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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릉건릉

아이들 여름 방학이 끝나 가는 무렵 초등학교 3학년인 큰아들 녀석이 갑자기 "아빠! 우리는 산에 같이 안가요?"하고 묻는다. 그러자 2학년인 둘째 녀석이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맞아! 아빠와 산에 간지 오래되었다. 산에 좀 데리고 가지. 아빠와 같이 산에 가면 재미있는데..."한다. 아내의 눈치를 살피니 아이들의 요구가 당연하다는 표정이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과 같이 답사를 다닌 것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인터넷에 풍수사이트를 개설하기 전에는 한 달에 서너 번씩 아이들과 답사를 다녔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무엇을 알까마는 잘 정비된 묘지는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는 공간이었다. 도시에 태어나 도시에서 자라는 두 아들에게 아빠가 시골에 자라면서 체험한 것을 모두 하게 할 수는 없어도 자연만은 충분하게 접하게 해주겠다는 것이 나름대로 아이를 키우는 방침이었다. 산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서 산의 흐름과 변화현상을 이야기 해주면 아이들은 신기하게도 빨리 이해한다. 이 때문인지 산을 깎아 아파트를 짖거나 도로를 내는 광경을 목격하면 산이 아프겠다며 가슴 아파한다. 자연을 살아있는 생명체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친구들과 같이 모여 놀 수 있는 곳은 마을 뒷산에 있는 묘지가 유일했다. 학교가 있는 면소재지에서 10리나 떨어진 우리마을은 이렇다할 놀이터가 없었다. 마을 어느 곳보다 평평하고 넓은 공간이 있는 묘지에서 우리는 축구도 하고 뭉치기도 하고 전쟁놀이를 하였다. 날이 어두워지는 것도 모르고 그렇게 놀았는데 어머니들이 밥 먹으라고 데리려 올 때서야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죽은 자의 터인 묘지는 그렇게 아이들과 친숙한 자리였으며 산사람과 죽은 사람이 같이 하는 공간이었다. 어릴 때 놀았던 것처럼 묘지 잔디밭에서 아이들과 뜀박질도 하고 둥글기도 하면서 소리도 질러본다. 그리고 산과 들에 피어 있는 꽃도 관찰하고 열매를 따거나 줍기도 한다. 그리고 목이 마를 때는 묘 앞에 있는 진응수의 물을 퍼서 마신다. 김밥 하나만 준비하면 하루를 돈들이지 않고 최고로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놀이터를 제공해주는 묘지 주인공에 대한 예의로 묘 앞에서 간단한 묵념을 하고 그 분 생애에 대한 설명을 해주면 아이들은 책을 읽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을 받는 것 같았다. 아들 녀석들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면 어른들이 흉내낼 수 없는 문장과 감동이 있어 깜짝 놀라곤 한다. 우리 가족의 이런 나들이가 점차 동네에 소문이 퍼져 여기에 동참하는 이웃들이 많아졌다. 그래서 우리 집은 동네에서 최고의 인기 있는 집이 되었다. 그런데 이것을 바쁘다는 핑계로 그만두니 아이들의 볼멘 소리가 나왔다. 급기야 말수가 없는 큰 녀석이 정당한 권리를 찾겠다는 표정으로 산에 같이 갈 것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일요일은 안되고 토요일 오후 시간을 내기로 했다. 집에서 가까운 화성의 사도세자와 정조의 능을 답사지로 정했다. 여러 번 다녀온 곳이지만 아이들에게는 처음이었다. 또 독서 지도사를 하는 아내도 다음 주 주제가 다산 정약용 선생인데 수원성 축조와 관련하여 융건능(隆健陵)에 대해서 알아야 학생들에게 제대로 설명해 줄 수 있다며 찬성이었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만든 답사 노트를 익숙한 솜씨로 챙겨들었다. 사도세자와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의 능은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안녕리에 있다. 오산에서 1번 국도를 타고 수원으로 가다보면 병점 사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정남이라는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하면 도로 곳곳에 융건능이라는 안내 표시가 잘되어 있기 때문에 초행이라도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서울에서는 수원까지 와서 1번 국도를 타고 오산 방향으로 내려오다 태안읍 병점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된다. 옛날 임금의 능은 왕이 하루만에 참배 가능한 거리인 도성을 중심으로 백 리 안에 있어야 하는데 이곳은 백 리가 넘는다. 신하들이 너무 멀리 있다며 이장을 반대하자 정조는 화성이 80리라고 억지로 우겨 이때부터 수원 80리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융건능(隆健陵)에 도착하면 바로 들어가지 말고 뒤로돌아 도로 건너편을 바라보기를 권한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작지만 마치 여의주처럼 둥글게 생긴 산과 그 뒤로 거문(巨門) 토성(土星)인 고축사(誥軸砂)가 상하로 나란히 있다. 주변 어느 산보다 아름답다. 필경 저 산을 안산(案山)으로 취해 혈을 맺을 만한 자리가 맞은편에 있을 수 있다는 예측을 할 수 있다. 이를 안산 심혈법(案山 尋穴法)이라고 하는데 혈은 수려하고 유정한 안산을 보고 결혈하기 때문이다.

