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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이야기조선왕조의 뿌리 삼척 준경(濬慶) 묘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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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뿌리 삼척 준경(濬慶) 묘 가는 길

2002년 5월 19일.
`팔도풍수지리사랑회`가 탄생하고 한 달에 한번씩 지방 답사를 다녔지만 영동지방은 이번이 처음이다. 여러 회원들의 건의가 있었지만 일요일 당일치기로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어서다. 일요일이면 영동고속도로가 주차장을 방불케 막힌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가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해도 영동지방 답사를 머뭇거린 이유는 버스 기사에게 미안하기 때문이다. 예산상 충분한 대절료를 주지 못하면서 아침 일찍 출발하여 밤12시가 넘어서야 도착할 것이 뻔한 곳을 가자고 할 수가 없었다. 버스 기사는 다음날도 쉬지 못하고 아침 일찍 장거리를 운행해야하는 직업이다. 특히 우리의 답사 코스는 한곳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곳을 계속 돌아다녀야 하므로 피곤이 배가된다. 길도 좁은 산길과 비포장 길을 수시로 다녀야 하기 때문에 웬만한 기사들은 다시 오지 않으려고 한다. 다행히 우리의 답사 목적을 이해하는 그린랜드(GREEN LAND)관광 김영만 기사님(연락처 017-258-0894)을 만나게 된 것은 행운이다.
지난번 답사 때 영동지방을 가보았으면 좋겠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내 마음을 읽었는지 걱정말고 코스를 잡으라고 한다. 그러면서 얼마 전 전주이씨대종회(全州李氏大宗會) 문중 사람들을 데리고 그들의 선조인 삼척 이양무(李陽茂) 준경(濬慶) 묘를 다녀왔다며 안내서까지 나에게 주었다. 전주이씨 문중에서는 매년 4월20일 준경묘와 영경묘를 참례하여 제향(祭享)을 올린다고 한다.
이번 강릉과 삼척 답사는 강릉대학교 사회교육원에서 풍수지리학 강의를 하시는 조웅연 전 인제고등학교 교장선생님께서 안내를 해주시기로 했다.
새벽에 집을 나서면서 차안의 라디오를 켜자 영동지방에 폭우가 내린다는 일기예보가 나온다. 2000년 4월 팔도풍수지리사랑회 첫 답사를 시작으로 2년이 넘게 한번도 빠지지 않고 매월 두 차례씩 답사를 해왔지만 비를 만난 적은 없었다. 우리가 출발할 때는 비가와도 답사지에 도착하면 신기하게도 비가 그쳐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비가 온다고 해도 걱정을 않는다. 전국 팔도에서 기센 사람들만 모이다보니 비가 오다가도 멈춘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오늘도 틀림없이 우리가 도착하면 비가 그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오늘이 사월 초파일 석가탄신일인데도 예상보다 도로가 혼잡하질 않다. 제법 빠른 속도로 우리를 태운 버스는 영동고속도로를 달린다. 대관령을 지날 때쯤 옆자리에 앉았던 유영봉 교수가 왕복 4차선으로 보수, 완공된 고속도로를 보면서 빨라서 좋기는 하지만 그래도 옛 고속도로가 운치가 있었다며 아쉬워했다. 이제는 험한 고갯길을 모두 터널로 관통하기 때문에 대관령고개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동해바다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유영봉 교수는 한문학을 전공한 문학박사다. 어느덧 차안의 마이크를 잡더니 강릉이 배출한 불세출의 여류시인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허난설헌의 동생 허균, 그리고 금오신화로 유명한 김시습에 대해서 이야기 해준다. 답사 때마다 들려주는 그의 문학 이야기는 어느 대학 강단에서도 들을 수 없는 명강으로 우리 답사의 백미(白眉)다. 강릉을 굽어보이는 곳에서 그는 신사임당이 강릉을 떠나 서울로 향하면서 대관령에서 친정을 바라보고 지었다던 시를 소개했다. 다음은 유영봉 교수의 답사기 `백두대간 아래의 강릉과 삼척`에 있는 내용이다.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

자친학발재임영(慈親鶴髮在臨瀛)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신향장안독거정(身向長安獨去情) 외로이 서울로 향하는 마음
회수북촌시일망(回首北村時一望) 고개 돌려 이따금 북촌을 바라보니
백운비하모산청(白雲飛下暮山靑) 흰 구름 나는 곳에 저녁 산만 푸르다.

