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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의 일화

벼슬자리에서 토정의 일화

한때 토정 선생은 아산 포천현감의 자리에 앉은 일이 있다. 토정 선생은 현감으로 부임한 후 바로 걸인청(乞人廳)이란 것을 만들어 관아에 걸인들을 모아 관아의 곡식으로 먹이고 일을 시켰다고 한다. 이런 사회복지제도는 현대의 사회복지 정책을 능가하는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토정 선생의 이러한 사회복지 제도에 의문을 가진 한 관리는 토정 선생에게 묻기를 “사또님, 가난구제는 나라에서도 못한다고 하는데 관청의 일을 거지들만 위주로 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물으니 토정 선생은 답하기를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백성을 살게 하는 것이니, 그 밖에 더 큰 일이 무엇이란 말이냐”라고 단호하게 일축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토정 선생이 어용학자(御用學者)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 본문 : 한중수 ( 토정비결 전문가 )
※ 참조 : 토정비결이란 무엇인가. 김중순 ( 서울디지털대학 총장)

쇠갓에 대한 일화

토정 선생은 그 시대에 말하는 정말 참다운 양반이었다. 비록 가난이 이를 데 없었지만 바깥 출입에 의관을 쓰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관례(冠禮) 이후로 수십년간 써온 갓이 낡을대로 낡아버려 쓸 수가 없게 되버렸다. 거기다가 밥을 지을 솥에 구멍이 나서 더 이상 쓸 수가 없게 되버렸다. 궁리하던 끝에 토정 선생은 ‘쇠갓’을 장만하여 두 가지 목적으로 쓸 방도를 찾았다. 갓으로도 쓰고 솥으로도 사용할 수 있게 갓 모양을 한 솥을 장만했다. 이것이 바로 토정 이지함선생에게 싸고도는 ‘쇠갓’이다. ‘쇠갓’은 뒤집어 놓고 밥을 지으면 솥이요, 밥을 짓고나서 깨끗이 닦은 후 말렸다가 끈을 달아 머리에 쓰면 훌륭한 갓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토정 선생이 쇠갓을 쓰고 나간 후면 부인은 끼니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부인은 토정 선생의 귀가를 애타게 기다렸다 한다. 하지만 쇠갓이 있으면 뭐하나 쇠갓에 끓일 양식이 없으니 말이다. 용도가 있을 때는 남편이 쓰고 나가서 사용할 수가 없고 용도가 있을 때는 끓일 양식이 없으니 그 가난이 어떠했는지 짐작할만 하다.


※ 본문 : 한중수 ( 토정비결 전문가 )
※ 참조 : 토정비결이란 무엇인가. 김중순 ( 서울디지털대학 총장)

조식과의 일화

토정의 개인적인 인품이나 학자로서의 경지를 느낄 수 있는 한 일화가 있다. 조식(曹植)과의 면담에서의 일화이다.
조식은 이조의 연산군에서 선조를 잇는 당시의 유학자로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버금 할 만큼 훌륭한 학자이다. 하루는 조식이 한강 기슭을 지나가다 근처에 토정이 흙집을 짓고 산다는 얘기를 듣고 기절(氣節)을 높이 평가하는 조식에게는 토정을 만나보고 마음을 억제할 수 없어 하인에게 술을 준비시키고 토정의 토막을 찾아갔다. 술상 위에는 인품과 학문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 사이의 대화가 이루어 졌고 토정의 인품과 학식에 감탄한 조식은 토정을 중국의 시성(詩聖)인 도연명(陶淵明)이에게 비유했고, 도연명의 의고시 한편을 읊었다.

(도연명의 의고시 중)
“동방에 한 선비가 있으니 피복이 노상 납루하더라,”
“삼순에 구식이 고작이요, 십년토록 관 하나로 지내더라”
“신고가 이루 말할 수 없건만 언제고 좋은 얼굴이더라, ”
“내 그분을 보고자 하여, 이른 아침에 하관을 넘어 갔더니 청송은
길을 끼고 울창하였고, 백운은 처마 끝에 잠들더라. ”
“내 일부러 온 뜻을 알고 거문고 줄을 골라 날 위해 튕겨내니
높은 음은 별학조 놀란 듯한 가락, 낮은 소리는 고란이 아닌가. ”
“원컨데 이제부터는 그 곁에 살며 새한까지 이르고저,”

시를 읊은 조식은 토정을 연명이 말하는 동방의 한 선비와 같다고 했다.
토정 자신도 면괴하게 느낄 만큼 조식 같은 훌륭한 학자에게서 큰 평가를 받은 셈이다.

※ 본문 : 한중수 ( 토정비결 전문가 )
※ 참조 : 토정비결이란 무엇인가. 김중순 ( 서울디지털대학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