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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이야기황희 정승 조부 황균비(黃均庇)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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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정승 조부 황균비(黃均庇) 묘

전북 남원에서 순창 가는 24번 국도를 따라 비홍(飛鴻)재를 넘으면 풍계서원이 있는 풍산리다. 행정구역으로는 남원시 대강면 풍산리 산촌마을인데 여기에 조선조 명재상으로 유명한 황희 정승 조부 묘가 있다. 이 묘를 쓰고 황희 정승을 배출하였다 하여 유명한 곳이다. 마을 뒷산 중턱에는 여러 기의 묘가 자리잡고 있는데 제일 위가 황희 정승 조부 황균비(黃均庇) 묘다.

전설에 의하면 황희 정승 아버지가 어려움에 처한 나옹대사를 구해주고 그 보답으로 얻은 명당이라고 한다. 무학대사의 스승으로 알려진 나옹대사가 전국을 유람하다가 친한 친구사이인 남원 오부자 집에 오랫동안 머물게 되었다. 오부자는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를 잡아 달라며 많은 돈을 미리 나옹대사에게 주었다. 나옹대사는 이 돈을 가난한 절에 주어 불사를 하는데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후에도 오부자는 여러 차례 나옹대사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불편이 없도록 해주었다. 그런데 욕심 많은 오부자 아들이 아버지의 그러한 모습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출타한 틈을 이용하여 나옹대사를 묶고 시줏돈만 받아 가고 명당은 잡아 주지 않는다며 이리 저리 끌고 다니면서 봉변을 주었다.

마침 이 장면을 목격한 황희 정승 아버지 황군서(黃君瑞)가 그 동안 나옹대사가 받은 돈 전액을 마련하여 오부자 아들에게 주고 대사를 곤경으로부터 구해 주었다. 이를 고맙게 여긴 나옹대사는 오부자 신후지지로 잡았던 자리를 황군서에게 소개 해주었다. 명당을 소개받은 황군서는 아버지 황균비 묘를 바로 이장하였다. 그러자 부인에게서 태기가 있었는데 장차 아이가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예견한 그는 태어날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 서울인 송악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아이가 바로 황희 정승이다.

황씨(黃氏)는 후한(後漢)의 황락(黃洛)을 먼 시조로 하는데, 그의 후손이 신라 유리왕 5년에 평해(平海)에 표류하다가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기록이 없어 자세한 상계(上系)를 알 수가 없고 장수 황씨가 있게 된 것은 고려 무신난 때 그 후손 중 한 사람이 화를 피하여장수로 내려가 터를 잡으면서부터다. 그러나 이에 대한 세계(世系)도 알 수가 없어 황희의 증조부 황석부(黃石富)를 1세조로 하여 지금까지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2세 황균비(黃均庇), 3세 황군서(黃君瑞), 그리고 황군서의 아들인 황희(黃喜)가 4세조다.

장수 황씨는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이름이 알려진 성씨가 아니었고, 현달한 인물도 없었다. 그런데 황균비 묘를 쓰고 태어난 황희가 조선 태종 때부터 세종대에 걸쳐 6판서를 두루 거치고, 참찬과 찬성,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세종의 총애와 믿음을 각별히 받으면서부터 유명해졌다. 황희에게는 아들 4형제가 있었는데 맏아들 호안공(胡安公) 황치신(黃致身)은 아버지의 후광인 음보(蔭補)로 관직에 나가 호조판서와 한성부윤을 거쳐 종1품의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 둘째는 소윤공(少尹公) 황보신(黃保身)이고, 셋째인 열성공(烈成公) 황수신(黃守身)은 역시 음보로 벼슬에 나가 세조 때 영의정에 올라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에 봉해졌다. 넷째는 황직신(黃直身)이다.
호안공의 아들인 황사효(黃事孝)는 세종조에 문과에 올라 예조판서를 하였고, 그의 아들은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었다. 열렬공의 큰아들은 음사(蔭仕)로 관직에 나가 호조참판을 하였고, 그의 동생 황욱은 첨지중추부사를 하였다. 이 밖에도 수많은 인물들이 있는데 선조 23년 통신사로 일본에 가서 일본 내정을 살핀 다음 반드시 일본의 내침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한 황윤길도 이들의 후손이며, 영조 때 대재학을 한 황경원과 한일합방으로 나라가 망하자 음독 순절한 매천(梅泉) 황현(黃玹)도 장수 황씨다. 황현은 한말야사를 엮은 매천야록(梅泉野錄)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최근의 인물로는 오랫동안 전라북도지사와 교통부 장관을 역임하고 국무총리에 오른 황인성(黃寅性)씨가 있다.

