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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이야기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서울 定都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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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서울 定都 논의

도선 풍수에서 이론 풍수로의 전환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서울 전도 과정에서의 사례

필 자 : 최 창 조
정리발표자 : 정 경 연


1. 서언

필자는 자생 풍수가 완전히 괴멸상태에 이른 것이 조선 성종 때부터라고 생각한다. 그 괴멸의 조짐은 고려 후기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특히 조선이 개국하여 그 수도를 새로운 터에 찾는 과정에서는 자생 풍수에서 중국 수입 풍수로의 이행이 모식적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는 것이 이 절의 의도다.
이 글은 1993년 발표한 글(풍수, 그 삶의 자리 생명의 자리/ 푸른나무/ 338~378쪽)을 다시 정리하여 재 수록하였다.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한양 천도과정에서 자생풍수와 중국풍수의 대립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이 상당수 나타나기 때문이다. 둘째는 1994년 서울대 국사학과 이태진 교수가 『한양천도가 풍수설에 의한 것이 아니라 풍수설을 부정하는 유학사상에 입각하여 이루어진 것이며 만약 그 당시 지관들의 풍수지리설에 따랐다면 도읍은 한양이 아니라 모악이나 개경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주장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정사인 『실록』기록만 보더라도 한양천도는 명백히 풍수설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정도 600년을 맞아 왜 서울이 수도로 결정되었고, 그 과정은 어떠했는지에 대한 다양한 연구물들이 나왔다. 그러나 제일 확실한 것은 정사(正史) 중심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 이유에서 이 자료는 철저히 『실록』의 기록 내용에만 전적으로 의지하였다.