매표소를 통과하면 언덕 위에 융릉과 건릉으로 갈리는 길이 나온다. 융릉 길을 택하여 아래로 내려가면 개울이 나오는데 융릉을 감싸준 백호 능선 따라 우측에서 좌측으로 물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넓은 공간이 나타난다. 평탄 원만한 명당(明堂)으로 융릉이 보통 혈은 넘는다는 뜻이다. 계속 길을 따라 홍살문 입구 쪽으로 들어서면 다리가 보이는데 원대황교(元大皇橋)라 적혀있다. 여기서도 물이 우측에서 융릉을 감싸주면서 흘러나와 좌측 청룡에서 나온 물과 다리 아래에서 합수(合水)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조금 더 가면 돌다리가 나온다. 이 물은 좌측 청룡 쪽에서 흘러나와 융릉을 감싸주면서 우측 연못에서 백호쪽 물과 합수한다. 또 돌다리에서 홍살문을 보면 개울은 없지만 땅이 씻겨 물 흐르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우측에서 좌측으로 흐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물만 4중으로 사도세자의 융릉을 감싸고 있다. 물은 혈의 생기를 보호하고 기가 융결되도록 하는 역할을 하므로 이곳이 매우 좋은 자리임에는 틀림없다.

능 뒤로 올라가 주룡(主龍)을 살펴보아도 주산인 화산에서 중출맥(中出脈)으로 내려오면서 기세 있게 변화하는 생왕룡(生旺龍)이다. 능에서 주변 산세를 보면 청룡 백호를 비롯해서 어느 것 하나 이곳을 배신한 곳이 없다. 정확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산들이 중첩하여 이곳을 감싸주고 있으니 분명 이곳이 기가 뭉쳐있는 혈임에는 틀림없다. 풍수지리의 형세적(形勢的)요건인 용혈사수(龍穴砂水)를 모두 완벽하게 갖춘 곳이다. 이렇게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곳도 드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정확한 혈처에 사도세자의 유골을 묻었는가 하는 점이다. 능 뒤로 돌아가면 곡장 바로 뒤에 약간 볼록한 부분이 있다. 인공적으로 너무 많은 조성을 했기 때문에 정확한 분별이 힘들지만 입수룡의 마지막 변화지점으로 보인다. 여기서 맥은 우측으로 돌아서 능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좌향(坐向)은 용맥과는 반대인 좌측으로 향했다. 이러다 보니 청룡 백호가 감싸준 공간인 보국 중앙으로 향이 위치하지 않고 좌측으로 치우쳐있다. 풍수지리는 음양의 조화이고 균형이다. 이기론(理氣論)인 향법(向法)도 형세적인 균형을 고려하여 놓는 것이지 무조건 아무 향이나 놓지 않는다. 더욱이 입구에서 보았던 길 건너편 좋은 산을 안산으로 취하면 자연적으로 균형이 맞게 되는데 이를 무시하였다.


