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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이야기조선 예학의 거두 광산 김씨 사계 김장생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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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예학의 거두 광산 김씨 사계 김장생 묘

조선 예학(禮學)의 거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묘는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있다. 호남고속도로 서대전 인터체인지에서 4번 국도 논산 방향으로 가다보면 1번 국도와 만나게 되는데 계속 논산 쪽으로 가면 연산리를 지나 좌측으로 "사계 선생 유적지 입구"라는 푯말이 나온다. 그 아래쪽으로 난 농로 길을 따라 곧장 내려가면 고정리가 나오고, 우측으로는 좌의정을 했던 김국광 선생 묘를 비롯한 광산 김씨 선영과 양천 허씨 정려가 보인다. 사계 선생 묘는 계속 길을 따라 가면 마을을 지나 고정산 자락에 있다.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달성 서씨(達成 徐氏), 연안 이씨(延安 李氏)와 함께 조선 3대 명문에 속한다. 그 중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가문이 광산 김씨다. 이들 문중(門中)에서도 달성 서씨는 약봉(藥峰) 서성(徐 )의 가문, 연안 이씨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가문, 그리고 광산 김씨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가문을 명문(名門)으로 꼽는다. 광산 김씨의 시조는 김흥광(金興光)으로 신라의 왕자였다고 한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고 나라가 혼란해지자 난리를 피해 가족을 데리고 지금의 광주인 무진주(武珍州) 서일동(현 담양군 평장동)으로 피난을 하여 터를 잡고 자연을 벗삼아 살았다. 그후 고려 태조가 그를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하자후손들이 광산(光山)을 본관으로 삼았다.

광산 김씨를 흔히 광김(光金)이라고도 하는데 세도가 당당했던 집안이라기보다는 대대로 석학(碩學), 거유(巨儒)를 많이 배출한 집안으로 알아준다. 성리학의 대가인 사계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金集)은 유학(儒學)의 시작이자 끝이라 할 수 있는 예학(禮學)을 집대성한 대학자로 사후에 해동18현(海東18賢)에 추앙되어 공자를 모신 사당인 문묘(文廟)에 배향되는 영예를 얻었다. 해동 18현이란 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를 말하는데 우리 나라 역사상 학문과 도덕이 깊어 온 백성이 나라의 스승으로 우러러 받드는 명현(名賢)들이다. 문묘 배향은 일문 일대만이 아니라 대대손손의 영광이자 자랑이었다. 더욱이 문묘에 배향된 18현 중 한 가문에서 2명이 배향되기는 은진 송씨(恩津 宋氏)의 송시열, 송준길과 광산 김씨(光山 金氏)뿐인데 부자가 나란히 배향되기는 김장생, 김집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또 송시열과 송준길은 모두 김장생이 키워낸 수제자들인데 부자와 사제가 모두 문묘에 배향(配享)되어 사계 선생의 학문과 도덕이 얼마나 큰가를 짐작할 수 있다.

김흥광이 서일동에 터를 잡은 후 고려 때 그의 후손들 8명이 평장사(平章事, 정2품직)가 되자 세상 사람들이 그곳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불렀고, 지금의 전남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 지명이 유래되었다. 광산 김씨는 이미 고려 때부터 빛을 내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더욱 빛을 낸 가문이다. 여기에는 사계 김장생의 7대조 할머니 양천 허씨(陽川 許氏) 역할이 컸다. 양천 허씨 부인은 조선 태조 때 대사헌을 지낸 허응(許應)의 딸로 광산 김씨인 김문(金問)에게 시집을 왔다.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김문은 한림원의 벼슬을 하였으나 뜻하지 않게 일찍 세상을 떠났다. 허씨 부인은 불과 17세의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그러자 딸의 신세를 가엾게 여긴 친정 부모는 몰래 다른 곳으로 개가(改嫁)를 시키려고 혼처를 알아보고 다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허씨 부인은 그 길로 개성을 떠나 유복자인 아들 김철산(金鐵山)을 데리고 시가(媤家)가 있는 연산(논산) 고정리(高井里)까지 500리를 걸어서 내려 왔다. 김문의 아버지 김약채(金若采)는 광산 김씨로는 처음으로 이 마을에 터를 잡아 살고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허씨 부인이 산길을 걸으면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서 지켜주었는데 연산 시댁에 무사히 도착하자 곧바로 사라졌다고 한다.