2. 초기의 상황

태조실록에 나타난 천도과정을 분석하였다. 1392년 7월17일 태조가 즉위하고 한 달도 못되어 8월13일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한양으로 이도(移都)할 것을 교시한다. 즉위 직후의 그 혼란한 와중에 심지어 나라 이름조차 정하지 못한 마당에 급히 한양천도를 서둔 것이다.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건설한 태조의 입장에서는 민습수습이라든가 국정쇄신 측면에서 천도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기가 너무 촉박하다.
태조는 고려의 장군으로서 전국 곳곳을 직접 다녀본 사람으로 풍수와 도참(圖讖)을 상당한 깊이로 믿었다. 고려 말부터 떠돌던 개경 지기쇠패설(地氣衰敗說)과 한양에서 이씨 기운이 살아난다는 도참을 믿었기 때문에 망국의 땅인 개경을 하루라도 빨리 피하고 싶었다. 즉위하자마자 한양으로 이도(移都)할 것을 교시한 것은 이 때문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조선의 수도 후보지로 제일 먼저 꼽혔던 곳은 세상에 흔히 알려진 것처럼 계룡산 신도안이 아니라 한양이라는 점이다.
9월30일 태조는 서운관(書雲觀) 관리에게 종묘를 세울 터를 묻는다. 그러자 관리가 말하기를 성내는 길지가 없고 고려조의 종묘가 있던 곳이 좋은 자리라고 대답한다. 이에 태조가 <망한 나라의 옛터를 어찌 다시 쓰겠는가> 하니, 판중추부사 남은(南誾)이 <옛 궁궐을 헐어버리고 땅을 파내어 새로운 종묘를 다시 짓는다면 안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태조는 <그렇다면 전 왕조가 있는 마을의 소나무들을 베지 말라>고 하교하였다.
여기서 태조는 망국의 옛터를 쓸 수 없다는 자신의 견해를 강력히 편다. 이는 수도를 옮겨야겠다는 뜻이 담겨있다. 그런데 남은 등 조정중신들 대부분은 옛터에 종묘를 다시 짓더라도 개경에서 수도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들은 "옛터를 다시 쓰지 말라"는 풍수원리를 왜곡하면서까지 개경에 머물기를 바랐던 것이다.
발표자의 생각으로는 개경을 기반으로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살아온 그들이었기 때문에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 의도라고 본다. 태조를 옹립한 세력들은 따지고 보면 구 고려왕조의 신하들이었고 개경에서 부귀영화를 부렸던 자들이다. 비록 시류에 의해서 조선왕조 건립에 참여하고 태조를 추종했다하더라도 더 이상의 변화로 그들의 편안한 삶의 터전을 잃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태조의 입장에서는 이들의 세력 기반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 방법 중에서 가장 좋은 방법이 천도였다. 천도를 하여 조정과 민심을 혁신시켜야 그가 의도하는 새로운 정치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정 대신들은 자신이 혁신대상이 되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천도를 달가워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어쨌든 조선초기의 정도 문제는 왕권(王權)과 신권(臣權) 사이의 주도권 다툼으로 이해하고 싶다. 천도를 추진하고 반대하는 논리를 펴는데 풍수지리를 이용한 것이다. 풍수이론의 진위 여부 논쟁보다는 서로 자신에게 유리한 논리를 찾았다. 때문에 필자(최창조)가 전제한 자생풍수와 중국풍수의 대립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으로 보인다.
천도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태조는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쳐 반년 가까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천도를 명했으나 아직 때가 이르지 않음을 알고 시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중신들이 왜 천도를 반대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태조에게 반가운 사람이 나타났다. 태조2년(1393년) 1월7일 전라도 완산부 진동현으로 태실을 살피러갔던 권중화가 돌아오는 길에 계룡산을 둘러보고 도읍지로 적지라며 ''산수형세도''와 ''계룡산 도읍지도''를 그려 바쳤다. 임금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권중화 나름대로의 충성이었다.
태조는 이를 빌미로 기다렸다는 듯이 1월19일 정월의 찬바람 속에서 친히 계룡산 지세를 살피러 떠났다. 이때 안종원, 김사형, 이지란, 남은 등이 따라갔다. 1월21일 회암사를 지나면서 왕사 자초(무학대사)에게 합류할 것을 청하여 같이 갔다. 권중화의 보고를 받고 불과 12일만에 지방 행차를 하였으니 왕의 행차치고는 매우 서두른 것이다. 이는 태조가 얼마만큼 천도를 갈망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개경을 떠난 지 20일 만인 2월8일 계룡산에 도착하였다. 돌아갈 때 15일 정도 걸린 것에 비하면 좀 오래 걸렸다고 볼 수 있다. 도착 다음날부터 도읍의 입지 타당성 조사에 들어갔다. 조운(漕運)의 편리여부, 수로와 육로의 장단점, 성곽을 축조할 지세 등을 살피게 하였다. 2월10일 권중화가 새 도읍의 종묘, 사직, 궁전, 조시(朝市)를 만들 지세지도를 바치자 서운관 관리와 풍수학인 이양달, 배상충 등에게 살펴보게 하였다. 태조는 2월11일 새 도읍 예정지의 중심인 높은 둔덕에 올라가 지세를 두루 살피고 왕사 자초에게 물었다. 그러자 무학은 모호하게 <능히 알 수 없다(不能知)>라고 대답하였다. 추측컨대 이심전심으로 태조와 마음이 통하는 무학은 비록 계룡산 신도안이 좋은 지세를 가졌다 할지라도 태조가 생각하는 새 도읍은 한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모호한 입장을 취했을 것이다.
2월13일 계룡산을 떠나면서 동지중추(同知中樞) 박영충, 전(前) 밀직(密直) 최칠석을 그곳에 남겨두고 새 도읍의 건설을 감독하게 하였다.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벼슬도 높지 않을 뿐더러 태조가 깊이 신임하는 인물들도 아니다. 이로써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태조가 천도에 대한 생각은 확고했으나 계룡산을 크게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아마도 중신들에게 자신의 천도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편법을 쓴 것 같다. 만약 한양을 반대한다면 그보다 더 멀리 있는 신도안으로라도 천도를 할 것이다. 제신(諸臣)들 입장에서는 그래도 한양이 더 나을 것이니 한양천도에 대해서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라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제스처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항간에 알려진 것처럼 계룡산 신도안이 정말 서울이 될 수 있었던 터는 아니었다고 본다. 그 증거로 태조가 개성으로 돌아갈 때는 매우 빠른 속도로 이동하였고, 3월8일 한 달도 안되어 새 도읍을 건설하는 백성들을 놓아 보냈다는 점이다. 계룡산 신도안 공사를 시작한 것은 태조의 천도 의지를 나타낸 것이고, 중간(9월4일)에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안렴사를 보낸 것은 자신의 천도 의지가 변치 않았다는 것을 가끔씩 보여주기 위한 제스처였다.