기초적인 풍수지식만 있어도 누구나 가까운 거리에 있는 좋은 산을 안산으로 취하지 멀리 있는 특출하지 않은 산을 취하지 않는다. 안산은 혈에서 제일 가까운 거리의 앞산이다. 안산 뒤로 있는 산을 조산(朝山)이라 하는데 안산이 보기 흉할 정도로 살(煞)이 많아 불가피할 경우만 좋은 조산을 향해 향을 놓을 수는 있다. 패철을 꺼내 향법(向法)을 따져보았다. 보국 안의 전체적인 물은 우측에서 좌측으로 흘러 정미(丁未)로 파구된다. 혈에서 가장 가까운 내파구(內破口)는 우측에서 좌측으로 흘러가는 물이다. 이곳을 나경패철 8층으로 측정하면 역시 정미(丁未) 방위이므로 내파구와 외파구가 같은 방위인 것이다. 이 때 간좌곤향(艮坐坤向)을 하면 입구에서 보았던 좋은 산을 안산으로 향하게 되고 향법도 팔십 팔향법으로 길향인 자생향(自生向)이 된다. 이래야 전체적인 균형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계좌정향(癸坐丁向)을 하였다. 즉 물이 빠져나가는 파구 방위로 향을 한 것이다. 이곳은 청룡 백호가 중첩으로 감싸주고 있기 때문에 묘 앞으로 물이 직선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수구 방위로 향을 하면 당면출살법(當面出煞法)을 제외하고는 당면출거(當面出去)로 절사패가(絶嗣敗家)하는 흉한 향이 되고 만다. 왜 이랬을까? 당시 나라에서 최고의 지관들이 동원되었으므로 이 정도는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혹 연못에 물이 모이므로 그곳을 파구로 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방위를 측정하니 곤신(坤申)이었다. 연못으로 모이는 물은 좌측에서 우측으로 흘러오므로 좌수도우(左水倒右)하여 계좌정향이면 길향인 정묘향(正墓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물은 우측에서 좌측으로 흐르므로 이곳을 파구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또 용은 좌선룡(左旋龍)으로 돌아 혈을 결지했으므로 우선수(右旋水)가 합법이다. 이럴 때 향은 음(陰)인 용과 양(陽)인 물이 충분하게 교합이 되도록 놓는 것이니 간좌곤향(艮坐坤向)을 취하는 것이 당연하다. 형기나 이기적으로 좋은 향을 놓아두고 왜 이랬을까 첫 번째 의문이었다. 두 번째 의문은 과연 용맥을 받아 정확한 혈처에 안장을 했을까? 하는 점이다. 보통 혈은 아무리 넓어봐야 사방8자 즉 지름이 2-3m 밖에 안 된다. 현재 능은 이보다 훨씬 크게 조성했기 때문에 정확하게 혈심에 들어갔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곡장 뒤 볼록한 부분, 즉 용맥이 마지막으로 기를 뭉쳐놓은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약간 우측으로 비켜 맥이 들어간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맥을 받은 곳에 혈심을 정하고 그 맥의 흐름대로 좌향도 정해야 하는데 좌측으로 비켜있다는 점이다. 혈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그 혈은 무용지물이 되며 오히려 큰 해를 가져다준다. 왜 그랬을까?

정조대왕은 조선왕조에서 가장 효성스러운 왕이다. 정조가 뒤주 속에 갇혀 죽은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무덤이나마 좋은 곳으로 모시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가? 실제로 학문을 좋아했던 정조는 풍수지리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왕이 되자 제일 먼저 동대문 밖 배봉산에 묻혀있는 아버지 묘를 이장할 것을 명하여 좋은 자리를 찾도록 하였다. 신하들이 추천한 여러 후보지를 정조가 직접 좋고 나쁨을 평하여 최종지로 지금의 자리를 택했다. 그리고 유골이 안장될 정확한 자리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풍수에 조금만 관심이 있어도 이는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정조의 지시대로 공사를 했을까하는 점이다. 뭔가 여기에는 정조를 제거하려는 음모가 숨어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임금이 직접 땅을 파는 것을 확인하고 감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왕이 능을 참배하러가도 능까지는 올라가지 않고 정자각(丁字閣)에서 제를 올리고 돌아가므로 아무리 풍수지리에 능통한 정조라 할지라도 세심한 부분까지는 확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새로운 개혁과 왕권강화를 꿈꾸며 문예부흥의 꽃을 피웠던 정조! 그러나 미처 그 꿈을 다 펴지 못하고 49세로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으니 독살 당했다는 설이 있다. 임금을 독살할 만큼 배후세력이 존재했다면 능을 조성하는데도 일부러 나쁘게 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나의 의문은 여기에 있다.

