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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이야기고구려 역사와 한반도-산줄기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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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역사와 한반도-산줄기찾기

산줄기찾기
국내성 환도산성 집안시 
위치도 국내성 환도산성 집안시 
위치도

고구려는 한국 고대국가의 성립과 발전과정에서 가장 선진적이며, 하나의 지표가 되어 그 의미와 비중이 적지 않다. 그러나 한반도내 삼국의 각축에서
신라가 통일국가로 변하면서 고구려는 한국사의 주류를 계승하지 못하게 되었다. 특히 이러한 결과로 고구려의 역사적 사실들이 {삼국사기} 등 역사서의
기록에서 누락되거나 소략하게 되었고, 고구려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만들었다.

1980년대 이후 북한학계의 연구 성과들이 소개되고, 중국 영역이 되어버린 압록강 유역이 부분적으로 개방되면서 고구려의 유적과 유물이 소개되어 고구려 이해의 폭을 넓혀오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고구려 국가 전체에 대한 이해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므로,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과정에서 고구려가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는 계기를 풍수사상과 관련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고구려는 내부적인 사회발전의 변화에 맞추어 국가발전의 방향을 새롭게 모색하거나 추진할 때 항상 수도를 천도하였다. 고구려의 수도 천도는 새로운 발전의 상징이었고, 국가 발전 방향을 새롭게 모색한 결과이기도 하다.

고구려는 기원전 75년경 한나라(漢)의 현토군을 서북쪽으로 밀어내는 과정에서 내부적으로 종족을 결합하고, 압록강 유역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고구려족과 연맹을 결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압록강 중류 유역에 있던 여러 정치집단들을 결집하여 지역연맹체를 결성하였던 것이다. 당시 연맹체의 주도국은 고구려
건국신화에 보이는 주몽보다 선진세력인 송양왕(松讓王)의 비류국(沸流國)인 소노부(消奴部)였다. 주몽(朱蒙)은 비류국 주도의 연맹체가 형성되어 있는
가운데 남하하여 그 구성 소국 가운데 하나였던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정착한 후 송양왕과 주도권 쟁탈전에서 승리하여 고구려의 건국자가 되었다.
주몽이 처음 정착한 도읍은 졸본으로 알려지지만, 그 위치는 정확하게 비정하기 어렵다. 많은 연구자들은 졸본지역을 오늘날 중국 길림성의 환인(桓因)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환인일대는 고조선 시대의 청동기 문화와 동일한 형태의 유적과 유물이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적석총이 많이 분포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곳은 고구려 초기의 도읍지로 비정할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고구려는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주몽이 수도로 정한 환인지역은 중국 군현과의 각축을 통해 정치적으로 성장하여야 하였고, 또 풍부한 경제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자연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이곳은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았으며, 산곡을 따라 사람들이 살면서 산골짜기에서 나오는 물을 먹었다. 그리고 양전(良田)이 없어 노동력으로 부지런히 농사를 짓지만, 구복(口腹)을 채우기에 부족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주몽은 연맹체의 맹주가
되었으나, 고구려족의 왕으로써 위상을 확보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현실에서 유리왕은 새로운 변신을 위해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기게 되었다. 국내성은 현재까지 고구려 시대의 유적이 가장 많이 풍부하게 발견되고
있 는 현 중국의 집안(集安)지역이다. 유리왕은 천도를 통해 압록강 중류지역에서 최대의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집안지역이 갖고 있는
자연적 조건에 기인하는 것이다. 압록강은 수량이 풍부하고 옛날부터 임강(臨江), 단동(丹東), 장백(長白) 지역을 왕래하는데 가장 중요한 뱃길이었고, 따라서 고구려초기부터 압록강을 통한 군사활동과 상업활동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오녀산성 근경 오녀산성 근경