3. 계룡 신도 공사 정파(停罷)와 모악의 대두

태조는 12월11일 대장군 심효생을 보내어 새 도읍 공사를 중지하게 하였다. 경기도관찰사 하륜의 상소를 명분으로 삼아서다. 3월에 공사가 시작되었으니까 약10개월 만이다. 공사라고 해보아야 주춧돌을 놓은 것이 전부였다.
하륜은 <도읍이란 의당 나라의 중앙에 위치해야 하는 것인데, 계룡산은 그 터가 국토의 남쪽에 치우쳐있어 동, 서, 북면과는 서로 떨어져 있다. 신은 일찍이 아버지를 장사 지내면서 풍수 관련 여러 서적을 조금 열람한 바가 있는데, 듣자오니 계룡산 땅이란 것이 산은 건방(乾方)에서 오고 물은 손방(巽方)으로 흘러가는, 송나라 호순신이 말한 소위 ''수파장생 쇠패입지(水破長生 衰敗立地)''에 해당되므로, 도읍을 건설하는데 적합하지 아니합니다.>
일찍이 전국 곳곳에서 왜구들과 전투를 수 차례 수행한 경험이 있고, 대륙에서 원명(元明)이 교체되는 국제적 환경에 대해서도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태조가 계룡산 신도안 같은 내륙 깊숙한 분지에 도읍을 정하고 안주하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중부지방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어째든 태조는 하륜의 상소를 계기로 조정에 천도 논의를 이끌어내는데 성공을 하였다. 태조3년 2월 애초 태조의 의도대로 새로운 도읍지 물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천도는 기정 사실화되었다.
태조3년(1394) 2월14일 권중화(영삼사사), 이무방(문하시중), 정도전(판삼사사), 성석린(찬성사), 민재(대제학), 남은(참찬문하부사), 정총(중추원사), 권근(대학사), 이직(중추원학사), 이근(대사헌) 등 10인에게 명하여 하륜과 함께 역대 여러 현인들의 비록(秘錄)을 상고하여 요점을 추려서 바치게 하였다. 하륜은 태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작업에 임하였다. 그리고 권중화가 바친 『비록촬요』를 태조에게 설명하였다. 이때 모악(母岳)이라는 지명이 나온 것 같다. 모악을 처음 거론한 사람이 누구인지 왜 모악을 거론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2월18일 좌시중 조준과 영삼사사 권중화 등 11인들로 하여금 서운관 관원을 데리고 『지리비록촬요』를 가지고 가서 천도할 땅 모악 남쪽 땅을 살펴보게 하였다. 2월23일 권중화, 조준 등이 모악으로부터 돌아와 모악의 남쪽 땅은 좁아서 천도할 수 없다고 하였다. 오직 하륜만이 홀로 주장하기를 <모악 명당이 얼마쯤 좁은 것 같아 보이지만 개성의 강안전(康安殿)이나 평양의 장락궁(長樂宮)에 비하면 오히려 조금 넓은 편이고, 당시 유행하던 중국 지리법에 부합한다>고 주장하여 뜻을 굽히지 않았다. 태조의 뜻을 알고 있던 하륜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모악이 좁다고 반대를 한 것이다.
필자(최창조)는 여기서 모악의 명당이 그리 좁은 땅이 아니라며 이는 개성을 떠나기 싫은 중신들이 명분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발표자는 모악(현재의 연세대학교와 신촌 일대)은 한 나라의 도읍지가 될만한 국세는 아니라고 보고있다. 또 실록에 중국풍수가 언급되었다하여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중국풍수가 유입되어 자생풍수(도선풍수라고도 함)가 밀리기 시작했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하륜의 모악천도론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그의 이론대로라면 자생풍수가 승리한 것이지 밀린 것이 아니다.
어째든 태조는 모악에 대한 중신들의 평가가 어긋나자 태조3년(1394) 7월12일 ''음양산정도감''을 설치하여 풍수에 관한 여러 책을 모아 참고하여 교정케 하였다. 지리라는 학문이 사람마다 각기 자기 의견을 내세워 어느 것이 참말이며 어느 것이 거짓인지 분별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를 정리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모악을 살펴본 후 결정하기로 하였다.