융릉이 명당임에도 정조는 효의황후(孝懿皇后) 김씨(청풍김씨 좌참찬 김시묵의 딸)와는 자식이 없었고, 선빈 성씨가 문효세자를 낳았으나 어린 나이에 일찍 죽었다. 세 번째 부인인 수빈(綏嬪) 박씨와 1남1녀를 두었는데 1남이 정조의 뒤를 이은 제23대 순조다. 순조는 2명의 부인에게서 1남5녀를 두었으나 효명세자가 22살의 젊은 나이로 죽어 그 아들 헌종이 제24대 왕이 되었다. 헌종은 3명의 부인을 두었으나 일찍 죽은 1녀만 낳았다. 그리고 후손이 끊겨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던 원범을 왕위에 오르게 하니 제25대 철종이다. 정조 이후로 자손이 귀하고 왕권이 약화된 것을 가지고 동기감응이 허구라는 지적이 있다. 명당이라는 융릉의 예에서 보듯이 죽은 조상의 유골이 어떻게 살아있는 자손에게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이러한 허구를 믿고 음택풍수의 폐단이 심했다는 지적이다.

과거나 현재 음택풍수의 폐단에 대해서는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동기감응론 자체를 부정한다면 풍수지리의 기본을 무시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고려나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은 양택풍수와 함께 음택풍수도 중요시했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좋은 자리에 모시고 싶은 효심이든, 부모님 유골을 통하여 복을 받겠다는 이기심이든 대다수 우리 선조 들은 동기감응론을 믿어왔다. 우리 선조들이 우매하고 미개하여 이러한 믿음을 가졌을까? 학문이 뛰어나고 조선후기 문예부흥을 일으켜 문치의 꽃을 피우게 했던 정조대왕이 우매하고 미개하여 신하들의 반대를 무릎 쓰고 아버지 사도세자를 좋은 자리에 모시려고 했을까? 분명한 사실은 동기감응론을 무시했다면 풍수지리학은 생명력을 잃었을 것이다. 풍수지리학의 연구 목적은 지기(地氣)에 있고 이 지기가 양택이든 음택이든 어떻게 인간생활에 영향을 끼치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현대과학으로 이를 입증할 수 없다하여 더 연구해보지도 않고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수 천년동안 선조들이 살아오면서 뭔가 영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을 것이다. 혹 서양학문에 없다하여 무시하려 든다면 이야말로 큰일이다. 동양의 심오한 정신철학 세계를 어찌 물질만능의 서양 철학과 비교한단 말인가? 서양인들이 미쳐 생각지 못한 것을 동양인들이 다루었다하여 이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정조대왕의 자료를 찾으면서 다른 서적도 아니고 풍수관련 서적에 그것도 풍수를 가지고 생활의 방편을 삼는 사람들이(꼭 묘 자리를 보아주고 돈을 받는 사람만이 직업 풍수라 할 수 없다.) 동기감응론을 부정하는 내용이 있어 괜히 하소연을 해봤다.

정조는 과연 독살되었을까? 이인화는 소설 영원한 제국에서 이를 강력히 주장한다. 현재 학자들 사이에서 이에 대한 논쟁이 있는 것 같다. 정조가 독살되었다는 정확한 증거는 없지만 정조를 제거하려는 일단의 세력이 있었음은 역사적 사실이다.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항상 죽음의 위협에 시달렸던 정조 아니었던가?


