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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이야기한의학발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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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발달사

고조선에서 고려까지

우리 한민족은 고조선 이래로 아시아 동북에 위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역사 유물에서 나타나듯이 처음에 이 땅에 흘러든 사람들은 중국의 문화와는 사뭇 달랐다. 그래서 그들만의 문화를 가졌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러한 흔적들을 우리는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먼저 단군신화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내용 중의 쑥과 마늘에 關한 것은 그 당시 중국의 神農本草에서도 조차 찾아 볼 수 없는 우리만의 고유의 원시적 治療 행위였다. 중국과 다른 문화 양상을 가진 그들은 이 땅에 독자적인 문화와 藥物의 사용을 남겼다. 그리하여 이 땅에는 중국과는 다른 원시의학이 胎動하였다. 그 이후 문화의 교류가 중국과 많이 이루어지고 지금의 한반도로 국토가 축소되면서 이웃 국가인 대륙의 중국 영향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중국 또는 일본에서 전하는 책 속에는 삼국시대의 藥物 사용과 處方에 관한 것들이 보인다. 이때는 사회 구성원의 성격이 귀족적이고 중국에 유학하는 학자들이 많아 사회 문화 전반적으로 중국 문화를 답습하는데 불과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고 여러 의서들을 수입하여 교과서로 사용하였다.

그 후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신라의 제도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 무신정변과 몽고족의 侵入으로 귀족층이 몰락하고 과거시험을 통과한 신진사대부들이 중앙에 등장하면서 자주적 기운이 다시 싹트기 始作하여 『濟衆立效方』,『新集御醫撮要方』,『鄕藥救急方』등의 의서들이 만들어졌다. 또한 의료제도의 개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의업이 권장되고 그 사회적 지위가 상당하였다. 하지만 이 당시 중국에서 금원 사대가가 등장하여 중국의학사에 한 획을 긋고 있지만 그 당시 고려에서는 그러한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과거시험 과목도 송나라 이전의 서적을 과목으로 하고 간행된 의서도 금원 시대 이전의 서적이 주를 이루고 있다. 만약 고려가 중국 의학의 영향을 받아서 계속적인 발전을 하였다면 분명히 선진의학을 받아들여 중국에 예속되는 양상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문화 수용의 주체가 자주적이어서 우리 醫學이 주류를 이룰 수가 있었다. 또한 계속되는 전란의 영향으로 많은 문화재가 消失되어 지금 남아 있는 의서는 없고 내용의 일부가 조선 초기의 의서에 보인다. 그래서 고조선에서 고려 시대까지 남아 있는 서적은 없고 다른 나라 혹은 조선 초기의 의서를 살펴볼 때 醫學의 始作은 중국과 확연히 달랐으며 정치적 침체기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답보 상태에 머물렀으나 몽고 침략 이후에는 민족 위기 의식과 더불어 醫學도 함께 자주적으로 발전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즉 고려 말에는 唐, 宋의 영향을 받아 그 이론 기반위에서 고유의 韓醫學을 창조하려고 노력하였다.

조선에서 일제강점기
조선 전기

병은 건강의 상대개념으로 동서양 의학에 함께 사용된다.
즉 중풍이란 용어의 경우 한양방을 막론하고 사용하고 있으며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한의사와 양의사의 병에 대한 개념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즉 중풍의 경우도 양의사의 경우에는 뇌혈관 질환이라 하여 뇌혈관의 폐색이나 출혈로 구분하여 CT상 확인 가능한 경우 확진을 하게 되지만 한의사의 경우에는 풍(風)에 맞은 경우는 모두 중풍으로 보고 치료하게 된다. 이처럼 한 가지 병도 한양방에 따라 달리 설명될 수 있다. 또 한 예로 한의사가 간이 나쁘다 진단했을 때 임상병리과에서 간기능검사를 해보면 수치의 이상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정상인 경우도 있게 된다.