허씨 부인은 시부모를 모시며 살림을 알뜰히 가꾸고 자식과 손자들을 훌륭히 키웠다. 김철산은 좌의정을 지낸 김국광(金國光), 김겸광(金謙光) 등 아들 4형제를 낳았고 다시 김국광의 5대손 김장생이 태어났으니 오늘날 고정리 마을은 허씨 부인의 정절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씨 부인은 1455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이곳 고정산에 묻혔는데 이러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세조는 마을 입구에 정려(旌閭)를 세워 세상의 귀감으로 삼았으며, 허씨 부인은 정경부인(정1품)으로 추증(追贈)되었다. 김국광은 조선 5백년 역사에 광산 김씨의 뿌리를 깊게 내린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세조 13년 병조판서로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광김 최초의 우의정이 되었고, 그후 예종이 즉위하자 좌의정으로 승진 최항(崔恒),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했다. 성종 2년에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에 책록되고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김국광의 5대손 김장생은 조선 선조 때 서인의 중진이며 대사헌인 아버지 김계휘(金繼輝)의 아들로 지금의 서울 정동부근에서 태어나 13세 때 기호학파의 대가인 이율곡과 송익필(구봉)의 문하에 입문 예학(禮學)을 전수 받아 수제자로 학문에만 정진하느라 과거도 포기하였다. 30세가 되었을 때 뛰어난 학문을 인정받아 창릉 참봉에 천거되었고, 임진왜란 때에는 호조정랑이 되어 명나라 군사의 군량조달을 담당하였으며, 난 이후 선조말과 광해군 초에는 주로 지방관을 역임하여 단양, 남양, 양근, 안성, 익산, 철원 등을 맡아 다스렸다. 철원부사로 재직할 때인 광해군 5년(1613년) 서얼들이 일으킨 역모사건인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처벌 위기를 맞았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이때 서제인 김경손, 김평손은 모두 잡혀가 고문을 당하여 죽었다. 이후 인목대비 폐모 논의가 일어나고 북인이 득세하는 등 조정이 어지럽자 미련 없이 관직을 포기하고 연산(논산)으로 낙향하여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광해군을 축출한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반정 주역인 김류와 이귀가 산림처사로 추천하여 장령(掌令), 사업(司業) 등에 제수 되었으나 병을 핑개 삼아 사양하였다. 이후에도 조정에서 계속 사람을 보내 동지중추부사, 행호군 등 여러 관직을 제수했으나 번번이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러자 인조는 친히 쓴 글과 수레를 보내어 한양으로 올라올 것을 청하자 병을 무릎 쓰고 조정에 나갔다. 그는 대신들에게 임금의 덕을 잘 보도하고 묵은 폐단을 개혁하며 형벌을 신중히 하고 염치를 존중하며 검약을 실천하는 현실 개혁의 여러 방도를 주장하였다. 그는 집의(執義)와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내고 다시 낙향했는데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노령임에도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의 직함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모아 행제소에 보냈으며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데 앞장섰다. 조정이 청나라와 화해하려 하자 오랑캐와는 가깝게 지낼 수 없다며 끝까지 반대했으며, 인조가 그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을 왕으로 추존하려고 하자 그것의 불가함을 강력히 주장하기도 하였다.

1630년 인조는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임명하고 조정에 출사할 것을 간곡히 요청했으나 더 이상 나가지 않고 향리에 머물면서 성리학과 예학을 깊이 연구하고 제자들과 강학(講學)에만 열중하다가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본래 시호는 왕실의 종친과 문무관 중에서 정2품 이상의 실직을 지낸 사람이 죽으면 주는 것인데 임금의 특별한 교시로서 퇴계 이황(문숙공), 김광필(문경공), 정여창(문헌공), 서경덕(문강공), 조광조(문정공), 김장생(문원공)과 같이 벼슬은 못했어도 학문이 높은 유현(儒賢)에게 시호를 추증하였다. 사계 김장생은 스승인 율곡 이이와 구봉 송익필로부터 학문의 정통을 물려받아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성리학을 발전시켰으며 예학에 밝아 당시 예에 대한 의문이 있으면 모두 그에게 와서 문의를 하였다고 한다. 오늘날에 전해지는 상례와 제례 등의 예도 그의 저서 <가례집람(家禮輯覽)>과 <상례비요(喪禮備要)>에서 전해지는 것들이다. 이러한 그의 학문은 아들 김집과 우암 송시열, 동춘 송준길을 비롯해서 이유태, 강석기, 이후원, 신미일 등에 전승되어 예학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고 서인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를 형성하였다.