`臨瀛(임영)`은 큰 바다에 임한 곳이란 뜻인데, 예로부터 강릉을 지칭하는 고호(古號)이다. `北村(북촌)`은 당연히 친정 오죽헌이 있는 강릉 북쪽의 오늘날 죽헌동을 가리킨다.
고개턱에서 아픈 다리를 잠시 쉬며, 고향에 홀로 남은 늙으신 어머니를 그리는 사임당의 마음이 애절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그 마음은 다시 「사친(思親)」이란 작품으로 번졌는데, 그리운 고향 강릉의 경치가 손에 잡힐 듯하다.


천리가산만첩봉(千里家山萬疊峰) 천리 길 내 고향은 저 산 너머이니
귀심장재몽혼중(歸心長在夢魂中) 꿈속에도 언제나 돌아가고픈 마음

한송정반고륜월(寒松亭畔孤輪月) 한송정 가에 외로이 뜬 달
경포대전일진풍(鏡浦臺前一陣風) 경포대 앞에는 한줄기 바람

사상백구항취산(沙上白鷗恒聚散) 모래톱에 흰 갈매기 모였다가 흩어지고
해문어정임서동(海門漁艇任選) 바다 위에 고깃배는 동으로 서로 흐를텐데

해문어정임서동(海門漁艇任選) 어느 때나 강릉길 다시 밟아가
갱착반의슬하봉(更着班衣膝下縫) 색동옷 입고 부모님 슬하에서 바느질할꼬?


강릉 톨게이트 입구에는 안내를 해주시기로 한 조웅연 교장선생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항상 넉넉한 인품이신 교장선생님을 뵈면 초등학교 시절 유난히 학생들을 사랑했던 은사님이 생각난다. 교장선생님께서는 버스에 오르시면서 바로 전까지만 해도 비가 많이 왔는데 날씨가 금방 게였다며 참 신기한 일이라고 하셨다. 우리는 마지막 코스로 잡았던 강릉김씨 시조 명주군왕 김주원(金周元) 묘와 초계정씨 강릉 입향조 선무랑 정기평 묘를 먼저 답사하였다. 강릉톨게이트에서 가깝기 때문이다. 한시간 예정을 했는데 두시간을 넘었다. 서둘러 삼척 준경 묘로 향했다. 서울에서 삼척으로 내려가는 길은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강릉 톨게이트를 나오면 우측으로 동해고속도로와 바로 연결된다.


시간이 지체되었지만 바다를 구경하고 싶다는 여성 회원들의 요청이 있자 김 기사님은 친절하게 모전에서 7번 국도로 들어섰다. 부산에서 북한의 나진까지 이어지는 7번 국도는 청정한 동해바다의 수려한 경관을 구경할 수 있는 환상의 드라이브코스다.
강릉에서 약20분 거리인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에는 1996년 9월 25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동해안에 침투했다가 발견된 북한 잠수함과 4,000톤급 해군 함정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조금만 더 가면 그 유명한 정동진이다. 본래는 마을 한가운데 고성산(高城産)이 있어서 고성동이라고 했다가 조선 개국 후 궁궐이 있는 한양(漢陽)에서 정동쪽에 있는 바닷가란 뜻에서 정동진이라 이름한 곳이다. 정동진은 한반도의 동해안 중심이며 전국 제일의 해돋이 명소다.
영동선(부산-강릉) 철도의 간이역에 불과했던 곳이 어느 날 특히 여성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가 된 것은 암울한 80년대의 시대상을 그려냈던 `모래시계`란 드라마 때문이다. 운동권 출신 여주인공 역을 맡은 고현정이 정보원에게 잡히기 직전 소나무에 몸을 기대고 있던 장면 하나가 이곳을 유명하게 만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드라마 속의 고현정처럼 소나무에 기대어 사진을 찍어 `고현정 소나무`라는 이름이 붙었고 드라마 제목처럼 커다란 모레시계도 있다.
젊은 연인들뿐만 아니라 중년의 관광객들도 많은 이곳을 보면서 나는 가열찬 거리 투쟁을 했던 80년대 학창 시절을 돌이켜 보았다. 군부독재 하에서 민주화를 위해 젊은 열정을 받쳤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는 독재와 싸움에서 결국 승리하여 오늘의 민주화를 이루어낸 386(이제는 486)세대다. 메케한 취류탄 가스 속을 뚫고 함성을 외쳤던 1987년 6월의 거리가 2002년 6월에는 월드컵 4강 진출이라는 승리와 환희로 가득 찬 거리로 변했다. 모래시계 세대로 통하는 우리들의 15년 전 민주화투쟁이 없었다면 오늘날 저런 열정이 가능했을까.
글을 쓰면서 잠시 타임머신을 탄 듯한 착각에서 벗어나자 버스는 어느덧 망상 해수욕장을 지나 동해에 이르렀다.

