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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열차분야지도

고구려의 천문도를 복원했다는 천상열차분야지도! 당시 하늘의 위엄이 담겨 있다는 이 천문도는 과연 어떻게 탄생된 것일까?

이 천문도 석각본은 옛날 평양성에 있었는데 전쟁 중에 강물에 빠져 없어졌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그 탁본(印本)을 지닌 사람 또한 없어지고 말았다. 전하(태조 이성계)께서 (조선의) 임금이 된 초기에, 잃어버렸던 천문도를 바친 자가 있어 전하께서는 그것을 보물처럼 중히 여겼다.

(右天文圖石本舊在平壤城因兵亂于江而失之歲月旣久其印本之在者亦絶無矣惟我殿下受命之初有以一本投進者殿下寶重之) - 권근의 [양촌집(陽村集)] 천문도시(天文圖詩), [대동야승(大東野乘)]-

조선 초기, 태조 이성계와 개국공신들은 왕조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이때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고구려 시대에 만들어진 천문도를 누군가 이성계에게 바친다는 것이다. 태조는 뛸 듯이 기뻤다. 그리고 새 왕조가 하늘의 뜻에 의해 세워진 것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천문도의 제작을 서둘렀다. 그런데 탁본에 그려진 별자리의 위치가 당시와는 달랐기 때문에 새로운 관측이 필요했다. 그래서 권근, 유방택 등 여러 학자들이 수년간 노력한 끝에 드디어 1395년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가 탄생되었다. 이 천문도는 중국의 순우천문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천문도이다. 현재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에 가면 만날 수 있다.

검은 돌판 위에 별자리를 새겨 넣었다는 천상열차분야지도! 높이만 해도 웬만한 농구선수보다 크며, 무게만도 1톤이 넘게 나간다. 이 거대한 돌판에 별자리를 새기는 것은 하늘의 체계를 조선왕실에 끌어들이는 작업이며, 그만큼 새기는 손길 하나하나에 세심한 정성이 더해졌을 것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총 1464개의 별자리가 그려져 있다. 원의 중심에는 북극성이 있고 바깥쪽에 작은 원이 있으며, 큰 원과 작은 원 사이에 적도와 황도가 그려져 있다. 놀라운 것은 이 천문도에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북반구의 거의 모든 별자리가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는 무슨 뜻일까? 천상은 하늘을 말하고, 열차는 하늘을 12차로 나눈 것, 그리고 분야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늘의 구역을 28수로 나누고 이를 땅에도 적용한 것을 말한다. 이러한 내용이 모두 그려진 그림이 바로 천상열차분야지도인 것이다.

<종대부 그림 : 조선 천상열차분야지도/중국 천문도> <종대부 그림 : 조선 천상열차분야지도/중국 천문도>

이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중국의 천문도에는 없는 별자리 하나가 눈에 띈다. 네 개의 별로 이루어진 ‘종대부(宗大夫)’라는 별자리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 17세기 제작된 일본의 천문도에도 ‘종대부’ 별자리가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천상열차지도(天象列次之圖, 1670)’와 ‘천상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1677)’가 바로 그 흔적이다. 14세기에 이미 우리 고유의 별자리라고 기록되어진 ‘종대부’ 별자리는 바다를 건너 일본의 천문도에도 자취를 남겼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독창성과 함께 우리의 천문도가 일본의 천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숙종본 천상열차분야지도 그림 : 1687년 제작, 보물 837호, 세종대왕기념관> <숙종본 천상열차분야지도 그림 : 1687년 제작, 보물 837호, 세종대왕기념관>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제작된 후로부터 어느덧 3백여 년의 세월이 흐르자 태조 때의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점차 표면이 닳게 되었다. 이에 숙종은 하늘의 위엄이 점점 옅어지는 것을 우려하였고, 천문도를 다시 새기라고 명을 내렸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하늘을 갖고 싶었고, 하늘이 우리를 지켜준다는 믿음 또한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1687년 완성된 숙종 본은 태조 때의 것과 동일한데 단지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이름이 위쪽에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태조 본과 숙종 본! 조선왕조는 이 천문도들의 보관에도 매우 심혈을 기울였다. 후에 관상감 내에 흠경각이라는 건물까지 따로 지어 보관할 정도로 매우 중시 여겼던 것이다.