제19대 왕인 숙종은 부인 6명에 3남6녀의 자녀를 두었다. 인경왕후 김씨(광산김씨 김만기의 딸)는 딸만 셋을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고, 인현왕후 민씨(여흥민씨 민유중의 딸)는 자식이 없이 장희빈에게 중전 자리를 빼앗겼고, 인원왕후 김씨(경주김씨 김주신의 딸)도 자식이 없었다. 다만 후궁인 희빈 장씨에게서 1남1녀를 두었고, 숙빈 최씨에게서는 1남2녀, 명빈 박씨와는 1남을 두었지만 일찍 죽었다. 숙종이 죽고 장희빈의 아들이 제20대 경종으로 보위에 올랐으나 병석에 누워 재위기간 4년2개월만에 자식도 뚜렷한 치적도 없이 죽고 말았다. 이에 천한 무수리(나인들에게 세숫물을 떠받치는 종) 출신인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이 제21대 왕위에 오르니 바로 영조다. 이때 조선 조정은 노론과 소론이 극한 대립을 하고 있었다. 숙종 임금은 죽기 전에 세자로 정한 균(경종)이 병약하여 정사를 돌볼 수 없음을 알고 연잉군(영조)을 후사로 결정해달라고 당시 집권당인 노론의 영수 이이명에게 부탁하였다. 당연히 노론측은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삼고 경종의 대리청정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경종을 지지하고 있던 소론측이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소론은 신축옥사와 임인옥사를 주도하여 노론 60여명을 처형시키고 170명을 유배시키며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연잉군도 제거하려 하였다. 그렇지만 연잉군 외에는 왕통을 이을 왕자가 전혀 없었으므로 그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였고 경종이 죽자 가까스로 왕위에 올랐다.

영조가 등극하자마자 노론이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영조는 붕당의 폐해를 열거하며 탕평책을 써서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사색당파의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정국을 안정시키는데 성공한다. 이러한 탕평정국이 오래 지속되자 각 당파들은 다시 정권을 독점하기 위한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사도세자 사건`이다. 영조는 부인 6명에 2남7녀의 자녀를 두었다. 그런데 정성왕후 서씨(달성서씨 서종제의 딸)와 정순왕후 김씨(경주김씨 김한구의 딸)에게서는 자식이 없고 후궁에서만 자녀를 두었다. 정빈 이씨에게서는 1남1녀를 두었는데 그 아들이 효장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0세의 나이로 죽었다. 영빈 이씨에게서 1남3녀를 두었으니 그 아들이 바로 사도세자다. 그 이후 부인들은 아들을 낳지 못했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나이 40세가 넘어서 출생하였고 이복형인 효장세자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2세에 세자에 책봉되고 10세에 남양홍씨 홍봉한의 딸 혜빈홍씨(혜경궁 홍씨)와 가례를 올렸다. 사도세자는 매우 영특하여 3세 때 영조와 대신들 앞에서 효경을 외웠고, 7세 때 동몽선습을 독파했다. 또한 서예를 좋아하여 수시로 문자를 쓰고 시를 지어서 대신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10세 때는 벌써 정치적인 안목이 생겨 집권세력인 노론이 주도한 신임옥사를 비판했다고 한다. 그는 효심과 우애심이 두터워 영조로부터 도량과 덕을 겸비했다고 극찬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15세 때 부왕 영조를 대신하여 청정을 하면서 일어났다. 사도세자를 싫어하는 노론과 이에 동조하는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영조에게 무고를 하기 시작했다. 함부로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 시켰으며,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평양을 내왕하는 등 난행과 광태를 일삼았다는 것이다. 성격이 급하고 과격했던 영조는 수시로 세자를 불러 꾸짖었다. 특히 어머니가 천한 신분출신이라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던 영조는 아들조차 후궁 소생이라는 점에 그 도가 심했다. 이로 인해 강한 스트레스를 받은 세자는 정신 질환을 앓게 되었다. 꼭 무엇이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병이지만 수시로 발작을 일으켰다고 한다. 현대 의학적으로는 일종의 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세자의 돌발적인 발작이 계속되자 노론인 김한구(정순왕후 아버지)와 홍계희, 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여 무고 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는 사도세자를 보좌하고 있는 소론과 소론의 영수 이종성을 탄핵하기 위한 음모였던 것이다. 세자의 장인인 홍봉한과 처숙부인 홍인한도 당파를 위해서 이에 합세를 하였다. 영조의 총애를 받던 소의 문씨가 잠자리에서 계속 부자간의 이간책을 쓰자 이 말을 믿은 영조는 격분하여 세자를 불러 자결을 명했다. 하지만 세자가 끝내 자결을 하지 않자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에 가두어 8일 만에 죽게 하였다. 세자의 나이 28세였고 당시 세손인 정조 나이 10세 때였다.