이것 또한 한의학에서 의미하는 간이 서양의학에서 말하는 Liver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간과 관련된 근육의 이상, 눈 이상, 혈 부족, 손톱 이상 등을 모두 간과 연관시켜 진단하므로 발생할 수 있는 차이이다. 결국 한의사는 병을 치료한다기 보다 증을 치료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볼 수 있으며 한 가지 병에도 여러 가지 증이 있을 수 있고 바꾸어 말하면 한 가지 증이라면 여러 가지 병도 치료할 수 있는 것이다.

중종에서 선조 전까지

中宗때에는 事大風潮가 짙어지고 중국과의 교통이 빈번해짐해 따라 명나라의 醫學이 들어오고 唐藥의 輸入도 쉅게 이루어졌다. 이와 같이하여 中宗 以後에서부터는 다시 중국에 依存하여 醫學이 존속되었다. 그러나 일방적인 수입은 없었고 중국의 예를 그대로 따르는 것도 또한 볼 수 없었다.

선조에서 영조 전까지

임진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한민족은 다시금 단결하여 무너진 문화를 다시 세우게 된다. 또한 전란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고통 당하게 되어 의서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이어 명나라가 멸망함에 따라 약재를 수입하기가 힘들게 되어 治療에 어려움이 생기자 먼저 『鄕藥集成方』을 다시 간행하여 보급시켰다. 조선 초 『鄕藥集成方』의 편찬 이후 금ㆍ원나라의 醫學을 융합하여 새로이 체계를 세운 명나라의 醫學이 들어오게 되지만 전대의 病論과 治療方이 時勢에 맞지 않게 되었다. 전란의 직후이고 여러 方書가 消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시대의 醫學에 통달한 許浚이 醫書를 아주 새로운 구상 아래 실용에 적절한 方을 취해 정확을 기한 東方 一大 醫書인 『東醫寶鑑』을 편찬하게 되었다. 그 내용은 목차에서 볼 수 있듯이 기존 중국의 醫書를 종합했다기 보다는 새로운 精神(思想)에 依해서 먼저 醫學의 바탕을 인간 내면에서 바라볼려고 시도하였고 그 뒤에 신체나 외적인 것과 그외의 것을 서술하였다. 『東醫寶鑑』이 出現함으로써 醫學이 통합되고 확립되었으며 그 후에는 이 이상의 의서가 나오지 않았다. 이후 醫人들은 한결같이 이 책을 존중하였고 醫論ㆍ醫方은 거의 모두가 이것을 말한 것이며 이것을 原典으로 삼아 여러 가지 醫書가 많이 편술되어 復興期를 맞이하게 되었다.

영조에서 한말까지

英祖元年(1725年)부터 哲宗末年(1863年)까지의 5代 139年間을 이르는 것이다. 이 時期에 우리의 文化는 모든 部門에 걸쳐 復興的 氣運을 보게 되었다. 醫學에 있어서도 實證的 學風의 刺戟과 影響으로 因하여 自主的 經驗과 內省的 觀察을 主로 한 專門方書, 그 中에도 특히 小兒科學에 關한 專門方書들을 많이 볼 수 있게 되었다. 또는 法醫學的 知見과 博物學的 分野에 있어서도 새로운 氣勢를 올리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後半期에 들어서는 西歐醫學的 知識과 間接으로나마 接觸할 機會를 갖게 되어 우리 醫學의 傳統的 知見에 動搖를 일으키기 始作하였다. 그러나 西學의 壓迫이라는 鎖國政策으로 말미암아 充分한 進展을 보지 못하고, 다만 部分的으로 겨우 그 實現을 본 것이 있을 뿐이다.