김장생의 후손은 아들 김집(金集)이 예조참판, 대사헌, 이조판서, 좌찬성을 하여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김반(金槃)은 참판을 하였다. 김반의 아들 김익희(金益熙)는 병자호란 때 척화신의 한사람으로서 효종 때 대제학과 이조판서를 지낸 명신이자 대학자였다. 또 익희의 동생 김익겸(金益兼)은 유명한 서포 김만중의 아버지로 병자호란 때 청군에 대항하여 강화성을 지키다 성이 함락되자 분신 자결하였다. 익겸의 아들 김만기(金萬基)는 숙종의 왕비인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아버지로 대제학을 하였다. 만기의 동생 김만중(金萬重)은 유복자로 태어나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암행어사와 대제학을 하였으며 순한글 소설인 `구운몽`, `사씨남정기`, `서포만필`를 지은 국문학의 선구자다. 김만기의 아들 김진규(金鎭圭)는 예조판서, 대제학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김양택(金陽澤)은 영조때 대제학과 영의정을 하였고, 김만중의 증손자 김춘택(金春澤)은 숙종 때의 문인으로 시재(詩才)가 뛰어나 명망이 높았다. 또 김천택(金天澤)도 우리 나라 최초의 시가집(詩歌集)인 청구영언(靑丘永言)을 지어 지금도 귀중한 국문학의 자료가 되고 있다. 광산 김씨는 김만기, 김만중 형제 대제학에 김만기, 김진규, 김양택 3대 대제학을 배출하였으니 이것을 가문의 긍지와 자부심의 원천으로 삼고 있다.

광산 김씨 고정리 선영(先塋)에는 사계 김장생 묘를 비롯하여 양천 허씨 부인 묘, 김철산과 부인 묘, 김겸광(金謙光), 김공휘(金公輝), 김선생(金善生) 등 여러 정승과 판서의 묘가 즐비하게 있는데 주산은 고정산(高井山)이다. 고정산은 백두산에서 출발한 백두대간룡이 지리산 천왕봉까지 가는 도중 영취산(1076m)에서 금남호남정맥으로 분맥하여 진안 마이산을 거쳐 주화산까지 와서 남으로는 호남정맥을 뻗고, 북으로는 금남정맥이 되어 운장산(1126m)과 왕사봉(634m)을 거쳐 대둔산(878m)을 기봉하는데 이곳의 태조산이 된다. 대둔산에서 낙맥한 주룡은 월성봉(650m)과 바랑산(555.4m)으로 내려와 곰치재를 넘고 호남고속도로를 건너 깃대봉(393m)을 기봉한다. 여기서 다시 국사봉(333m)을 만들고 매봉(146m)을 향해 가는데 용맥은 들판을 건너 천전과협(穿田過峽)하였다. 매봉에서 다시 방향을 바꾼 주룡은 왕대골과 동성골 들판을 지나 고정(145m)을 기봉한다.

고정산에서 출맥한 주룡은 계백장군 묘의 주산인 충장산으로 넘어가기 전 중간에서 약간 머무른 듯 작은 봉우리를 기봉하고 옆으로 맥을 뻗어 위이 하면서 계속 내려왔다. 주룡의 변화가 기세 장엄하지는 않으나 밝고 순하고 후덕하다. 이를 용의 12격룡으로 나누어 보자면 순룡(順龍)과 복룡(福龍)에 해당된다. 용진처에 다다른 주룡은 입수도두를 만들어 기를 응축시킨 다음 두 개의 맥을 뻗어 왼쪽으로는 사계 김장생 선생 묘의 혈을 만들고, 오른쪽으로는 사계 선생 묘를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면서 변화 생동하여 김철산과 그 부인의 묘혈을 계속 연주형으로 결지 하였다. 청룡과 백호는 유정하고 다정하게 혈을 끌어안아 주었고, 청룡 백호가 감싸준 공간인 명당은 평탄 원만하며, 득수처는 여러 곳이나 파구는 한 곳으로 좁게 관쇄 해주었다. 파구의 방위는 계축(癸丑破)이고 물은 우수도좌(右水倒左)하므로 곤좌간향(坤坐艮向)을 하여 팔십 팔향법으로 자생향(自生向)이다. 청룡 백호 밖 조산과 나성들은 모두 이곳을 배반한 곳 하나 없이 귀하고 수려한 산들이 혈을 비추어 주고 있다. 이곳은 기세 장엄하기보다는 순하고 점잖은 분위기다. 아마 사계 선생의 성품이 이와 같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