유리왕이 국내성으로 천도할 당시의 기록은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는 이유와 의미를 상세하게 알려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유리왕 22년(45년)
천도당시의 모습이 자세하게 나온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유리왕이 왜 천도하였는가 즉 천도의 이유이다. 유리왕 21년에 제사에 쓸 희생인 돼지가 도망을
하여 성 밖으로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담당관리가 뒤쫓아가 국내위나암에 이르러서야 잡을 수 있었다. 그는 돌아와 유리왕에게 ‘이곳은 산이 험하고 물이 깊으며, 땅이 오곡을 기르기에 알맞고 사슴과 물고기가 많이 납니다.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면 백성들에게 크게 이롭고 병란도 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라고 국내위나암에 대한 견문을 상세하게 보고하였다. 이에 유리왕은 직접 이곳을 정찰하고, 이듬해 천도하면서 성을 축조하였다.
유리왕이 천도한 배경은 농업생산과 군사적 방어였다. 국내성의 경제적, 군사적 중요성은 고구려인의 생존과 국가발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연요소였다. 현재의 집안지역의 자연조건도 당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집안은 압록강변에 아늑하게 자리 잡아 푸르름과 꽃의 향연이 베풀어지며, 생기가 넘치는 곳이다. 환인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살기가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유리왕은 국가 팽창과정에서 늘어나는 귀족세력과 백성들의 경제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집안지역에 주목한 것이다. 특히 환인지역이 가지고 있는 교통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천도한 것이다. 그러나 집안지역은 산간지대여서 방어에는 유리한 점이 있지만, 외부세계와의 통교, 즉 문화교류에는 막대한 장애였다. 다만 압록강 수로를 이용한 교통상의 이점은 있었다. 이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집안으로의 천도결과 고구려는 급성장할 수 있었고, 광개토대왕의 위업이 달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광개토대왕 사후 국제정세의 변동과 국내세력의 변화로 장수왕은 평양천도를 계기로 새로운 변신을 시도해야 했다. 장수왕이 조상들의 무덤을 뒤로 하고, 400년 동안 수도였던 집안지역을 떠나 평양으로 천도하는 계기는 무엇인가. 대외적 요인의 하나로 중국의 변화를 지적할 수 있다. 중국의 북위(北魏)는 북연(北燕)과 북량(北?)을 멸망시키고 화북(華北)지역을 통일하였고, 남쪽에서는 송(宋)에서 제(齊)로 왕조가 교체되고 있었다. 이른바 남북조시대가
전개되면서 남북조 왕조들은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를 자신의 후방 지원세력으로 두고자 직접 대결을 피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서변으로 강대세력인 북위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남북의 왕조로부터 동시에 책봉을 받으면서 국제적인 문제에 직접 개입해 입지를 굳히는 등 자주적인
활동을 당당하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수왕은 고구려의 남부지역에 대한 직접 지배를 시도하여 남진을 추진하였다. 이것은 광개토대왕에 확대된 지역을 고구려 영토로 안착시키고, 영역지배를 본격화함으로써 명실상부하게 전성기를 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평양지역은 국내성이 갖고 있는 자연적 조건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이었다. 장수왕은 15년(427년)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장수왕은 왜 하필 평양으로 천도하였을까. 이러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평양이 가지고 있는 자연적, 지리적 조건을 검토해 보자.

평양지역은 대동강유역과 황해도지역의 비옥한 평야지대를 끼고 있다. 그러므로 국내성과는 판이한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기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평양지역의 풍부한 물산은 고구려인들에게 매력으로 다가왔고, 주민들은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평양지역은 교통의 요지였다. 한반도 서북지역의 중심지로 요동지역이나 한반도 남부지역을 진출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평양의 개방적인 지리적 조건이 군사방어적인 측면에서
불리하지만, 이미 요동지역을 정복한 상태였기에 위협은 없다고 판단할 수 있다.
고구려의 평양천도는 장기간에 이루어졌다. 공개토대왕도 이미 평양을 직접 방문하여 9개의 사찰을 건립하면서 천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장수왕은 지금 평양의 안학궁성과 대성산성으로 천도한 것으로 추정한다. 안학궁은 둘레 2488미터의 방형토성이며, 대성산성은 둘레가 9284미터로 추정된다. 안학궁은
왕궁이었으며, 대성산성은 군사적 방어를 목적으로 한 산성이었다.
장수왕은 평양천도 이후 476년에 백제의 위례성을 함락시키면서 개로왕을 죽였다.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영역이 축소되었고, 고구려의 남하에
신라마저 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이것은 고구려의 평양천도가 가져온 한반도 정세의 지형변화인 것이다. 더구나 고구려는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국제적
지위가 높아졌다. 이것은 평양의 지리적 개방성 덕택이었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평양천도는 내부의 사회변화와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국가발전 방향을
새로이 모색한 변화의 상징이었다. 그 상징의 주요요인은 평양의 지리적 입지조건에 있었다고 이해된다.
고구려는 평양으로 천도함으로써 건국 이후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게 되었고, 보다 균형적인 국가발전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중국과 대등한 관계 속에서
대결과 각축을 벌렸다. 이러한 이점은 평양의 자연지리적 입지조건에 있었다. 이후 평양은 정치, 경제, 문화의 도시로 발전하였고, 고구려는 정치, 경제,
사회 등 가장 완비된 제도를 갖출 수 있었다.

평양성 평면도 평양성 평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