동해에서 계속 7번 국도를 타고 내려가면 진천교를 지나 태백 가는 38번 도로와 갈린다. 38번 도로를 따라 가면 삼척시 미로면소재지를 지나자 우측에 `영경묘 입구`라는 안내판이 나왔다. 초행자들은 준경묘와 영경묘가 같이 있는 줄 알고 여기서 우회전하기 쉽다. 이를 지나쳐 조금만 더 가면 `준경묘`라는 안내판이 다시 나오므로 주의해야 한다.
준경묘 안내판을 보고 우회전하여 철길 아래를 지나 약1.5km를 더가자 활기리 상촌 마을이다. 활기리(活耆里)라는 지명은 본래 황제가 나왔다는 황터 곧 황기(皇基)가 변한 것이라 한다. 여기다 차를 주차하고 우리는 늦은 점심을 먹었다. 개천에 흐르는 물이 얼마나 맑은지 유교수와 나는 금세 소주 한 병을 마셨다. 그러나 취하지가 않았다.
여기서부터는 약1.8km, 30분 정도 걸리는 산행을 해야한다. 개울을 건너 시멘트포장이 된 길이지만 상당히 가파르기 때문에 쉽지 않은 길이다. 하지만 이채주씨의 7살 된 딸 나영이가 거뜬하게 올라갔으므로 미리부터 겁먹을 필요는 없다. 지도를 놓고 보면 준경 묘는 백두대간 한 가운데에 있다. 해발 400m 정도 되는 산을 30분만에 오른다면 비교적 편한 등산코스라 할 것이다. 그것도 한국에서는 가장 아름답다는 소나무 숲길이므로 삼림욕으로는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

준경 묘 입구에 이르면 쭉쭉 뻗은 소나무들이 자태를 자랑하는데 그 중에서도 철책을 두르고 안내판이 있는 소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일직선으로 32m를 곧장 뻗은 암소나무였다. 둘레가 2.1m인 이 소나무는 한국 제일의 미송(美松)으로 소나무의 혈통 보존을 위해서 10여 년간 연구와 엄격한 심사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형질이 우수하고 아름다운 소나무로 선발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2001년 5월 8일 산림청장의 주례로 충북 보은군 내속리산 상판리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103호인 정이품송(正二品松)을 신랑으로 맞아 준경묘역에서 세계 최초의 소나무 전통혼례식을 가졌다고 한다. 보은군수가 신랑 혼주, 삼척시장이 신부 혼주가 되고 많은 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이 거행되어 한국기네스북에까지 올랐다는 안내판이 적혀있다.

