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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유적지 유심사

이름

독립운동 유적지 유심사

카테고리

독립운동 유적지

연번

41

설치연도

1993

위치

계동길92-3 [계동 43]

GPS좌표

37°34′55.8″N 126°59′12.6″E

표석문구

이 언저리에 있었던 유심출판사는 한용운 선생이 3·1독립 정신을 중앙 학교생들에게 심어 주었던 곳.

표석설명

3·1운동 당시 불교계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



1919년 2월 24일 천도교측과 기독교측 사이의 독립운동 일원화가 성사되자, 최린은 계동 유심사로 한용운을 찾아와 거사 계획을 설명하고 불교계의 참여를 확약받았다. 이후 한용운은 합천 해인사 출신 승려로 서울 대각사에 머무르던 백상규(법명 용성)를 불교계 민족대표로 참여시키는 한편, 2월 28일 밤 중앙학림 학생 신상완·백성욱·김대용·오택언·김법린·박민오 등을 유심사로 불러 각처에 배포할 독립선언서 3천 매를 전달하였다.

얽힌 이야기

불교계의 독립운동 준비 과정



3·1운동의 준비과정에서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합이 형성되자 이들은 불교와의 연합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2월 24일 밤 최린이 한용운의 집으로 찾아가 즉석에서 동의를 받아냈다. 한용운은 시일이 촉박한 가운데 동래의 범어사로 내려가서 주지 오성월(吳惺月과) 이담해(李淡海)·오이산(吳梨山) 등과 3·1운동에 대하여 협의하는 등 영남과 호남의 여러 사찰에 긴급히 연락하여 동지를 모으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결국 불교계에서는 한용운 자신과 백용성 두 사람만이 민족대표로 참여하는데 그쳤다.

하지만 불교학교인 중앙학림中央學林 학생들은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이는 2월 28일 밤 한용운이 그의 거처이자 그가 발행하던 『유심』사 사옥으로 학생들을 급히 불러모아 독립선언서의 작성경위와 3·1운동의 의미를 설명한 뒤 선언서의 배포를 부탁한데 따른 것이었다. 이날 모인 신상완·백성욱·김상헌·정경헌·김대용·오택언·김봉배·김법린 등은 중앙학림 안에서 한용운의 지도하에 ‘유심회’라는 모임을 운영하는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바로 인사동에 있던 범어사 포교당으로 자리를 옮겨 논의 끝에 신상완을 책임자로, 백성욱·박문오를 참모로 삼아 이들 세 사람은 서울에 남고, 나머지는 모두 지방에 내려가서 활동하기로 하는 등 행동방침을 결정하였다.

참고문헌

1. 장규식, 서울 독립운동 사적지, 독립기념관, 2008

2. 한국역사정보종합시스템 http://www.koreanhistory.or.kr/“한용운”(도서) / 1. 불교계의 3·1운동 참여와 선언서 / 1. 불교계의 3·1운동 참여와 선언서 (1) 불교계 동향.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18권 제5장 불교계와 유림계의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참고이미지

일제시대 한용운(韓龍雲) 등이 발행한 잡지 『유심(惟心)』의 제1호부터 제3호까지의 합본으로, 불교적 색채가 짙은 글과 교육, 심신수양 등에 관한 것들을 적고 있다. 『유심』은 한국 최초의 불교잡지로 1918년 창간 되었다. 불교에 대한 계몽과 불교에 대한 근대적인 이해와 해설을 주로 하였으며, 문예면도 강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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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길

안국역 3번 출구 만해당 게스트하우스 왼쪽 벽면 부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