이처럼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않던 가문이 어느 세대를 계기로 하여 갑자기 번창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원인을 무엇에서 찾아야 할까? 우리 조상들은 이를 명당 바람이라고 하였는데 명당의 발복을 부정하는 측에서는 무엇으로 그 원인을 규정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우연의 일치라고 할까? 인물이 나니까 그 선조 묘가 명당이라고 우긴다고 할까? 풍수지리 동기감응론(同氣感應論)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한 번이라도 그 원인을 찾으려고 진지한 노력을 해보고 부정하는지 묻고싶다.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정책으로 우리의 사상을 무조건 미신화 시킨 영향이 지금까지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이렇게 말하면 지금 국토를 보존하기 위해서 화장(火葬)을 권하고 있는데 매장(埋葬)을 선호하게 하여 시대의 흐름과 어긋나는 것 아니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동기감응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흉화(凶禍)를 가져다주는 흉지에 매장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해관계를 없애는 화장이 훨씬 낫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황희 정승 조부 묘의 주산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백두대간의 전북 장수군 장계면 무령고개 영취산(1076m)에서 분맥한 금남호남정맥은 장안산(1236.9m)과 밑목재(750m), 사두봉(1014.8m), 바구니봉재, 원수분(530m), 밤내재, 할미성이 있는 차고개를 넘어 팔공산(1151m)을 만든다. 팔공산에서 금남호남정맥은 북으로 오계치, 홍두괘치, 신광치, 성수산(1059.7m), 옥산동, 가름내를 지나 마이산(678m)을 만들고 부귀산(800.4m)과 오룡동을 지나 모래재에서 위로는 금남정맥을 남으로는 호남정맥을 분맥한다.
효촌리 산촌마을로 이어지는 산맥은 금남호남정맥의 팔공산(1151m)에서 서쪽으로 갈라져 나와 마령치에서 다시 남으로 분맥하여 묘복산(845.9m), 말치고개, 상서산(627.4m), 천황봉(909.6m), 연화산, 약산, 청룡산(477.9m), 갈치, 대신리, 대율리 춘향고개(17번 도로), 계수리 계동을 지나 노적봉을 만든다. 여기서 다시 풍악산(600m)과 응봉(579m)을 지나 기봉한 산으로 지도상으로는 풍계서원 뒷산이다. 묘소는 산촌마을 뒤 산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묘지로 올라가는 길이 험하였는데 최근에는 콘크리트 포장을 해놓아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묘지나 집터가 명당이냐 아니냐를 따질 때 제일 먼저 관찰해야 하는 것은 용맥(龍脈)이다. 용맥이란 산줄기(산능선)로 이곳을 통하여 산천 정기를 전달받는다. 마치 전기가 전선을 통하여 전달되는 이치와 똑같다. 그런데 용이란 살아있는 생명체로 그 변화가 다양하고 무궁하다. 만약 용이 죽었다면 힘없이 일자로 쭉 뻗어 아무런 변화를 할 수 없듯이 산줄기도 변화가 없으면 사절룡(死絶龍)이라 하고 이러한 곳에서는 혈의 결지를 기대할 수 없다. 황희 정승 조부 묘지 뒤에서 내려오는 산줄기(이를 主龍이라 함)를 보면 위에서 아래로 급하게 내려오면서도 좌우로 지그재그 즉 지현자(之玄字)로 굴곡위이(屈曲  )하며 힘차게 내려왔다. 급하게 내려온 용이 산중턱임에도 혈을 만들기 위해서 평평해지면서 단단한 입수도두를 만들어 정제되고 순화된 생기를 정축 해놓았다. 그리고 양옆으로 선익을 뻗어 생기가 옆으로 새지 않도록 하고 앞에는 순전을 만들어 역시 기가 앞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한다. 이곳에서 입수도두는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으나 선익과 순전은 봉분을 크게 만들었기 때문에 지세를 세심하게 살펴야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 대혈을 결지하고도 기세가 강한 용이다 보니 아래로 내려가면서 여러 개의 혈을 결지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아래에 있는 묘지가 제일 나은 혈이다.