신부 소나무가 있는 곳 길 아래를 보면 계곡이다. 그런데 계곡이 지현자(之玄字)로 구불구불 할 뿐만 아니라 곳곳에 한문( 門)이 되는 바위들이 있었다. 한문이란 수구(水口)의 양쪽 물가에 산이나 바위가 마주보고 서있는 것을 말한다. 수구(水口)가 대궐의 출입문이라면 한문( 門)은 양쪽 문기둥 즉 문설주와 같은 것이다. 수구를 사이에 두고 청룡 끝 능선과 백호 끝 능선에 붙은 바위가 한문( 門)이다. 그래서 수구처에 한문이 있다면 청룡과 백호가 잘 감싸준 보국(保局)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또 보국 안의 물이 빠르게 밖으로 나가지 못하므로 수구 안에는 백세부귀(百世富貴)가 기약되는 대혈이 있다는 증거도 된다.
수구처는 한문( 門)이나 화표(華表), 북신(北辰), 나성(羅星) 등이 있어 조각배 하나 지날 수 없이 간격이 좁아야 좋다. 이를 "불능통주(不能通舟)해야 한다"라는 표현을 쓴다. 더구나 가파르게 올라온 산 중턱에 이러한 수구사(水口砂)가 있으니 준경(濬慶) 묘는 분명 대지(大地)일 것이라는 예측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바위들이 깨끗하지 못하고 조금 험하고 거친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청룡이 감싸준 산모퉁이를 돌자 더덕냄새가 향기롭게 풍기면서 나타난 준경 묘의 전경(全景)은 감탄을 자아냈다. 마치 천신만고 끝에 찾아온 무릉도원 같았다. 산 아래에서 이곳에 올라올 때는 가파른 곳이라 숨을 헐떡였는데 시원하게 펼쳐진 국세를 보니 신선함이 느껴진다. 구름이 산에 걸릴 것 같은 백두대간 중턱에 이렇게 넓고 평탄하고 원만하며 아늑한 분지(盆地)가 있다니... 누가 이러한 산 중턱에 들판이 있을 거라고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꼭 풍수지리를 따지지 않더라도 누가 보아도 명당이다. 오늘 처음 답사에 참석한 사람들도 와! 하고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누군가 오늘 참석하지 않은 사람은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모두들 수긍하는 표정이다.


보국 명당에는 상당히 큰 연못이 길 양쪽에 있다. 지형으로 보아 본래는 하나였는데 길을 내면서 양쪽으로 갈린 것 같다. 연못에는 5월 단오에 머리를 감는다는 창포(菖蒲)가 푸르게 있었다. 또 알에서 깨어난 올챙이들이 창포사이를 헤엄치고 있는데 물이 너무 맑고 시원했다. 이를 천지수(天池水)라 한다. 주룡과 용맥을 보호하면서 따라온 원진수(元辰水)와 호종수(護從水)가 혈 앞에서 합수(合水)하여 만들어낸 연못이다. 용맥과 수세는 비례한다. 용이 크면 물도 크고 용이 작으면 물도 작다. 산 정상 분지에 이렇게 맑고 깊은 연못을 만들 정도면 준경 묘의 용맥은 대단한 기세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곳의 연못은 사계절 마르지도 넘치지도 않고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고 있으니 귀수(貴水) 중에서도 백미(白眉)다. 화복을 따진다면 극귀국부(極貴國富)를 상징하니 제왕지지(帝王之地)나 장상지지(將相之地)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높은 산 정상 부근에 혈을 맺는 것을 천교혈(天巧穴)이라 한다. 하늘의 천궁(天宮)같다는 뜻이다. 산 아래에서 바라보면 높고 높은 산 위에 자리잡고 있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지만 막상 올라오면 판국이 넓고 국세가 넓은 공간이 있다. 또 밑에서 보면 산이 높고 험하지만 위에 올라오면 순하고 아담하여 마치 평지에 있는 느낌을 준다. 주변 산들은 성곽을 두른 것처럼 감싸주고 혈 앞에는 천지수가 있어야 제대로 된 천교혈이다. 천교혈은 그 역량이 대단히 커서 상격룡(上格龍)은 군왕지지(君王之地)고 중격룡(中格龍)은 장상지지(將相之地)가 된다. 하격룡(下格龍)은 천교혈을 감히 맺을 수 없다.