『東醫寶鑑』이후 영ㆍ정조대에 『東醫寶鑑』의 缺點을 보충한 그리고 요점을 간추린『濟衆新編』,『廣濟秘』이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책들에서는 수많은 중국 의서 및 우리 나라 의서들의 내용을 인용하여 이들을 換骨奪胎시켜 우리나라 고유한 주체성을 가지고 서술하였다. 그리고 서민을 위해 편집했기 때문에 그 당시의 민간 醫方을 알 수 있다. 특히 본초를 외우기 쉽도록 藥性歌를 첨가하고 노인의 병을 따로 다루어서 증보한 것을 볼 수 있다. 이후 丁若鏞이 실학의 영향과 서구 의학의 영향을 받아 과학 지식과 實事求是의 학문을 醫學이론에 도입을 試圖하기도 하였다. 정조 이후 국내의 정치 불안으로 생활이 어렵게 되어 침체기를 맞기도 하지만 고종때 黃度淵이 『醫宗損益』을 편찬하였고 『醫方活套』,『方藥合編』을 지어 일반인도 알기 쉬게 배울 수 있어 醫學을 널리 보급하였다. 또한 고종 31년에 李濟馬의 『東醫壽世保元』이 간행되어 모든 질병을 인간 중심으로 고찰하고 생각하도록 하였다. 즉 인간의 “心”을 중시하는 醫學으로 그 기본적인 내용은 素問에 있지만 그 실질적인 내용 전개에 있어서는 중국과는 완연히 다른 양상의 의론이 성립되었다. 또한 조선 후기에 이규준이 “扶陽論”을 주장하여 醫學의 一門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후 일제시대를 지나면서 시대적인 흐름속에서 비과학이라는 이름하에 천시되고 멸시를 당하였다

현대

1894년 甲午改革으로부터 시작된 일제의 박해와 식민치하를 거쳐 해방이 되기까지 50년간 암흑기 동안 침체 속에서 발전이 정체되어 버린 한의학계는 대를 이을 인재도 없는 공백 상태였다. 다행히도 醫學講習所 출신의 한의사들이 한의학의 법적 지위의 복구와 후학 육성에 힘쓰기 시작하였다. '50년 6.25동란으로 부산 임시수도에서 '51년 9월 25일 國民醫療法 제정이라는 새로운 계기를 맞으면서 역사적인 한의사 제도가 탄생되었다. 國民醫療法은 제2조에 한의사, 제3조와 제8조에 한의원, 제13조에 한의학을 전공하는 대학을 나온 자로서 국가고시에 합격하여야 자격을 획득하게 하고 의료업자로서의 권리와 의무 모두를 의사와 동등하게 보장하였다.




'63년 12월 13일에 醫療法을 재개정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한의사 제도가 비로서 현대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즉 한의학 수업연한이 洋醫學 敎育制度와 동등한 6년제로 승격 발전하게 되면서 한의사 교육제도의 정상화를 되찾은 한의계는 대한한의사협회를 중심으로 각종 학술활동을 활성화시킴은 물론 국내외 학술대회를 유치하고 학술진흥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80년대에 들어오면서 학계사업들이 성숙한 단계로 진전되어 “韓”의학 명칭을 바로잡고 세계보건기구(WHO)의 국내 한방 학술 사업의 지원, 한방의료보험 참여를 준비하는 조사, 연구사업들이 추진되었다. 또한 한의학회의 활동이 계속 강화되면서 분과학회가 19개로 확충되고 한의과대학도 11개대학으로 증설되었으며 한의학 碩·博士가 다수 배출되면서 한의학이 치료의학으로서 질적 향상의 토대를 구축하게 되었다.
'88년부터는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방의료보험이 착수되는 한편 정부는 한방의료정책을 심도있게 추진하기 위하여 國民醫療政策審議委員會를 구성하여 한의학의 장기 발전 사업으로 국립한방병원의 설치 전문연구기관의 설립, 한방보건지도의 법제화, 한방전문의 제도의 타당성을 심의, 채택하고 단계적으로 이를 정책에 반영한 바 있다. 그리고 정부와 국회는 한·양방 균형 발전을 위한 중장기 육성 발전 계획을 수립, 공표하는 한편 정부기금 출연의 「韓國韓醫學硏究所」를 특수법인체로 설립하고 한방 행정기구의 설치, 한약 관리 제도를 법정화하는 등 한방의료의 대국민 기여도의 제고를 위한 한의약 종합 발전 계획과 각종 관련 제도의 개선 및 육성책의 추진을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