4. 모악의 포기와 한양의 등장

태조3년 8월11일 태조가 모악에 이르러 도읍을 정할 땅을 몰색하는데 서운관사(書雲觀事) 윤신달과 서운관부정(書雲觀副正) 유한우 등이 <지리의 법으로 볼 때 이곳은 도읍이 될 수 없는 곳입니다>라며 모악이 도읍지가 될 수 없음을 강변한다. 태조는 짜증을 냈다. <너희들이 함부로 옮거니 그르거니 하는데, 여기가 만일 좋지 못한 점이 있다면 본래 문헌에 있던 것을 상고하여 말해보아라. 이곳이 그렇게 좋지 않다면 어디가 좋다는 말이냐?>하고 물었다. 유한우는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태조는 분노하여 말하였다. <네가 서운관의 관원인데 모른다고 하니 누구를 속이려는 것이냐? 송도의 지기가 쇠했다는 말을 듣지도 못했단 말이냐?> 하였지만 유한우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것은 도참으로 말한 바이며 신은 단지 지리만 배워서 도참은 모릅니다.> 태조가 다시 말하기를 <옛사람의 도참도 역시 지리로 인해서 말한 것이지 어찌 터무니없는 근거 없는 말을 했겠느냐. 그러면 너의 마음에 쓸만한 곳을 말해보아라.> 유한우가 대답하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개경의 지덕이 아직 쇠하지 않은 듯하니, 궁궐을 다시 짓고 그대로 개경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태조의 본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서운관들은 천도를 반대하는 중신들의 생각은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떻게 보면 태조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얘기까지 서슴지 않는다. 태조로서는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모악 밑에서 하루 밤을 잔 태조는 다음날 무학대사를 불러 다시 의논해 보았으나 쉽게 결정이 나지 않았다. 결국 태조는 삼국시대 도읍지 중에서라도 물색해 서신으로 보고하라고 지시를 한다. 이에 최융, 윤신달, 유한우 등 서운관 들은 상서를 올려 아뢰기를 <우리나라 안에서는 개경이 첫째요, 남경이 다음입니다>라고 하였다. 아마도 태조는 개경의 지기쇠퇴설과 한양의 목자득국(木子得國)설의 도참을 믿고 한양천도를 바란 것이 본심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역성혁명을 일으킨 자신의 정당성을 하늘로부터 부여받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태조가 한양을 염두에 두었음에도 계룡산과 모악을 먼저 거론함으로서 천도에 대한 반대 여론을 그곳으로 한정시키려는 고도의 정치성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정총, 정도전, 성석린 등이 모악의 단점을 국세가 좁고, 주산이 낮고, 물길이 닫혀있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반대하자 태종은 이일은 개성으로 돌아가 점을 쳐서 결정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경복궁쪽에 위치한 남경으로 행차하였다. 남경의 옛터를 살피던 태조는 윤신달 등에게 <여기가 어떠냐?>고 물었다. 윤신달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에서 개성이 제일 좋고 이곳이 그 다음 가지만, 다만 건방인 서북쪽이 낮아서 물이 고갈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소리를 들은 태조는 기뻐서 <개경인들 어찌 부족한 점이 없겠는가. 이제 이곳의 형세를 보니 왕도가 될만한 땅이다. 더욱이 조운하는 배가 통하고 도리(사방에 들어선 마을의 숫자)도 균정하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다.> 하였다. 또 왕사 자초에게도 물었다. <어떻소?> 자초가 대답하였다. <여기 한양은 사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만 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다라서 결정하소서.> 태조가 여러 재상들에게 분부하여 의논하게 하니 모두 말하기를 <꼭 도읍을 옮기려면 이곳이 좋겠습니다>하였다. 다만 하륜만 홀로 말하기를 <산세는 비록 볼만한 것 같으나 지리법으로 말하면 좋지 않습니다>하였다. 하륜을 제외한 대신들 모두가 찬성하자 태조3년(1394) 8월24일 공식적으로 상하의 합의 아래 한양이 수도로 결정되었다.
계룡산과 모악에 대해서는 장시간 논쟁이 벌어졌지만 한양에 대해서는 별다른 논의가 없이 싱겁게 결정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아마도 중신들이 계룡산과 모악의 천도 논의에서 태조의 뜻이 완강함을 인식하고 그 뜻을 거스르지 않기로 작정을 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태조의 완벽한 정치력의 승리라 할 수 있다.
9월1일 새로운 도읍을 건설할 실무기관인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하고, 9월9일 종묘, 사직, 궁궐, 시장, 도로 등의 터를 정하도록 했다. 참으로 빠른 결정이고 일 추진력이었다. 한양으로 천도한다는 결정이 있은 후 두 달만인 1394년 10월25일 개성을 출발하여 10월28일 한양으로 서울을 옮겼다. 옛 한양부의 객사를 이궁(離宮)으로 삼았다.
이처럼 속전속결로 태조가 천도를 강행한 것은, 첫째 개경 지기쇠퇴설과 한양 목자득국설과 같은 풍수도참사상을 신앙처럼 믿고 있었다는 증거다. 둘째 수도를 천도해야 만이 그가 원하는 새로운 정치를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셋째 자신이 천도를 하지 못하면 후대에는 더욱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넷째 천도를 결정하고도 지체하면 반대 여론이 다시 일어 실패로 돌아갈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5. 한양천도, 개경환도, 한양 재천도

