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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이야기해남 윤씨 윤선도 묘와 고택 녹우당(綠雨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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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윤씨 윤선도 묘와 고택 녹우당(綠雨堂)

해남 윤씨는 고려 중엽 때 사람인 윤재부(尹在富)를 시조로 하고 있는데, 시조 이후 7세조까지는 휘(諱,이름)자만 전해올 뿐 출생지와 거주지 또 묘소에 관한 사실을 알 수 없다. 고려말 공민왕 때 사온직장(司 直長), 명동정(沒正)을 지낸 8세조 윤광전(尹光琠)부터 기록이 이어지고 있다. 윤광전의 대 이래로 전남 강진 일대가 해남 윤씨의 세장지지(世葬之地)로 지켜왔던 점으로 미루어 이 무렵부터 그곳에 터를 잡아 세거(世居)해온 것이다. 그러다가 고산 윤선도의 고조부인 12세조인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이 강진에서 해남으로 옮겨 거주하게 된 후부터 해남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해남과 이웃인 강진에서 살았는데 당대의 거부인 해남의 정호장(鄭戶長)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그의 전 재산을 물려받고 일약 거부가 됐다. 그는 많은 재산을 털어 난민을 구휼하고 세금을 대납하여 죄인을 방면케 하는 이른바 개옥문(開獄門)을 세 차례나 하여 적선지가(積善之家)란 칭송을 듣게 되었다. 이때부터 비로소 해남윤씨의 기틀이 굳혀졌고 관향(貫鄕)도 해남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의 아들 윤구(尹衢)는 홍문관 교리를 지냈으며 기묘사화 때 삭직 유배되었으나 후에 복관되었고, 윤구의 아들 윤의중(尹毅中)은 윤선도의 조부로 명종3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가 대사헌과 예조판서를 거쳐 좌찬성 등을 역임하여 해남 윤씨를 중앙무대에서 명가의 반열로 올려놓은 인물이 되었다. 고산 윤선도는 윤의중의 큰아들 윤유심(尹唯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종가(宗家)인 큰할아버지 윤홍중(尹弘中)은 외아들 유기만 두었는데, 유기가 아들이 없자 윤선도가 당숙에게 양자로 들어가 해남 윤씨의 종손(宗孫)이 되었다.

고산은 해남 윤씨 가문의 유복한 집안에서 선조20년(1587년)에 태어나 11세에 산사에 들어가 공부를 했으며 17세 때인 광해군4년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다. 특히 그는 이때부터 시재(詩才)가 뛰어나 따라 잡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생은 짧은 벼슬살이와 긴 유배, 그리고 귀향, 은둔의 연속이었다. 그가 서른 살이 된 해인 광해군8년(1616년) 당시 조정의 정사를 전횡하던 이이첨 일파의 죄상을 보다 못해 그를 엄중히 꾸짖고 벌하라는 이른바 병진소를 격렬한 글귀로 올리게 된다. 결국 이이첨의 권세에 밀려 고산은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가게 된다. 인조반정으로 고산은 정치적 입지가 살아나서 뒤에 효종 임금이 되는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된다. 효종은 즉위 후 어린 시절의 사부였던 윤선도를 위해 수원에 집을 지어 주었다. 1660년 효종이 죽자 윤선도는 고향 해남으로 내려오면서 수원의 집 일부를 뜯어 옮겨왔다. 그것이 지금의 녹우당 사랑채다. 지금은 해남윤씨 종가 전체를 통틀어 녹우당이라고 부르지만 원래는 그 사랑채 이름이 녹우당(綠雨堂)이었다. 녹우당이란 집 뒤 산자락에 우거진 비자 숲이 바람에 흔들릴 때 쏴하며 푸른 비가 내리는 듯 하다고 하여 이름 붙였다고 한다. 연동 마을 뒤 덕음산 자락의 비자림은 500년 가량 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뒷산의 바위가 드러나면 마을이 가난해진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이 잘 간수해왔다. 녹우당 현판 글씨는 성호 이익의 이복형인 이서가 썼다.

