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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이야기도선대사와 국토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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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대사와 국토비보

도선대사와 국토비보
선암사 삼인당 선암사 삼인당

도선에 관한 기록으로서 가장 신빙성이 높은 것은 고려 의종 4년(1150)에 최유청이 왕명에 따라 찬술한 「백계산옥룡사증시선각국사비명」이다. 이에 의하면 도선은 신라 흥덕왕 2년(827)에 영암에서 출생하여 효공왕 2년(898)에 72세로 입적하였는데 그는 15세 때에 화엄사에 가서 중이 되어 화엄학을 공부하다가 20세되던 해에 선종으로 개종하여 곡성 동리산파의 개조인 혜철의 문하에서 선을 수업한 후 23세 때부터 운봉산 · 태백산 등 각처를 유람하며 수행하다가
37세 때에 옥룡사에 주석하여 입적할 때까지 제자 양성에 주력하였다 한다.

한국 풍수의 시조라고 여겨지는 도선(道詵)대사의 전기를 기록하고 있는 <<고려국사도선전>>에는 땅의 기(氣)가 약한 곳을 보완하는 비보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만약 병이 들면 곧 혈맥을 찾아 침을 놓거나 뜸을 뜨면 병이 낫는다. 산천의 병도 역시 그러하다. 이제 내가 지적한 곳에 절을
세우고 불상을 세우고 부도를 세우는 일은 사람이 침을 놓고 뜸뜨는 일과 같다. 이를 비보(裨補)라고 한다.”
흠이 있는 땅을 보살피고 치료하며 보완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그 흠결이 있는 곳에 사찰을 세워 비보하는 방법이다. 이를 비보사찰이라 하고 이 방법을 의지법(醫地法)이라고도 한다. 도선은 국토 전체를 살펴 그 병세를 고치는 방법을 불도에 의존하였으나 그 근본은 풍수였다.

성불사가 있는 정방산성 평면도 성불사가 있는 정방산성 평면도
성불사가 있는 정방산성
(황해북도 사리원시 광성리) 성불사가 있는 정방산성
(황해북도 사리원시 광성리)

<<백운산 내원사 사적>>에는 비보를 해야 하는 동기가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뭇 산들이 서로 경쟁하듯이 험하고, 여러 하천들이 다투는 듯 콸콸거리며 흐르며, 마치 용과 호랑이가 서로 싸우는 것과 같은 형세도 있고, 혹은 날짐승이
날아가고 길짐승이 달아나는 형세도 있으며, 혹은 산의 맥이 멀리 지나가버려 제어하기 어려운 것도 있는 반면에 짤막짤막 끊어져서 이르지 못하는 것들도
있으나 이와 같은 형상을 구체적으로 말하기가 어려운 지경이라, 동쪽의 고을에 이로울 것 같으면 서쪽에 있는 마을에는 해가 되고, 남쪽에 있는 고을에 길할 것 같으면, 북쪽에 있는 마을에는 흉하다. 우뚝 솟은 산을 바꾸기란 불가능한 일이고, 아무렇게나 흐르는 물은 막기가 어려우니 이를 비유컨대 질병이 많은
사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사람에게 병이 있을 때 의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친찰하고 치료한다. 풍수가 땅을 고치는 방법 또한 그와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이 조그만 범위가 아니라
국역 전체에 해당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차이가 없다.
비보사찰을 통한 비보압승의 전통은 고려 태조가 남긴 <훈요십조>의 제 2훈(訓)에 잘 나타나고 있다.
“모든 사원은 모두 도선이 산수의 순역(順逆)을 추점(推占)하여 개창한 것이다. 도선이 이르기를 ‘내가 점정한 곳 이외에 함부로 절을 지으면 지덕(地德)이
손상되어 왕업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짐이 생각건대 후세의 국왕, 공후, 비, 조신들이 각기 원당이라 칭하여 혹 더 지을까 크게 우려된다.
신라말에 다투어 부도를 만들어서 지덕을 훼손하여 망함에 이르렀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겠는가.”
이와 같은 비보사찰의 경우 한반도 전체의 순역을 감안하여 건립된 사찰로 한반도 전체를 비보하는 사찰이다. 비보사찰은 비보 차원의 범위나 장소 설정에 있어 몇 가지 차원이 나타난다. 우선 나라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산천의 순역을 가려 사찰을 입지시키는 국역(國域)비보사찰이 있고, 나라의 수도에 흠결이
되거나 비보가 필요한 장소에 사찰을 세우는 국도(國都)비보사찰이 있으며, 한 고을을 풍수적으로 완벽하게 하려는 고을 차원의 비보사찰이 있다.

사찰을 통해 국도를 비보하는 경우 개성의 사찰에서 잘 나타난다. 개성의 경우 주변 산세가 너무 조밀하고 국면이 넓지 못하며 북쪽에 있는 여러 산들의
계곡에서 흘러 나오는 계곡의 물들이 모두 중앙에 모이기 때문에 하계 강우기에는 수세가 거칠고 급격하여 순조롭지 못한 결점이 있었다. 이에 순역의
수덕(水德)을 진압하고 지덕을 비보하기 위하여 월광사(月光寺)와 일월사(日月寺)는 여러 물길이 모이는 합류점에, 개국사(開國寺)는 내수구(內水口)에
건설하여 수세를 진압코자 하였다. 이들 사탑의 존립 근거는 부정적인 수덕의 진압에 있었지만 풍수지리적 비보 이외에 실제적인 기능을 갖고 있었다.
수재(水災)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지역에 사탑을 건설함으로써 하천의 측방침식을 억제할 수 있었으며, 사찰에 상주하는 승려들로 하여금 하천을 감시하게 하는 동시에 유사시 노동력을 활용함으로써 보다 신속하게 수재에 대처할 수 있게 하였다. 이와 같이 사탑비보는 수덕과 지덕을 비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사찰의 입지 조건은 여러 물길이 모여드는 합류점이나 수재의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었다.
북한에 있는 유명한 사찰 성불사 입구에 세워진 <성불사 기적비>(영조3년: 1727년)에 따르면 "옛날 도선국사가 절을 세울 때 산이 솟고 물이 흐르는 형세와 나라의 방위상 중요 지점의 형편을 밝은 안목으로 살펴 가려내어 천 백년을 지켜나갈 고장을 만들었으니 어찌 다만 절간을 세워 경문이나 외우고 중들이
살아가는 데 그치게 하였으랴“라는 기록이 있다.
도선으로 대표되는 국토비보의 의도적인 터잡기는 사찰입지가 단지 승려들의 명당터를 잡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방과 주민의 살림을 생각함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도선의 풍수는 좋은 터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국토를 마치 우리의 어머니를 대하듯 병든 터, 흠 있는 땅을 골라 고쳐줌으로써 산천을 밝게 하자는 뜻이 담겨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정방산성 남문 정방산성 남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