현되었음을 보여준다. 독립문은 1897년 11월 20일에 준공되었다.
독립문
독립문 · 독립관 · 독립공원 사업계획이 「독립신문」을 통해 발표되자 학생에서부터 왕태자(王太子)의 1천원의 대금을 합쳐 3,825원(元)이 독립문 기금이 조성되어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정초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정초식에는 회원 · 일반시민 · 정부 각부대신(政府各部大臣) · 외국공영사(外國公領使)와 외빈 · 각학교 학도등 5∼6천명이 참석하여 「돈의문 밖(敦義門)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는 왕실의 의지가 독립협회를 통해 구현되었음을 보여준다. 독립문은 1897년 11월 20일에 준공되었다. 독립문
독립문 · 독립관 · 독립공원 사업계획이 「독립신문」을 통해 발표되자 학생에서부터 왕태자(王太子)의 1천원의 대금을 합쳐 3,825원(元)이 독립문 기금이 조성되어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정초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정초식에는 회원 · 일반시민 · 정부 각부대신(政府各部大臣) · 외국공영사(外國公領使)와 외빈 · 각학교 학도등 5∼6천명이 참석하여 「돈의문 밖(敦義門)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는 왕실의 의지가 독립협회를 통해 구현되었음을 보여준다. 독립문은 1897년 11월 20일에 준공되었다.
창덕궁
창덕궁(昌德宮)은 임진왜란 후 중건되어 역대왕이 주로 거처하던 곳이었고, 순조 33년(1833)에 대조전(大造殿) · 희정당(熙政堂) 등의 화재로 하여 이듬해에 중건공역(重建工役)이 있은 후 큰 변동 없이 고종조에까지 이르렀다. 철종 14년(1863) 11월 철종이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함에 따라 고종은 신정황후(조대비)의 명을 받아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서 즉위하였다. 창덕궁
창덕궁(昌德宮)은 임진왜란 후 중건되어 역대왕이 주로 거처하던 곳이었고, 순조 33년(1833)에 대조전(大造殿) · 희정당(熙政堂) 등의 화재로 하여 이듬해에 중건공역(重建工役)이 있은 후 큰 변동 없이 고종조에까지 이르렀다. 철종 14년(1863) 11월 철종이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함에 따라 고종은 신정황후(조대비)의 명을 받아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서 즉위하였다.
창덕궁
창덕궁(昌德宮)은 임진왜란 후 중건되어 역대왕이 주로 거처하던 곳이었고, 순조 33년(1833)에 대조전(大造殿) · 희정당(熙政堂) 등의 화재로 하여 이듬해에 중건공역(重建工役)이 있은 후 큰 변동 없이 고종조에까지 이르렀다. 철종 14년(1863) 11월 철종이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함에 따라 고종은 신정황후(조대비)의 명을 받아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서 즉위하였다. 창덕궁
창덕궁(昌德宮)은 임진왜란 후 중건되어 역대왕이 주로 거처하던 곳이었고, 순조 33년(1833)에 대조전(大造殿) · 희정당(熙政堂) 등의 화재로 하여 이듬해에 중건공역(重建工役)이 있은 후 큰 변동 없이 고종조에까지 이르렀다. 철종 14년(1863) 11월 철종이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함에 따라 고종은 신정황후(조대비)의 명을 받아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서 즉위하였다.
창경궁 창경궁
구 조선총독부 구 조선총독부
구 조선총독부 구 조선총독부
구 조선총독부 구 조선총독부
구 조선총독부 구 조선총독부
구 조선총독부 구 조선총독부
남산 일본인 거주지(왜성대 구총독부 부근) 남산 일본인 거주지(왜성대 구총독부 부근)
용산역 용산역
용산역 용산역
용산한강철교 용산한강철교
용산한강철교 용산한강철교
용산한강철교 용산한강철교
용산한강철교 용산한강철교
용산한강철교 용산한강철교
용산한강철교 용산한강철교
조선총독부철도국 조선총독부철도국
조선총독부철도국 조선총독부철도국
명월관
당시 기생관으로 유명했던 집은 구한말에 궁내부(宮內府) 주임관(奏任官) 및 전선사장(典膳司長)으로 있으면서 어선(御膳)과 향연을 맡아 궁중요리를 하던 안순환(安淳煥)이 1909년에 지은 명월관이다. 황토현, 지금의 세종로 동아일보사 자리에 있었는데 회색빛 2층 양옥이었다. 2층에는 귀빈석, 하층에는 일반객을 받았으며, 매실이란 특실이 별도로 마련되어 귀빈 중의 귀빈에게 제공되었다. 하층은 온돌이었고 2층은 양탄자와 돗자리를 깔았다. 명월관을 개업한 안순환(安淳煥)은 궁중요리를 일반에게 공개했으며 술은 궁중내인이 빚었기 때문에 성황이 일기 시작했다. 때를 같이하여 그 해에 관기제도가 폐지되자 어전에서 가무를 행하던 궁중기녀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으나, 초기에는 대한제국의 고관과 친일파 거물들이 나타났으며, 후기에는 문인 언론인등이 드나들었고 외국에서 잠입한 애국지사의 밀담장소가 되기도 했다. 명월관
당시 기생관으로 유명했던 집은 구한말에 궁내부(宮內府) 주임관(奏任官) 및 전선사장(典膳司長)으로 있으면서 어선(御膳)과 향연을 맡아 궁중요리를 하던 안순환(安淳煥)이 1909년에 지은 명월관이다. 황토현, 지금의 세종로 동아일보사 자리에 있었는데 회색빛 2층 양옥이었다. 2층에는 귀빈석, 하층에는 일반객을 받았으며, 매실이란 특실이 별도로 마련되어 귀빈 중의 귀빈에게 제공되었다. 하층은 온돌이었고 2층은 양탄자와 돗자리를 깔았다. 명월관을 개업한 안순환(安淳煥)은 궁중요리를 일반에게 공개했으며 술은 궁중내인이 빚었기 때문에 성황이 일기 시작했다. 때를 같이하여 그 해에 관기제도가 폐지되자 어전에서 가무를 행하던 궁중기녀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으나, 초기에는 대한제국의 고관과 친일파 거물들이 나타났으며, 후기에는 문인 언론인등이 드나들었고 외국에서 잠입한 애국지사의 밀담장소가 되기도 했다.
경성역(서울역)
총본정(총본정)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1922년 6월에 착공하여 1925년 9월에 준공되었다. 벽돌과 석재를 혼합한 지하 1층 지상 2층의 건물로서 중벽은 석재(石材)벽에 인조석을 붙이고 일부는 칠을 하였다. 지붕은 철골조에 천연 스레이트, 일부는 동판이음으로 하였다. 면적은 지하 781평, 1층 750평, 2층 439평, 합계 2,070평이다. 경성역(서울역)
총본정(총본정)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1922년 6월에 착공하여 1925년 9월에 준공되었다. 벽돌과 석재를 혼합한 지하 1층 지상 2층의 건물로서 중벽은 석재(石材)벽에 인조석을 붙이고 일부는 칠을 하였다. 지붕은 철골조에 천연 스레이트, 일부는 동판이음으로 하였다. 면적은 지하 781평, 1층 750평, 2층 439평, 합계 2,070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