연못을 지나 홍살문에 들어서면 제실 좌측으로 샘물이 있다.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물로 마른 목을 축이니 물맛이 달고 시원하다. 이것이 대혈 명당에만 있다는 진응수(眞應水)다. 진응수란 혈(穴) 앞이나 옆에 있는 샘물로 용맥의 생기를 보호하면서 따라온 수기(水氣)가 혈장의 입수도두(入首倒頭) 뒤에서 분수(分水)했다가 혈장 앞에서 합수(合水)하면서 지상(地上)으로 분출한 물이다.
생기는 물에 의해서 가두어지고 멈추어 진다. 혈장을 감싸 생기가 융취(融聚)하도록 하고도 그 기운이 남아 샘을 만들었으니 진응수가 있으면 진결대지(眞結大地)의 증거가 된다. 그런데 여기는 이곳말고도 바로 위 그러니까 혈장 아래에도 진응수가 또 있다. 뚜껑을 덮어놓았는데 열어보니 맑은 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곳에 진응수(眞應水)를 소리나게 진흥수(振興水)라고 누군가 한문으로 적어 놓았다. 하나만 있어도 귀하다는 진응수가 두 곳이나 상하로 있으니 용과 혈이 얼마나 큰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진응수를 보고 혈장으로 오르면서 보니 용맥의 끝 하수사(下水砂)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감아주고 있다. 이는 용의 3가지 결지방법 즉 결인속기법, 태식잉육법, 좌우선룡법 중에서 우선룡법으로 혈을 결지했다는 뜻이다. 태조산에서부터 수 천리를 행룡해 온 용이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기를 머무르도록 하기 위한 현상이다.
혈장 주변을 살펴보니 귀하고 단단한 요석들이 순전과 선익사 사이를 빙 둘러 박혀있다. 이 역시 혈장을 지탱하기 위한 것으로 용혈의 기세가 강한 곳에서만 있다.
혈장이 혈의 생기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혈 뒤에는 입수도두, 좌우에는 선익, 앞에는 순전이 있어야 한다. 이것들은 대부분 단단한 흙으로 이루어지지만 용의 기세가 강할 때는 흙으로만 부족하기 때문에 단단한 돌이 박힌다. 요석이 있으면 매우 귀한 혈이라는 증거다. 더구나 묘 뒤를 둥그렇게 점을 찍듯 박혀있으니 이를 어병사(御屛砂)라고도 한다. 어좌(御座) 뒤에 친 병풍을 뜻하니 제왕지지(帝王之地)를 나타내는 요석이라 할 수 있다.