이곳을 감싸고 있는 청룡과 백호는 가깝고도 귀한 형상이다. 비록 외백호에 여러 개의 골이 있기는 하지만 깊은 것이 아니고, 아래에는 내백호가 감싸고 있어 직접적으로 골바람이 이곳을 침범하지 않으므로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안산과 조산의 형태도 아름답고 기이한 사격들이 즐비하다. 또한 귀인봉들이 혈 좌우 가까이 있기 때문에 금시발복(今時發福)하여 귀인들이 많이 날 자리다. 전체적으로 청룡과 백호 안산, 조산이 겹겹이 감싸고 있어 이곳에 열두대문이 있다는 소문이 헛됨이 아님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곳은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명당이 좁고 멀다. 명당은 혈 주변에서 나온 물이 취합하는 곳으로 재산을 관장하는데 명당이 좁고 멀므로 큰 재산이 모일 곳은 못된다는 것이 풍수지리적 해석이다. 그래서일까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영상(領相)인 황희 정승을 낳게 했지만 재산과는 거리가 먼 청백리(淸白吏)였다. 황희 정승이 얼마나 청렴했던지 세상을 뜬 후 남긴 재산이라고는 세종대왕이 원로들에게 하사한 지팡이 한 개뿐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현재의 봉분을 보고 좌향(坐向)을 측정하면 술좌진향(戌坐辰向)이다. 우측에서 득수(得水)한 물이 좌측 진(辰) 방위로 나가 파구되기 때문에 이법적(理法的)으로 문제가 된다. 또 건좌손향을 하면 묘지보다 훨씬 낮은 산을 안산으로 해야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는다. 추측이지만 손방(巽方)에 주산이나 청룡 백호 협이봉(夾耳峰)과 같은 높이의 귀한 봉우리가 있으므로 그곳을 안산으로 취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렇게 되면 물은 을진파(乙辰破)로 우수도좌(右水倒左)하여 팔실팔향법(八十八向法)으로 길한 자생향(自生向)이 되기 때문이다. 전설대로 나옹대사가 소점(所點) 해준 자리라면 그 정도의 좌향법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후에 후손들이 봉분을 수리하고 크게 하면서 봉분의 좌향이 틀어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묘지 아래 계곡에 내려오면 내청룡 내백호가 서로 교차한곳에 물이 서로 합수(合水)하여 내파구(內破口)가 형성된 것을 볼 수 있다. 이곳의 방위가 혈에서 보았을 때 진(辰) 방위다. 대부분 혈지는 내파구와 외파구가 같은 방향인데 여기서는 다르다. 이럴 경우 혈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물은 혈에서 제일 가까운 물이기 때문에 내파를 우선하고 외파는 다음에 고려해야 한다. 외파구(外破口)는 좌측에서 득수한 물이 우측으로 나가는 손(巽) 방위다. 내파와 외파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다면 더욱 좋은 향이 되는데 여기서는 내파만 만족시키는 곳이다. 물 가운데에 마치 거북이 같은 바위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형상을 하고 있다. 물가에 문설주처럼 바위가 서있는 것을 한문( 門)이라 하고, 물 가운데 있는 바위를 화표(華表)라 하는데 화표 가운데서도 거북이나 잉어처럼 특이한 형상의 바위를 북신(北辰)이라 한다. 수구처에 이와 같은 바위가 있으면 보국 안에 있는 물의 속도와 양을 조정하여 수기가 충분하게 용혈과 음양교합을 할 수 있도록 조정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렇기 때문에 이러한 수구사가 있으면 그 보국 안에는 혈이 결지할 수 있다는 예측을 할 수 있으므로 혈을 찾을 때 혈의 증거 즉 혈증(穴證)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산촌마을은 풍계서원이 있을 정도로 오랜 전통을 자랑함에도 젊은 사람들은 모두 도회지로 나가고 마을에는 노인들만 살고 있었다. 노인마저 돌아가신 집은 빈집으로 남아 폐허가 되고 있는데 우리 농촌이 무너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사방을 순한 산들이 감싸주고 있고 그 안에 형성된 명당은 평탄 원만하여 아늑하기 그지없이 평화스럽기만 한 마을이다. 수 백리를 행룡(行龍)해온 용들이 마지막 기운을 모아 마을 곳곳에 혈을 결지하였는데 풍계서원을 비롯하여 서너 집은 양택지로 아주 좋은 집이었다. 여건만 된다면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잠시 내일 회사 일이 걱정된다. 일요일에 답사를 한다고 전국의 산하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치열한 생존경쟁의 서울 일을 잠시 잊는다. 자연의 품안에 안겨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취미를 가졌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취미가 사치가 되지 않도록 사업을 보다 열심히 해야겠다.

