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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집 터

이름

손병희 집 터

카테고리

독립운동가

연번

229

설치연도

1993

위치

북촌로 41[가회동 170-3]

GPS좌표

37°34′48.6″N 126°59′5.6″E

표석문구

손병희(1861~1922)선생은 구한말의 천도교(天道敎)지도자이자 3·1운동을 이끈 독립운동가이다. 1897년에 동학의 제3대 교주가 되었으며,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분으로 3·1운동을 주도하였다.

표석설명

1919년 2월 28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들이 모여 의견을 나눈 곳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23인은 3·1운동 거사 전날인 1919년 2월 28일 서로 지면을 익히고 다음날 독입선언식 절차를 최종 점검하기 위해 가회동 손병희(1861-1922)의 집에 모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 장소인 탑골공원에 학생들이 집합하기로 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만일의 사태를 우려해 급히 선언식 장소를 인사동 명월관 지점 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 그로 인해 거사 당일 일정에 다소의 혼선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얽힌 이야기

종교계도 하나로 단합하여 3·1운동을 준비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식민지 국가의 독립문제 등이 제기되자, 천도교 간부인 손병희·권동진·오세창·최린 등은 국제정세를 예의주시하였다. 천도교중앙총부의 도사 권동진은 1918년 말경 『대판매일신문』에서 미국 윌슨이 제기한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조항을 보고 한국도 민족자결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오세창·최린·손병희를 만나 한국의 자결自決을 획득하기 위한 운동을 하자고 협의하여 의견을 한 데 모을 수 있었다.

천도교단은 3·1운동의 준비 과정에서 먼저 교단 내부의 단속을 도모하였다. 손병희는 1919년 1월 초 “장차 우리 면전에 전개될 시국은 참으로 중대하다. 우리들이 이 천재일우의 호기를 무위무능하게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내 이미 정한 바 있으니 제군은 십분 분발하여 대사를 그릇됨이 없이 하라”고 당부하였다. 또 이들은 교인들로 하여금 1919년 1월 5일부터 49일간 특별기도회를 행하게 함으로써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독립운동에 대비하게끔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천도교계는 1919년 1월 하순부터 여러 세력과의 제휴를 추진하였다. 그 임무를 맡은 사람은 최린이었다. 최린은 중앙고등보통학교장 송진우와 교사 현상윤·최남선등과 의견을 나누고, 2·8독립운동의 추진을 위해 동경에서 파견된 송계백과도 협의하였다.

최린은 불교계의 참여도 이끌어내었다. 그는 한용운을 방문하여 천도교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의 전개에 관하여 합의를 보았다. 기독교계와 연합적 독립운동의 전개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던 2월 20일경 한용운을 만나 독립선언서의 발표, 독립청원서·독립건의서의 송부 등에 관한 구체적인 독립운동의 계획을 설명하여 그로부터 찬성을 얻고 불교계의 동참을 이루어 내었다.

참고문헌

1. 장규식, 서울 독립운동 사적지, 독립기념관, 2008

2. 한국역사정보종합시스템 http://www.koreanhistory.or.kr/“손병희”(도서) / 1. 중앙총부의 3·1운동 / 1. 3·1운동의 준비(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38권 제4부 천도교의 민족운동 제2장 천도교의 3·1운동)

참고이미지
천도교 지도자, 독립운동가, 교육운동가인 손병희의 사진 천도교 지도자, 독립운동가, 교육운동가인 손병희의 사진
손병희가 살던 집터.(유허지) 충북 청원군 손병희가 살던 집터.(유허지) 충북 청원군
손병희 동상 손병희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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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길

안국역 2번 출구에서 헌법재판소 방향으로 직진하다보면 재동초등학교 사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조금 더 직진하면 가회동 주민 센터 옆 화단에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