인조14년(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해남 집에 있던 윤선도는 피난해 있는 세자를 돕기 위해 집안 사람들과 노복 수백 명을 데리고 강화로 향했는데 도중에 강화가 함락되었고 뒤이어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서인이 권세를 잡고 있던 시절에 남인의 한사람으로서 유배와 좌천, 파직 등을 경험했던 윤선도는 임금이 항복하는 치욕적인 소식을 듣자 세상 꼴이 싫어졌다. 그래서 세상을 떠나 제주도에서 여생을 마치려고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상록수가 우거진 아름다운 섬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섬에 오른 윤선도는 산수에 반해 제주도까지 갈 것 없이 그 섬에 터를 잡아 버렸다. 섬의 산세가 마치 피어나는 연꽃을 닮았다 하여 부용동이라 이름지었고 섬의 주봉인 격자봉(425m) 밑에 낙서재를 지어 거처를 마련했다. 그후 윤선도는 예조참의, 중추부첨지사, 동부승지 등 벼슬을 하고 또 두어 차례 귀양을 가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결국 현종12년(1671년) 85세로 낙서재에서 삶을 마치었다. 그가 당쟁으로 시끄러운 세상과 멀리하고 자신의 낙원에서 안빈낙도하면서 마음껏 풍류를 누리는 가운데 `어부사시사`등 국문학 사상 빛나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 어부사시사는 고기배의 출항에서 귀선까지의 어부 생활을 춘하추동 사계절마다 10수식 모두 40수로 노래한 작품이다. 한시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도덕성을 강조한 창의성이 부족한 것이라고는 하나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어부의 소박한 생활을 우리말로 훌륭하게 그려 낸 작품이다.

고산의 출현으로 크게 빛을 낸 해남 윤씨는 고산의 증손자인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가 다시 한번 예술의 천재를 꽃 피운다.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과 겸재(謙齋) 정선(鄭善)과 함께 조선의 삼재(三齋)라 일컬어지는 윤두서는 절묘한 사생을 기초로 한 힘찬 필력으로 인물, 동물화에 특히 뛰어났다. 그의 자화상은 조선시대의 수많은 초상화중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혀 국보 제240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조 중기 이후 인물로는 병조참의를 지낸 윤효관, 윤규범, 이조참판을 지낸 윤대유, 동지중추부사에 오른 윤도일, 사간원정언을 지낸 윤서유,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윤석삼, 절충장군에 오른 윤종익 등이 있으나 아주 고관에까지 현달한 인물은 없었다. 윤두서의 손녀가 바로 다산 정약용의 어머니다. 다산은 강진에 유배 생활을 하면서 외가인 해남 윤씨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다산 초당은 본래 귤동 마을에 터잡고 살던 해남윤씨 집안의 산정(山亭)이었으며 다산이 유배 생활 중 500여권의 책을 저술할 수 있었던 것은 외가의 수많은 장서를 가져다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호남 지방에서 명문으로 이름 높은 해남 윤씨 가문이 오늘날까지 유명한 것은 고산 윤선도 묘 때문이라고 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윤선도의 묘는 본래 고모부인 이의신이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로 잡은 자리였다. 이의신은 상지관으로 광해군 때 교하천도설을 주장한 사람이다. 그는 선조의 첫 왕비인 의인왕후의 능을 소점하는 등 당시의 명풍수로 이름이 높았다. 윤선도와 이의신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녹우당에서 같이 지낼 때 일이다. 밤만 되면 이의신은 나귀를 타고 밖으로 나갔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를 의아하게 생각했던 윤선도가 물어도 이의신은 빙그레 웃기만 할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윤선도는 틀림없이 묘 자리를 구하러 나가는 거라고 생각하고 하루는 술을 취하게 권한 뒤 곯아떨어지게 하였다. 고모부가 깊게 잠든 것을 확인한 윤선도는 이의신이 항상 타고 다니던 나귀에 올라 채찍을 휘둘렀다. 나귀는 밤이면 그 주인이 매일처럼 다녀오는 길을 따라 내달렸다. 나귀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더니만 어느 산중턱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윤선도가 주변을 살펴보니 나귀 똥이 많이 널려있고 담배를 피운 흔적이 있어 이의신이 이곳에 온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주변 지세를 살펴보니 천하 대 명당이었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급히 가묘를 만들어 신표를 해놓고 집으로 돌아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시치미를 떼고 잠을 잤다. 다음날 이의신에게 "고모부 제가 저의 신후지지를 하나 잡아 놓았는데 좀 보아주십시오."하고 능청을 떨며 말하였다. 혼쾌이 승낙한 이의신이 윤선도가 인도하는 곳으로 가보니 자기가 잡아놓은 바로 그 자리였다. 그는 모든 것을 알았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웃고 "역시 명당은 주인이 따로 있는 법이로구나."하면서 좌향을 바로 잡아 주었다고 한다.