또한 천문을 소중히 여기는 전통은 사대부 집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사대부 집안에서는 천문도를 보유하는 것을 가문의 영광이라고 여겼으며,이것이 조선시대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수많은 모사본과 필사본을 낳게 한 이유가 되었다. 사대부 집안에 전래되는 천문도는 종이에 필사된 것, 색을 칠한 것, 비단에 수놓은 것 등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며 심지어는 정자(亭子)의 천장에 그려진 것도 있다. 하늘의 상서로운 기운을 생활에까지 이어받으려고 했던 조상들의 마음이 다양한 유물과 유적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 참고 ※
● 12차 ● 28수 ● 종대부


천문도는 크게 구법 천문도와 신법 천문도로 나뉜다. 18세기 이후 들어온 서양식 천문도를 신법 천문도라고 하며 구법 천문도는 동양의 전통사상에 바탕을 둔 천문도를 가리킨다. 두 천문도의 가장 큰 차이점은 구법은 북반구를 중심으로 원 하나로 그린 반면 신법은 북반구와 남반구 두 개의 원으로 나눠 그린 점이다. 구법 천문도의 역사는 고구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의 옛 서울인 통구(通溝)에 가면 무용총과 각저총 현실(玄室) 천장에 그려져 있는 고대의 천문도를 볼 수 있는데 이들은 4세기말에서 5세기 초 사이에 그려진 것이다. 자주색 원으로 그려진 별들이 3개씩 연결돼 별자리를 나타내고 있다. 고작 해야 20개 남짓한 별이 그려진 원시적인 천문도지만 고구려천문도의 전통은 고려로 이어진다. 고려시대 천문도에 관해서는 전통은 고려사에 오윤부라는 사람이 제작했다는 기록이 나와있을 뿐 실물은 전하지 않는다.

루퍼스는 「한국 천문학」에서 개성박물관에 고려인의 천문관이 담긴 동경(구리거울)이 남아 있다고 했으나 현존 여부는 알 수 없다. 1,000여개의 별들을 담고 있는 본격적인 천문도로 가장 오래된 것은 천상 열차 분야 지도이며 조선시대 이루 민간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천문도가 이를 모델로 그려졌다. 천문도는 종이에 필사된 후 갖가지 빛깔로 채색이 되었으며 때로는 비단에 수놓아 지거나 정자의 천장에 그려지기도 했다. 드물게는 구이원판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별자리를 표시한 것도 있다.

밤하늘에 빛나는 무수한 별들은 아름다운 세계에 대한 꿈을 일깨워주는 존재인 동시에 천상과 지상을 이어주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별들에 인간세상의 흥망성쇠를 주관하는 하늘의 뜻이 나타난다고 믿었다. 옛사람들은 천문대를 만들어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고 별들의 지도인 천문도를 그리는 등 별들의 움직임에 끊임없는 관심을 보여왔다. 특히 역대왕조의 임금들은 천상계의 변화가 나라의 안녕과 직결된 것으로 여겨 자기의 통치행위를 반성하는 거울로 삼았다.

세계 두 번째 오래돼

조선 태조(1395)때 만들어진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은 고구려여 고분벽화에 남아있는 천문도 이후 우리 천문학의 역량과 성과를 결집한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천문도다.
덕수궁 석조 전 내 궁중 유물전시관에 있는 이 천문도는 가로122cm, 세로221cm의 검은 대리석에 1.400여개의 별들을 새겨 놓은 것으로 중국의 순우천문도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오래된 석각(石刻) 천문도다 .600년간 비바람에 시달린 탓에 돌의 표면은 반들반들하게 닳았지만 흐릿하게 남아있는 미세한 점과 선들은 당시 국내 천문학 수준이 세계적인 경지에 이르렀음을 짐작케 한다.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길고 알쏭 달쏭한 이름은 우리 나라 천문도만의 독특한 양식을 가리킨다. 천상을 커다란 원으로 표현해 이를 12개 구역으로 나누고 구역(列次)마다 그에 대응하는 지상의 12개 지역(分野) 명칭을 기록한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76cm나 되는 원의 중심에는 북극성이 있고 원 둘레에는 옛사람들이 하늘을 나누는 기본 틀로 설정했던 28개의 별자리가 그려져 있다.