태조3년(1394) 11월2일 태조는 도평의사사와 서운관 원리(員吏)들을 인솔하고 종묘와 사직의 터를 살피었다. 종묘(宗廟)는 역대의 왕과 왕비 및 추존(追尊)된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신 왕가의 사당으로 영녕전(永寧殿)에는 추존조(追尊祖)인 4왕(목조•익조•탁조•환조)을 정중앙에 모시고 있다. 사직(社稷)은 국토의 신(神)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백성의 복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궁궐은 국가의 존엄을 보이고 정령(政令)을 내는 곳이다. 성곽(城郭)은 안팎을 엄하게 하고 나라를 굳게 지키는 것이다. 다라서 나라를 세웠으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종묘사직과 궁궐, 성곽을 건설하는 일이다.
11월3일 황천후토신(皇天后土神)에게 새 서울 건설에 착수함을 알리는 고사를 지내고 기공식을 가졌다. 종묘사직단과 궁궐인 경복궁은 태조4년(1395) 9월29일 한날 한시에 준공되었다. 이 두 공사를 도맡아서 해낸 책임자는 심덕부였다. 태조는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위를 새 종묘로 옮겨 모시고 그로부터 3개월 뒤 12월28일 새 궁궐에 들었다. 동시에 공사를 마쳤는데도 먼저 궁궐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폭풍우로 동쪽 행랑46간이 쓰러졌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승려들을 동원하여 10여 개월만에 궁궐공사를 끝냈으니 아무리 서둘렀다하더라도 대단한 기술력과 노동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태조의 추진력을 알만 하다.
이렇듯 큰 축복 속에 창건된 경복궁이었으나 3년이 못 가서 큰 홍역을 치르게 된다. 태조7년(1398)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것이다. 이방원이 세자 방석과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을 제거한 것이다. 태조는 아들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정종은 즉위를 하였지만 한양의 경복궁이 불안하기만 하였다. 태조의 노여움이 가시지 않았고 자연 이변이 자꾸 일어났다. 서운관에서는 불길한 징후가 있으므로 임시라도 천도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를 하였다. 개성에는 궁궐이 그대로 있고 군신들의 저택이 그대로 남아 있었으므로 일단 다시 천도를 하기로 했다. 정종1년(1399) 3월7일 한양을 떠나 개성으로 천도를 하였다. 그러나 정종2년(1400) 왕위를 탐한 방간이 난을 일으켰으니 제2차 왕자의 난이다. 정종은 11월 방원에게 양위를 한다.
태종은 태상왕인 태조가 그토록 바라는 한양으로 천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창궁에 불이 나는 등 천변지괴가 자주 일어나 개성으로 천도한지 6년7개월 만인 태종5년(1405) 10월8일 송도를 떠나 다시 한양으로 재천도를 했다.