뭔가 잘못된 사도세자 융릉과 정조의 건릉 (2)

영조가 뒤에 붕당들의 권력 싸움에 말려들어 세자를 죽인 것을 알고 후회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영조는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의미에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양주군 남쪽 중량포 배봉산(현재의 동대문구 휘경동) 아래에 장사 지냈다. 일국의 세자가 뒤주에 갇혀죽는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노론과 소론 당쟁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주장이다. 사도세자는 불과 10살에 당시 집권당인 노론이 전횡을 비판하였다. 노론은 아버지 영조를 등극하게 했던 당이 아니던가? 이를 노론 측에서 좋아할 리가 없었다. 아버지 영조와는 정치성향을 달리하는 세자를 소론 쪽에서 밀었다. 소론은 그들의 미약한 권력을 만회하기 위해 세자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잡을 기회를 노렸다. 노론측이 이를 지나칠 리가 없다. 사도세자의 비행과 난행을 고발하고 때로는 무고하여 결국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이는 참사를 유발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참상을 목도했던 어린 세손이 다음 보위에 오르면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이를 두려워한 노론과 그 일당들은 세손을 제거하기 위해 온갖 모략을 다 꾸미었다. 정조는 항상 죽음의 위협 속에서 가슴앓이를 하며 세손 시절을 보내야 했다. 정조는 홍국영(洪國榮) 등의 경호를 받으며 가까스로 목숨을 지켜나갔다. 이를 안 영조는 세손을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뒤에 진종으로 추존)의 양자로 입적시키고 제왕 수업을 시켰다. 그리고 영조가 연로하여 82세가 되었을 때 대리청정을 명령하였다. 그러자 노론 쪽에서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좌의정 홍인한이 이를 방해하였고, 화완옹주의 양아들 정후겸이 세손을 고립시키기 위해 온갖 모함을 다하였다. 심지어 영조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는 자리에서 하교를 받아쓰는 승지를 몸으로 가로막기까지 했다. 영조가 재위 51년7개월 만인 1776년 3월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25세의 정조가 조선 제22대 왕에 등극할 수 있었다.

정조는 등극하자마자 규장각을 설치하여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그의 즉위를 반대하던 정후겸, 홍인한, 홍상간, 윤양로 등을 제거하고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로 바꾸었다. 그리고 동대문 밖 배봉산 아래에 묻혀있던 아버지의 수은묘(垂恩墓)에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잔디가 말라죽고 봉분으로 오소리가 들락거리더라는 보고를 받게 된다. 정조는 이장을 결심하고 신하들에게 후보지를 물색해보라고 명한다. 문의 양성산, 장단 백학산, 광릉 주변의 달마동 등 10여 군데의 후보지가 올라왔으나 효종의 무덤자리로 논의가 있어왔던 수원 화산을 마음에 두었다. 즉시 이장을 하려했으나 연운(年運)과 산운(山運)이 맞지 않다는 의견이 있어 미루기를 거듭하였다. 이때 조정은 또 다른 당파로 갈라져 당쟁이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숙종 때부터 권력을 잡았던 노론이 비록 힘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무시 못할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중 노론의 당론을 끝까지 고수하는 벽파(僻派, 시류는 무시하고 당론에만 치우쳐 있다는 의미)와 정조의 개혁 정치 노선에 찬성하는 남인과 소론, 그리고 일부 노론세력이 합세한 시파(時派, 시류에만 영합한다는 의미)로 갈리어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었다.