고산 윤선도 묘를 찾아가기란 쉽지 않다. 2000년 9월 17일 인터넷을 통하여 공부하는 사람들끼리 지방 첫 답사로 전남 지역을 선정한 것은 전설로 유명한 고산의 묘를 보기 위해서다. 일요일 새벽 서울을 출발하여 나주 임제 묘와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탄생지 성기동을 둘러보고 해남에 도착한 것은 오후였다. 해남의 산세는 매우 순하고 안정되어 있어 평화스럽기만 했다. 천리길인 서울을 당일 다시 올라가야 함에도 누구하나 조급함이 없이 마치 서울 근교에 온 듯한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해남에서 완도로 이어지는 13번 도로를 타고 화산면을 지나 장고개를 넘으면 구시리가 나온다. 9일만에 장이 선다고 구시리라고 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만안리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구시 저수지 상류에 있는 학생의 집을 지나면 원천동, 구터 마을로 들어가는 시멘트 포장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계곡을 타고 계속 들어가면 마지막 마을인 구터다. 여기서부터는 비포장 산길이다. 윤선도가 소박한 산중 생활을 하면서 한가한 정서를 읊은 `산중별곡`과 `산중속신곡`의 배경이 된 금쇄동이 바로 이곳이다. 길은 계곡을 끼고 계속 산을 돌아 올라가는데 지프차가 아닌 승용차로 가는 것은 쉽지 않다. 비좁은 산길을 따라 한참을 가면 계곡이 끝나는 지점에 약간 넓은 공터가 나오는데 여기서 차를 멈추고 좌측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신도비가 있고 그 위에 묘가 있다. 산길에는 안내 표시가 없기 때문에 주의를 하지 않으면 자칫 차를 타고 산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다.

이곳의 산수는 산태극 수태극의 전형이다. 태조산인 영암 월출산(808.7m)에서 남하한 산맥이 중조산인 해남의 명산 두류산(760m)을 만든다. 두류산에서 출발한 주룡은 북서쪽으로 올라가 백도치를 넘고,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꾼 다음 고산 윤선도 묘의 소조산인 병풍산(313.1m)를 기봉한다. 병풍산에서 출맥한 주룡은 원을 그리듯 행룡하여 360도로 회전한 다음 자신이 나온 주산을 바라보고 탐랑 목성체인 현무봉을 만든다. 현무봉 면(面)에서 출맥한 주룡 역시 자기가 달려온 산을 바라보고 혈을 맺었다. 마치 달팽이 껍질이 뱅뱅 돌다가 맨 끝 지점에 혈을 맺은 거와 같은 모습이다. 혈 좌측에서 나온 물은 주룡과 반대 방향인 좌선으로 원을 그리며 돌아 구시 저수지 쪽으로 흐른다. 지도를 보거나 그림을 그려놓고 보면 틀림없는 태극의 형상이다. 윤선도 묘는 회룡고조혈(回龍顧祖穴)이고 물형에 비유하자면 뱀이 똬리를 틀고 그 가운데에 머리를 숨기고 있는 모습이므로 형국(形局)은 반룡은산혈(蟠龍隱山穴)이라 할 수 있다.