둥글고 단단하게 뭉친 혈장에 제대로 자리잡은 준경 묘에 큰절을 올렸다. 대개 다른 곳에서는 간단한 묵념으로 예를 표하는데 이곳에서만은 큰절을 올리고 싶었다. 조선왕들의 선조라는 점 때문이 아니고 대혈(大穴)에 대한 경외심(敬畏心)이 절로 나왔기 때문이다. 회원들은 하나둘씩 묘 뒤로 가서 앉기 시작했다. 이른바 입수도두파(?)들이다.
혈 뒤 입수도두는 수 천리를 행룡 해온 주룡의 기운이 마지막으로 뭉친 곳이다. 환골탈퇴한 순수한 생기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에 느낌이 단단하면서도 부드럽다. 답사 때마다 건축사인 박정해 경기지부장과 샤프전자 대표인 임수현 고문은 서로 입수도두 한 가운데 앉으려고 선착순 자리다툼을 한다. 명당의 지기(地氣)를 온 몸에 받기 위해서다. 처음에 다른 회원들은 관심이 없었는데 점차 많은 사람들이 좋은 혈을 보면 두 사람을 따라 입수도두에 앉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끼리 농담으로 붙인 이름이 입수도두파(入首倒頭派)들이다.
확실히 이곳에 앉아있으면 편안하여 일어나기가 싫다. 우리는 이곳에 약30분이 넘도록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에 텐트 치고 이곳에서 아이를 만들어야겠다는 말도 나왔다. 이곳을 방문한 다른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우리를 살폈다. 그러나 어떤 회원이 이야기를 해주었는지 나중에 떠날 때 보니 모두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제 용을 살필 차례다. 혈은 용맥을 통하여 생기를 전달받기 때문에 주룡의 크기에 의해서 혈의 대소(大小)가 결정된다. 용은 작은데 혈이 클 수 없으며 용이 큰데 혈이 작을 수 없는 것이 자연의 조화이고 법칙이다. 준경 묘의 혈이 큰 만큼 주룡도 클 것이라는 기대를 했지만 이처럼 장대하고 힘이 강하게 느껴지는 용맥은 보기 힘들었다. 용맥 어디에도 다른 곳으로 기운이 설기되는 잔 능선이 없다. 주산의 모든 힘이 하나도 누설되지 않고 그대로 혈에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용맥은 마치 매끄러운 홍두깨처럼 생겼다. 용맥 좌우에 있는 청룡 백호 산들은 적당한 높이로 균형을 유지하면서 보호를 해주고 있다.
이곳 주산이 어떤 산인가. 바로 우나나라 산맥의 척추인 백두대간이다.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을 출발한 대간룡이 남하하여 금강산, 진부령, 설악산, 한계령, 오대산, 대관령, 고루포기산, 석병산, 청옥산, 두타산을 거쳐 태백으로 내려간다.
준경 묘의 조종산인 두타산(1352m)을 거친 백두대간이 댓재에서 과협한 다음 처음 기봉한 산에서 동쪽으로 개장(開帳)한 가운데 천심(穿心)한 맥이 바로 이곳의 주룡이다. 멀고 높이 보이는 주산은 천마봉(天馬峰)처럼 생겼다. 생동감 넘치는 용맥을 따라 올라가자면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적당한 곳에서 다시 내려오면서 주변을 살피니 아름답기가 그지없었고 주변에는 키 큰 소나무가 반듯하게 솟아 있었다. 아마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서 나오는 목조(穆租) 이안사(李安社)가 이곳에서 나무를 하다가 도승이 동자 승에게 하는 말을 엿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맥을 구경하고 묘지로 내려오자 아직껏 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그렇게 보아서인지 화색이 넘쳐 보였다. "너무 기를 받으면 오늘밤 기를 주체할 수 없을 텐데 어디다 쓸 겁니까?"라고 농담을 건네자 모두 박장대소하고 웃었다.
다시 보아도 좋다는 말 밖에는 안나왔다. 산 중턱에 넓은 명당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고 혈장 아래 왼쪽에는 야트막한 요성(腰星)이 혈판을 잘 감아주고 있었다. 풍수지리에서 귀하다는 것들은 모두 갖춘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러나 아무리 천하 명당이라도 완벽한 것은 없는 법이니 여기에도 흠은 있다. 우선 청룡 백호 끝에 있는 산이 혈에 비해 너무 높았다. 비록 잘 생긴 귀인봉으로 수구를 단단하게 막아주는 역할을 하지만 너무 높다보니 이곳을 능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청룡보다는 백호가 그랬다. 그래서 조선 왕조가 장남보다는 차남, 남자들보다는 여인네들이 강했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두 번째로는 앞산이 너무 높다보니 특별하게 안산을 취할만한 것이 없다는 점이다. 안산은 혈에서 보아 적당한 높이로 편안하게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했다.
이곳의 파구(破口)와 좌향(坐向)을 재보니 갑파(甲破)가 분명한데 유좌묘향(酉坐卯向)을 하였다. 그러다 보니 백호 끝 봉우리 중턱을 바로 보는 향이 되어 뭔가 균형이 맞지 않는 느낌이다. 물론 우측에서 좌측으로 흐르는 물을 보면 팔십 팔향법으로 길향인 태향태류(胎向胎流)가 된다.
그렇지만 안산을 청룡과 백호 사이에 있는 산을 보고 향을 잡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뚜렷하게 생기지는 않았지만 산이 높아 보이지 않고 이 보국(保局)의 전후좌우 균형을 이룰 수 있는 곳이다. 또 파구 왼쪽에 있으므로 장대수(長大水)인 왼쪽 물을 의지한 신좌을향(辛坐乙向)에 해당된다. 갑파(甲破)에 좌수도우(左水倒右)하고 신좌을향(辛坐乙向)이면 부귀총명(富貴聰明)하다는 문고소수(文庫消水)향이다.
몇 가지 흠이 있지만 이것은 전체적인 국세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하다. 내가 여태 것 본 혈 중에서 최고로 좋은 곳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이곳을 뽑겠다.