정조는 학문적으로 남인학파에 친숙하여 채제공과 실학자 정약용, 이가환 등과 북학파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을 등용하여 시파 중심으로 정국을 이끌어나갔다. 이 때문에 벽파는 자신들의 위기 상황을 실감하고 종전보다 훨씬 더 똘똘 뭉쳐 정조의 노선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러한 와중에 정조13년(1789년) 사도세자의 묘가 현재의 위치로 천장(遷葬) 되었다. 이때 정조의 노선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정조의 힘을 약화시키고 더 나아가서는 제거하려는 불순한 의도로 사도세자가 명당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했을지도 모른다. 마치 조선말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천주교 박해가 심하자 대원군의 힘이 예산 가야산 아래 2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에 묻혀있는 아버지 남연군의 묘의 발음 때문이라며 이를 파헤치고 도굴하려했던 오페르트 사건(1868년)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사도세자의 융릉(隆陵)은 용혈사수(龍穴砂水)의 명당의 조건을 모두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향과 과연 정혈처에 유골이 안장되었는지 여부에 대한 의심이 드는 곳이다. 이 곳으로 이장을 하고 2년 후인 1791년 천주교 수용 여부에 대한 논란으로 벽파가 주도한 신해박해가 일어났다. 이를 기점으로 정약용 등 시파 중심의 실학자들이 축출 당하고 다시 벽파가 힘을 회복하였으니 정조의 문화정치도 막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9년 후 노론인 벽파세력들이 득세했을 때인 1800년 6월 26일 보령 49세 아까운 나이로 재위 24년3개월만에 갑작스럽게 승하하였다. 정조가 지병인 종기가 도져 세상을 떴다고 조선왕조실록에는 기록되어있지만 지금까지 정조의 죽음에 대해서 의문과 논란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조는 죽어서도 아버지 곁에 묻히기를 원했다. 그는 남인의 영수 채제공(1720-1799년)이 살아있을 때 "내가 죽거든 아버지 무덤 근처에 묻어주오"하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융릉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풍수지리상 길지가 아니라는 논쟁이 있어 정조의 비 효의왕후 김씨가 승하하자 순조21년(1821년) 융릉 서쪽 지금의 건릉(健陵)에 이장하여 효의왕후와 합장하였다. 건릉의 보국(保局)은 좋으나 산천생기를 전달하는 용맥이 확실치 않다. 또 능 앞 좌우에 어좌사(御座砂)와 같은 요성(曜星)이 있으나 혈장에 비해 너무 크므로 혈의 생기를 설기(洩氣)시킬 우려가 있다. 내청룡 내백호가 잘 감싸주긴 했으나 전체적으로 우측에 비해 좌측이 허하다. 또 안산 뒤 조산(朝山)이 건릉을 향하지 않고 비주(飛走)하여 융릉과는 비교할 수 없다. 우수도좌(右水倒左)하는 물이 병(丙)방위로 거수(去水)하고 청룡 백호가 가깝게 교쇄하여 물이 직거(直去)하는 것이 보이지 않으므로 자좌오향(子坐午向)을 하여 팔십 팔향법으로 길향이면서 당문파(堂門破)인 태향태류(胎向胎流)를 하였다.

융건능을 아이들과 답사하면서 능의 구조물을 살펴보는데 큰아들 종원이가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돌로 깔아놓은 참도(參道)를 가르치면서 왜 이어지지 않고 끊겼냐고 질문한다. 참도는 중앙을 경계로 왼쪽은 신(神)이 다니는 길로 신도(神道)라하며 약간 높고 오른쪽은 임금이 다니는 길로 어도(御道)라 하며 약간 낮다. 신도와 어도는 정자각 동쪽 두 계단까지 나란히 이어지고 이어야 하는데 융릉과 건릉은 두 곳 모두 앞에서 끊겨있다. 그러자 둘째 종환이가 "공사를 잘못해서 그렇지 뭐"하고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을 대신 해준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초등학교 2학년과 3학년생이 문화재를 보면서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데 문화재 관리국은 아무런 고증도 없이 보수공사를 한 모양이다. 토요일 오후이고 방학이 끝나갈 무렵 숙제 때문인지 학생들이 수첩을 들고 안내판을 보면서 메모하는 현장이 많았다. 어린 학생들에게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이렇게 관리하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하는지 안타깝다. 빨리 제대로 보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입구 관리사무소를 찾아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자 직원이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본다. 집으로 향하면서도 융건능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