조선 태조는 자신이 하늘이 세운 나라의 임금임을 국내 외에 과시하기 위해 이 각석을 만들었다고 한다. 태조는 대동강에 수장된 것으로 전해지던 고구려의 석각천문도의 탁본을 우연히 입수한 뒤 권 근(1352~1409) 등에게 이를 토대로 새로운 천문도를 만들라는 명을 내렸다. 당시 천문 관측 기관이었던 서운관의 학자들은 700년이라는 시차에서 생길 수 있는 오차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이 천문도를 기준 삼아 별을 새로 관측하였다. 그 결과 고구려나 중국 것과는 다른 매우 정확한 천문도가 탄생했다. 천상 열차 분야 지도 각석의 가장 도드라진 특징은 앞뒤 양면에 천문도를 새겼다는 점. 그 이유는 미스터리로 남아있지만 박성래 외국어대 교수 등은 조선왕조실록에 이 각석이 세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기록돼 있는 점으로 미뤄 태조 때 각석은 만든 뒤 세종 때 다시 뒷면에 천문도를 새긴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고구려 탁본 토대 권근등 제작

또 다른 특징은 별의 밝기를 별의 크기로 표시했다는 점이다. 밝은 별은 크게, 희미한 별은 작게 그렸다. 중국 천문도에서 볼 수 없는 별자리를 새로 추가한 점도 독자적인 시도로 평가된다. 2,900여 한자의 글자체도 매우 정교해 예술적인 측면에서도 뛰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심하게 훼손된 각석은 숙정 때 또 다른 대리석에 복각 돼 관상감(서운관의 추신)에 보관됐다. 영조 때는 관상감 내에 흠경각을 지어 두 각석은 함께 보관했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몰락하고 일제식민통치가 시작되자 아무도 각석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 1960년대에 이르러 각석이 다시 발견된 곳은 흠경각이 아니라 창경궁의 명정 전 추녀 밑이었다. 평범한 돌 덩어리가 돼버린 각석은 풀밭에 내 팽개쳐진 채 사람들의 발길에 이리저리 차이고 있었다. 고궁에 소풍을 나온 시민들은 각석 위에 도시락을 펼쳐놓고 밥은 먹었고 어린아이들은 모래를 뿌리고 벽돌을 굴리며 장난을 쳤다.

각석이 중요한 문화재임을 처음 알아 본 전상운 성신여대 명예교수는 『과학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일천하던 때라 그같은 웃지 못할 일들이 많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은 83년 국보 제 228 호로 지정됐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진가를 맨 처음 알아본 사람도 한국인이 아니라 미국인학자. 1910~1930년대 평양 숭실 학교에서 근무했던 WC 루퍼스는 1936년 출간한「한국 천문학」이란 책에서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동양의 천문관이 집약된 섬세하고도 정확한 천문도』라고 격찬했다.

1960년 창경궁 풀밭서 발견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일본에도 전해져 일본의 천문학에 영향을 미쳤다. 세종 때 만들어진 한국 고유의 역법인 칠정산(七政算)이 일본 정향력(貞享曆)의 모태가 됐다는 기록을 남겼던 일본의 유명한 천문학자 시부카와 하루미(1639~1715)는 그의 문집에 『조선의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일본의 천문도 제작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적고 있다. 이 같은 주상을 처음 제기한 박성래 교수는 『이는 일본의 대표적인 천문도 2개의 이름이 각각「천상열차지도」와「천상분야지도」인데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말했다. 박창범 서울대 교수 등 다른 천문학자들도 한·일 천문도의 상관관계를 밝히기 위한 비교 연구를 진행 중이다.
-1997년 4월 26일 경향 신문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