6. 결론

이 글에서 필자(최창조)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주장을 제시하였다.
첫째, 계룡산 천도설은 그곳이 무슨 대단한 길지이기 때문에 발탁된 것처럼 전해지고 있으나 사실은 태조가 천도를 기정 사실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었을 뿐이다.
둘째, 태조는 처음부터 서울 혹은 그 인근지역을 자신의 수도로 점찍어두고 있었다. 그는 서울과 그 인근 지역에 관하여 상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셋째, 태조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릎 쓰고 천도를 고집한 것은 풍수도참 사상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행했던 이씨 한양 득국설을 믿었다.
넷째, 중신들은 풍수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편의만 생각하여 천도를 반대했다. 뚜렷한 반대 명분이 있다기보다 자신들의 입장과 태조에 대한 눈치보기 사이에서 왔다갔다했다. 그들이 내세운 풍수다운 풍수는 ''수파장생 쇠패립지''정도의 이론뿐이다.
끝으로, 중신들의 줏대 없이 눈치나 살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일이다. 임금의 경우 그릇의 크기에 따라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진취적인 태조와 태종은 한양천도를 강력히 추진하였고, 정종은 감상에 젖어 옛 왕조의 회고를 개성에서 읊조리고 있던 형편이었다.
풍수사상은 그런 사람들의 뜻을 펴기 위한 혹은 감추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땅의 이치가 아니라 사람의 일이란 것이 한양 전도의 예에서 잘 드러난다.


7. 발표자의 소감

필자는 서울대 국사학과 이태진 교수의 한양천도는 풍수설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해 실록을 근거로 명백히 풍수설에 의한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이 반박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필자 자신도 결론에서 언급했듯이 조선초기 천도과정에서 풍수다운 풍수로 논쟁을 찾아볼 수 없었음에도 이를 계기로 자생풍수(도선풍수)가 이론풍수(중국풍수)로 전환되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 하겠다.
필자는 실록에 중국풍수라는 단어 하나가 언급되었다하여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중국풍수가 유입되어 자생풍수가 밀리기 시작했다고 해석하고 있다. 마치 그때 당시에 자생풍수와 이론풍수가 대립하면서 구분이 있었던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땅을 보는 시각이 다르고 여러 상반된 풍수이론들이 존재하기는 하였지만 자생풍수 이론풍수의 구분은 없었다. 자생풍수라는 단어는 최근 필자가 만들어 낸 말이다.
한국풍수지리가 체계를 갖춘 것은 나말여초 당나라에 유학하고 귀국한 선종계통의 승려를 통해서다. 당시 당에서 유행하던 풍수설이 그들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으며 우리의 사상으로 혹은 술법으로 토착화되었다. 이론풍수와 자생풍수를 굳이 구별하자면 그때를 기준으로 해서 해야한다. 이미 우리생활에 널리 사용되어 일반화 된 것을 구분하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중국 사람이 책의 저자라 해서 그것이 중국풍수라 할 수는 없다. 그 책을 우리나라 사람이 읽고 실용화하면 한국풍수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불교를 석가모니가 인도사람이니까 인도불교라고 우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조선초기 천도와 관련된 논쟁은 중국풍수와 자생풍수로의 논쟁이 아니라 땅을 어떻게 해석하고 보느냐의 문제였다. 그것을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이용했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