내청룡은 현무봉에서 개장한 작은 능선이나 외청룡은 주룡이다. 백호는 현무봉을 기봉하고 남은 여기가 회전력에 의해서 계속 돌아 완벽하게 혈을 감싸주고 있는 큰 능선이다. 형세적으로는 거대한 주룡의 생기가 어느 곳 하나 빠져나갈 수 없는 천하대명당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무봉에서 혈까지 내려온 입수룡(入首龍)은 큰 변화를 하지 않아 기세를 느낄 수가 없었다. 입수도두 역시 크고 넓지만 기를 단단하게 뭉치지는 못했다. 혈은 전체적으로 크고 넉넉한 느낌이지만 야무지거나 강한 힘이 느껴지는 곳은 아니다. 아마도 해남 윤씨들이 정치가나 고관대작보다는 예술가나 학자 등이 많이 배출된 이유가 이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은 좌수도우(左水倒右)하여 병오(丙午) 방위로 파구(破口)되므로 사좌해향(巳坐亥向)을 하여 팔십 팔향법으로 문고소수(文庫消水)향을 하였다. 문고소수 향법은 혈 앞을 지나는 물이 좌측에서 득수하여 우측으로 돌아나가는데 물 나가는 파구 방위가 동서남북인 갑묘(甲卯), 경유(庚酉), 병오(丙午), 임자(壬子)일 때 놓는 향이다. 우선룡(右旋龍)에 좌선수(左旋水)가 합법이고, 용진혈적(龍眞穴的)에 문고소수 향은 이른바 `녹존유진(祿存流盡)이면 패금어(佩金魚)`라 하여 필시 총명한 수재가 나와 문장과 예술로서 명성을 날리고 부귀를 다한다는 좋은 향이다.

늦은 시간 고산의 고택인 녹우당에 도착했다. 녹우당은 전라남도에 남아있는 민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곳으로 사적 제167호로 지정되어 있다. 유물관에는 윤선도와 윤두서에 관련한 보물급 관련 자료들이 많아 오후 6시 이후에는 출입을 금하고 있었다. 관리자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잠시라도 관람을 요청했지만 보안상 어쩔 수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할 수 없이 고택 뒤에 있는 고산 증조부 어초은 윤효정 선생의 묘만 둘러보았다. 오늘의 해남 윤씨 가문을 명문으로 만든 분인데 초계정씨부인(草溪鄭氏夫人)과 나란히 쌍묘로 되어 있다. 마치 병풍을 두른 것 같은 덕음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묘는 좌측 부인의 묘가 진혈처다. 덕음산 한가운데 중출로 내려온 용맥이 기세있게 그곳으로 들어갔고 어초은 선생 묘는 용맥이 비켜간 듯 하다. 주산은 병풍을 두른 듯 뒤를 받쳐주고 좌청룡 우백호는 혈을 포근하게 감싸주고, 안산과 조산이 조응을 하니 으뜸 보국(保局)을 이루는 곳이다. 사방에는 문필봉을 비롯한 귀한 사격들이 빙 둘러 서있다. 녹우당 앞 들판은 평탄 원만하면서도 넓고 일대의 모든 물들이 이곳으로 모이니 많은 재산이 쌓이는 명당이다. 해남 윤씨의 발복은 초계정씨부인 묘에서 한 것 같았다. 날이 어두워져 더 이상 자세한 것을 볼 수가 없어 서울로 향했지만 녹우당 터를 만든 용맥이 이 묘 아래에서 내려간 것인지, 좌측에서 나온 맥인지, 아니면 두 맥이 합쳐져 쌍룡입수(雙龍入首)한 것인지를 확인하지 못해 못내 아쉬웠다. 다음에 다시 한번 이곳을 답사하리라 마음먹었다. 이번 답사에 여러 가지로 수고 해주신 광주 양창모씨에게 특별히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