제왕은 하늘이 낸다고 하였다. 또 대혈은 천장지비(天藏地秘)하고 있다가 그에 합당한 사람에게만 모습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유명한 자리에는 그에 따른 전설과 설화가 많이 있듯이 이곳도 조선왕조 건국과 관련된 유명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전주이씨(全州李氏) 시조(1세) 이한(李翰)은 전주의 첫 이름인 완산(完山) 건지산(乾止山) 아래에 살았고 신라 사공(司空) 벼슬을 지냈다. 지금도 전주시 덕진동 건지산에는 조경단(肇慶壇)이라는 시조 묘가 있다.
그로부터 17세 양무(陽茂)까지 전주의 호족세력으로 살아왔다. 2세 자연(自延)은 시중(侍中), 3세 천상(天祥)은 복야(僕射), 4세 광희(光禧)는 아간(阿干), 5세 입전(立全)은 사도(司徒), 6세 긍휴(兢休)는 사공(司空), 7세 염순(廉順)은 호장(戶長), 8세 승삭(承朔)은 생원호장(生員戶長), 9세 충경(充慶)은 생원(生員), 10세 경영(景英)은 생원호장(生員戶長), 11세 충민(忠敏)은 장사(長史), 12세 화(華)는 추밀원사(樞密院使), 13세 진유(珍有)는 생원호장(生員戶長), 14세 궁진(宮進)은 한림(翰林), 15세 용부(勇夫)는 대장군(大將軍), 16세 인(璘)은 내시집주(內侍執奏)란 벼슬을 지냈다.
그리고 준경(濬慶) 묘의 주인공 17세 양무(陽茂)는 무예가 뛰어나 장군(將軍)을 지냈다. 그는 부인 이씨(李氏)와의 사이에 이안사(李安社), 이영필(李英弼), 이영밀(李英謐), 이영습(李英襲) 등 4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안사는 후에 추존된 목조대왕이 되고, 넷째 이영습은 주부동정(主簿同正) 벼슬을 해 `전주이씨 주부동정공파`의 파조(派祖)가 된다.

18세 이안사는 호걸풍으로 전주 관기(官妓) 하나를 총애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주사(知州事)가 전주 고을 안렴사로 부임하는 산성별감(山城別監)을 접대하기 위해서 그 관기를 수청들게 하였다. 평소 지주사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안사는 대노(大怒)하였다. 많은 기생들 중에서 왜 하필이면 자신이 총애하는 기생을 수청들게 하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크게 싸웠다.
그러자 지주사는 안렴사와 의논하여 역적으로 음해하기 시작했다. 그 구실은 전주이씨 3세 천상(天祥)의 묘가 기린산(麒麟山) 왕자봉 밑에 있는데 후손 중에 왕이 나올 자리라는 소문과 이(李)씨가 왕이 된다는 목자왕기설(木子王氣說)이었다. 이는 역적으로 몰기 위한 것으로 고려 조정에까지 알려지면 임금을 모독한 죄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피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이안사는 병든 아버지를 업고 모든 식솔들을 거느리고 밤을 틈타 머나먼 강원도 삼척으로 도망을 쳤다. 이때 이안사를 따르는 가구수가 180여 가구라고 했으니 인원수로는 1,000명이 넘는 대집단이었다.

삼척시 미로면 활기동에서 자리를 잡고 산지 1년 만에 아버지(이양무) 상(喪)을 당하였다. 이안사는 아버지 묘 자리를 구하려고 이산 저산 산등성이를 넘어 사방으로 헤매고 돌아다녔다. 그러나 마땅한 자리를 구하기 어려웠다. 마침 활기리 노동(盧洞) 산마루에 이르러 몹시 고단하여 나무 밑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이때 한 도승이 동자승과 함께 나타나 주위를 두루 살펴 인적이 없음을 확인한 뒤 한 곳을 가리키면서 "대지(大地)로다 길지(吉地)로다"하는 것이었다. 이안사가 나무 밑에 앉아 지켜보고 있는 것을 모르는 도승은 동자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었다.
"이곳이 제대로 발복하려면 개토제(開土祭)에 소 백(百)마리를 잡아서 제사를 지내야 하고, 관을 금으로 만든 것을 싸서 장사를 지내야 한다. 그러면 5대손 안에 왕자가 출생하여 기울어 가는 이 나라를 바로 잡고 창업 주가 될 것이다. 또한 이 땅은 천하의 명당이니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 하는 것이었다. 동자승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더 있다가 그들은 다른 곳으로 길을 떠났다.

