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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이야기안동하회마을 풍수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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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하회마을 풍수설화

풍산유씨가 하회마을로 들어와 살게된 것은 7대째 해당하는 전서공 유종혜(柳從惠)때였다. 그가 하회 마을에 자리잡기 전까지 유씨들은 풍산읍 상리라는 곳에 살고 있었다. 상리에서 7대를 사는 동안 인구가 증가하여 살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후손을 위해 새로운 곳을 찾게 되었다.
유종혜는 3년동안 매일같이 하회마을 뒤에 있는 화산을 오르내리면서 터가 좋은 곳을 찾았다. 홍수가 날 때 마을이 얼마나 잠기는지, 논밭은 충분한지, 산에 땔감은 충분히 있는지 등을 자세히 관찰한 뒤 현재의 하회 마을에 정착했다. 그러나 화산의 중턱에는 이미 허씨와 안씨가 살고 있었는데, 유종혜는 일반적으로 마을이 많이 자리잡은 산중턱보다는 강가의 조그만 언덕을 택했다. 그곳은 원래 절터였는데 폐허가 되어 다래 넝쿨로 덮혀 있었다.

유종혜가 절터 옆에 나무를 베고 집을 짓기 시작했는데 집이 거의 완성되었을 때 아무 이유 없이 집이 무너졌다. 다시 집을 지었으나 같은 일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 이에 고심하였는데, 어느 날 꿈에 할머니 한 분이 나타나 "이런 좋은 터의 임자가 되기 위해서는 2년 동안 사람들에게 공덕을 쌓아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그 할머니의 가르침대로 유종혜는 고개 밖의 마을로 나가 원두막을 짓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밥도 주고, 신발도 주고, 잠도 재워주며 적선을 하였다. 그러기를 3년, 다시 할머니가 꿈에 나타나 "이제 되었으니 가서 집을 지어라"고 하니 비로소 유종혜가 지금의 종가집 건물인 양진당을 완성했다.

그렇게 하는 사이에 산 중턱의 안씨와 허씨 마을은 없어졌지만 유종혜가 좋은 터를 잡은 덕분에 유씨는 이곳의 정기를 받아 집을 지은 지 8대째에 훌륭한 인물을 낳았으니, 겸암 유운룡(1539-1601)과 동생인 문충공 서애 유성룡(1542-1607)이 그분들이다.
유성룡의 시호는 문충으로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관직은 영의정까지 이르렀고 영남유생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하회마을은 마을 자체로서도 이름이 높지만, 또 마을의 위치가 풍수지리학에서 말하는 전형적인 명당형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위 문제는 2004년 수능시험 사회탐구영역에서 풍수의 현대적 의미를 설명한 부분으로 풍수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큰 흥미를 끌게 하는것이었다.
설명중 " 마을과 그 일대는 배가 더 가는 행주형''의 지세로 우물을 파는 것은 배에 구멍을 내는 것과 같아 우물을 파지 않는다" 는 내용은 특히 흥미롭다.
일찍이 [택리지]를 저술한 이중환은 ''평양의 지세는 물위에 배가 지나가는 형국이므로, 우물 파는것을 꺼린다. 온 읍 사람들 공사 막론하고 모두 강물을 길어다 일상생활에 쓴다'' 고 기록하였다.
풍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평양과 안동하회마을은 그 규모의 크고 작음에서 차이가 있지만 풍수적 지세 특성이 모두 행주형으로 알려져 있다. 해서 두 곳 모두 우물을 파지 않는 전통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행주형의 지역에서 우물을 파지 않는 풍수 금기는 우물물이 식수로서의 부적합한 이유말고도 약한 지반의 안전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우물을 마구 파 지반을 교란시키게 되면 지하수의 흐름이나 지반의 안정 상태가 유지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경험적 사실을 옛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금기가 생긴 것이 아닐까. 따라서 행주형의 마을이나 고을에서 우물을 파지 않는 풍수적인 관행과 금기는 한갓 미신이 아니라 현대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풍수 금기와 관행은 마을이나 고을에 발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정주공간을 풍수사상에 의해 인지하고, 그에 걸맞는 어떤 조치들을 취함으로써, 정주공간의 안정을 강화하려는 노력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행주형 지세의 마을은 안정과 순항을 위한 여러 시설을 갖추고자 한다. 마을이나 그 주변에 있는 적당한 산이나 나무, 언덕 등은 곧잘 배의 시설이나 장치로 여겨졌다.
하회마을의 경우, 삼신당의 느티나무가 돛대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닻은 강가의 만송정에 해당된다. 마을의 안정을 꾀하는 풍수상의 조치, 즉 커다란 나무를 돛대로 삼고 길게 뻗은 마을숲을 닻으로 삼아 행주형국의 완성을 기대하는 심리는 단순한 미신의 차원이 아니라 풍수를 통한 마을의 질서부여라는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기울였기 때문이리라.
그러면 왜 이렇게 노력과 정성을 기울여 숲을 만들었을까?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홍수 때 범람을 막고 겨울철에 차가운 북서풍까지 막아내는 방풍림으로서의 역할이다. 그러나 그런 실용적인 측면에서 뿐만이 아니라 여기에는 풍수적인 의미가 있다. 그것은 부용대의 흉한 모양을 가려주는 비보숲으로서의 역할이다.
이 소나무숲은 또한 "들어오는 물은 보여야 하고 나가는 물은 안 보여야 한다"는 풍수의 원칙에 따라 물길이 빠져나가는 수구 부분을 여며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하회마을은 물이 들어오는 입구가 넓어 허전하게 보이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 ''수구막이''의 역할을 한다.
일반적인 마을은 뒤로 산에 기대고, 앞으로 물을 대하기 때문에 산기슭이 내려오는 평평한 곳에 마을이 자리를 잡고 그 앞으로 넓은 경작지가 펼쳐지고 그 앞으로 물길이 흐른다. 그 물길을 지나 멀리 높고 낮은 산이 펼쳐진다. 그러나 하회마을의 경우, 산기슭에서 평형해지는 곳에 경작지가 있고 그 경작지를 지나 물과 바로 접해있는 곳에 마을이 자리를 잡고 있다. 마을 앞에는 경작지가 없고 바로 큰 낙동강물이 흘러간다. 그래서 마을은 삼면이 물길로 휘감겨져 있고, 통로가 되는 곳은 하회마을을 넘어 들어오는 큰 고개길이다. 이런 막다른 곳에 마을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마을은 외부와 격리된다. 따라서 고립된 지리적인 특성으로 인해 하회마을은 독특하고 개성있는 마을의 경관을 만들어내고, 독자적인 전통문화를 생성, 전승, 유지시켜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