산촌마을을 떠나면서 황희 정승 조부 묘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이곳이 한국최고의 명당"이라는 책에서 저자인 최명우 선생은 마치 한 마리 기러기가 맞은 편에서 부는 바람의 양력을 이용하여 날개 짓을 하며 한가롭게 끼륵끼륵 울면서 날아가는 형국이라고 표현하였다. 이름하여 명홍조풍혈(鳴鴻遭風穴)이라 했는데 너무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감탄을 하고있었다. 그러자 한문학(漢文學)을 전공한 유영봉씨는 한술 더 떠서 주변의 논밭 고랑이 잔잔한 물결 같다며 기러기가 마치 물결이 이는 바다 위를 한가롭게 날아가는 모습 같다고 한다. 그의 표현력에 모두 탄성을 자아냈다. 유영봉씨는 팔도풍수지리사랑회 김종우 회장과 죽마고우(竹馬故友)로 대학과 대학원에서 한문학을 전공했다. 내가 어렵게 구한 옛 풍수서(風水書)를 해석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을 때 간단하게 해석을 해 준 분이다. 옛 풍수서 중에는 활자본도 있지만 필사(筆寫)로 되어 있는 것이 많다. 특히 유산록(遊山錄) 같은 경우는 한문을 약자로 쓰기 때문에 웬만한 실력으로는 읽을 수조차 없는 것이 많은데 항상 명쾌한 답을 주었다.

팔도풍수지리사랑회에는 풍수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우리민족의 전통사상인 풍수가 좋아서 전국적으로 모인 사람들이다. 박사와 교수부터 나처럼 장사하는 사람까지 직업들도 제 각각이다. 우리는 풍수를 통해서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살아있는 역사를 배운다. 그리고 이 땅에 때어나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다시 땅으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안다. 과거를 알지 못하고는 현재 나의 위치를 알 수 없듯이 우리는 묘지와 생가 답사를 통하여 이 땅에 살다간 수많은 인물들을 만난다. 그들의 공과(功過)를 접어두고 오늘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할 수 있도록 한 시대를 이어주신 분들이다. 우리도 언젠가 저들처럼 땅속에 들어가 후손들에게 왜 너희들이 존재하는지를 알려줄 것이다. 그때 그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해줄까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면서도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