자신의 귀를 의심한 이안사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생각에 골몰하였으나 가난한 살림살이에 소 백 마리를 어디서 구하며, 금으로 만든 관은 더욱이 어디서도 구할 수가 없었다. 부친의 묏자리를 명당에 쓰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지만 형편상 어쩔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안사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궁여지책을 찾아내게 되었다. 그렇다! 손바닥을 친 이안사는 소 백(百) 마리는 흰소(白牛) 한(一) 마리로 대신하고 금관은 귀리 짚이 황금색이니 이것으로 대신하면 될 것 같았다. 마침 처가에 흰 얼룩소가 있었는데, 흰 소를 한자로 쓰면 백우(白牛)이므로 숫자상 일백 백자와 발음이 통하게 되어 백우(百牛)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다음날 아침 처가에 간 이안사는 밭갈이 할 일이 있는데 흰 소를 잠시만 빌려 달라고 하여 소를 끌고 노동(盧洞) 산마루로 올라갔다. 그리고 양심의 가책을 무릅쓰고 소를 잡아서 제물로 사용하였다. 부친을 넣을 관은 귀리짚으로 대신하였다. 같은 황금색이므로 금관과 의미가 통하기 때문이다.

부친의 묏자리를 잡은 이안사는 삼척에서 자리를 차츰 잡고 살았다. 그런데 자신과 갈등이 있었던 전주 지주사가 관동안렴사(關東按廉使)로 부임하여 삼척으로 순시를 나온다는 말을 전해 듣게 되었다. 그에게 발각되는 날이면 죽음을 면치 못하므로 다시 짐을 꾸려 일족(一族)을 거느리고 함길도(지금의 함경도) 덕원군 용주리로 도피하였다. 무예가 뛰어난 그는 여진족의 천호(千戶) 벼슬을 하면서 차차 그 지방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이안사(安社, 목조)의 아들 이행리(行里, 익조)와 손자 이춘(椿, 도조)이 대대로 원나라 관리를 지냈으며 춘의 아들 이자춘(子春, 환조)은 원의 총관부 쌍성의 천호로 있으면서 공민왕의 반원정책을 도왔다.
이자춘의 아들 성계는 1335년 화령부(지금의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났다. 이자춘과 최한기의 딸 최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담대했으며 특히 궁술에 뛰어났다. 이성계는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전쟁을 시작으로 1388년 위화도회군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을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맹장이었다. 이 혁혁한 전공에 힘입어 그는 고려 조정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성계는 1362년 쌍성총관부를 재탈환하기 위해 침입한 나하추 부대를 격퇴시키면서 장수로서의 능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그리고 1388년 이성계는 위화도회군을 강행하여 고려 정권을 완전히 장악한 다음 1392년 조선을 건국하여 왕에 올랐다. 도승의 예언대로 백우금관(百牛金冠)으로 이양무 묘를 쓰고 나서 5대 162년만에 조선조 창업의 태조(太祖)가 된 것이다.
태조 이성계는 삼척군을 목조 이안사의 외향(外鄕)이며 선대 묘가 안치된 곳이라 하여 군(郡)에서 부(府)로 승격시키고 홍서대(紅犀帶)를 하사하였다. 그러나 목조인 이안사가 함경도로 이주하고 오랜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실묘(失墓)를 하였다. 태조를 비롯한 태종•세종 등 역대 왕들이 선조(先祖)인 이양무 묘소를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고 한다. 결국 묘를 찾기는 했으나 그 진위(眞僞)가 분명치 않아 고심하다가 고종 때에야 이곳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준경(濬慶)이라는 묘호(廟號)를 내렸다.
이 곳에서 4km 떨어진 삼척시 미로면 하사전리 산5번지에는 이양무(李陽茂)의 부인인 평창 이씨의 영경묘(永慶墓)가 있다. 이씨 부인은 부군과 함께 전라도 전주에 거주하였으나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로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별세하였다. 이곳도 혈이기는 하나 준경 묘와 비교할 만한 자리는 아니다.

기분 좋은 답사를 마치고 다음 목적지인 강릉 선교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열람 시간이 끝났다. 준경 묘에서 너무 오래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이날 강릉 경포대에서 본 백두대간으로 넘어가는 일몰은 장엄하였다. 그리고 강릉 순두부국도 일품이었다. 예상대로 서울에 도착한 시간은 12시가 넘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