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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이야기옥녀탄금형의 윤증 선생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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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녀탄금형의 윤증 선생 고택

논산시 노성면은 조선 시대 노성현이었다. 윤증 고택의 현무봉이 마치 공자가 태어난 이구산(尼丘山)과 거의 흡사하게 생긴 까닭에 붙은 이름이다. 공자의 이름이 `구(丘)`인 것도 이구산에서 기인하는데, 이구산을 이산(尼山)으로 줄여 부르는 것도 공자의 이름 `구`를 피한 것이다. 공자의 고향은 오늘날의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인데, 옛날에는 노성(魯城)이라고 불리었다.
이구산은 주변에 별다른 높이의 산이 없어, 쉽게 눈에 뜨이는 봉우리이다. 마치 비구니의 깎은 머리처럼 둥그스름하게 생겨 우뚝 솟아있다. 그래서 저절로 이 지방 사람들에게는 옥녀봉으로 불린다. 옥녀봉은 오행으로는 금성체에 해당한다.
금성체를 구성법(九星法)으로 따지면 무곡체(武曲體)라고 한다. 무곡체의 결지 방법은 본체처럼 똑같이 둥근 봉우리를 중간중간 맺으며 짧게 내려와 와혈(窩穴)을 맺는 특징을 지닌다.
노성중학교 앞에서 하차를 한 다음 고택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이구산을 바라보니, 역시 둥근 옥녀봉 아래쪽으로 서너 개의 봉우리들이 같은 모양에 크기를 줄여가며 아래쪽으로 늘어섰다. 둥근 달처럼 생긴 산들이 이어져 맥이 되어 내려오는 월사맥(月砂脈)이다. 좌우로 능선을 옷소매처럼 벌려 주맥을 지탱하는 개장(開帳)의 형식이 아니라, 지기(地氣)를 안으로만 뭉치다가 중간 중간에 넘치는 힘으로 둥근 봉우리를 솟아 올린 천심(穿心)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왼쪽의 백호를 바라보니, 일정한 높이를 지닌 산자락이 마치 커튼처럼 명당을 싸고 흘러내렸다. 일자문성(一字文星)으로, 그 끝이 명당의 중앙을 지나 휘감은 모습이다. 백호가 안산이 된 백호안산을 이룬 것이다.
윤증 고택이 자리잡은 혈 이름은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이다. 현무봉에서 나온 옥녀가 일자문성의 안산을 거문고 삼아 연주하는 형국이다. 너른 명당을 낀 시원스런 자리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고운 거문고 가락을 연주하는 곳이다.
윤증 고택은 옥녀탄금형이란 혈 이름에 걸맞게 아주 밝고 깨끗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고택마저 정갈하고 빈틈 없이 단정하게 지어져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이곳에 들르는 사람이면 누구나 나도 이런 집에서 한번 살아봤으면 하고 부러워하며 찬탄하는 집이다.
고택의 초입에서 중간쯤 들어오다 보면 오른쪽에 정려문이 하나 서 있는데, 윤증의 모친이자, 윤선거의 부인인 이씨(李氏)의 순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부인과 함께 목숨을 버리지 못해 마침내 비난의 화살을 맞고 초야에 묻혀 산 윤선거의 한이 남몰래 배어있을 그 정려문이다.
윤선거(1610∼1669)는 호가 미촌(美村)으로, 김집(金集)의 문인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지 이듬해 1637년의 일이다. 강화로 피난하여 성문을 지키던 윤선거는 숙부 윤전(尹 )을 위시해 김반(金槃)의 아들 김익겸(金益兼), 권순장(權順長) 등과 함께 죽음으로 성을 지키기로 결의하였다. 마침내 성이 함락되어 결의를 맹서하던 이들은 장렬하게 전사를 하였고, 그의 부인 이씨는 스스로 목을 매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윤선거는 평민의 복장으로 성을 탈출해서 목숨을 건졌다.
그 후 정적들로부터 그는 수 차례 비겁자로 몰렸는데, 그는 자책을 하여 처음에는 금산으로 내려갔으나 다시 노성으로 거처를 옮겨 학문에 정진하였다. 사후에 인근의 노강서원(魯岡書院) 등지에 제향(祭享)되었다.
고택에 들어서면 먼저 사랑채가 날렵하게 추녀를 들추고 드는 이를 반긴다. 장중하면서도 밝은 표정이 느껴지는 사랑채이다. 사랑채에는 두 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먼저 밖을 향해 달려있는 `이은시사(離隱時舍)`란 현판이 눈에 뜨이는데, 여기에는 시류를 등지고 숨어살고 싶어하던 윤선거와 윤증 부자의 결연한 의지가 담겨있다.
마루의 안쪽으로 붙어 있는 현판에는 `도원지가(桃源之家)`라고 쓰여있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차지한 집이란 뜻이다. 이 현판에도 세상을 등진 윤씨 부자의 의지가 느껴진다. 그리고 자신들이 숨어살던 이곳을 무릉도원처럼 아름답게 꾸미고자 했던 의욕도 물씬 풍겨난다.
그런 때문이었을까? 그 후로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이 있었지만, 윤선거는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의 연마와 후진의 양성에 힘을 기울이다가 조용히 여생을 마쳤다. 먼저 비명에 간 부인에게 속죄하는 뜻에서 재혼도 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윤증 또한 한번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는데, 그의 높은 학식과 명망을 익히 알고 있는 숙종이 두어 차례 벼슬길에 부르기도 하였다. 특히 숙종 5(서기 1709)년에는 우의정을 제수하기까지 하였는데, 임금과 일면식도 없이 우의정을 제수 받은 것은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한편으로 윤증 선생은 고택을 예학자다운 집으로 단장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고택은 사랑채와 안채, 가묘(家廟)로 크게 구분되는데, 하나같이 단아한 모습이다. 안채는 ㅁ자형 구조로 사랑채와 분리되었으면서도, 사랑채에 드는 손들을 접대하기 쉽도록 되어있다.
널찍한 마루에 다리를 쉬노라 앉아보니, 안채로 들어올 때 거쳤던 문이 보인다. 마당의 오른쪽에 난 문인데, 굴곡을 만들어 ㄹ자 모양으로 돌아들게 되었다. 이 문 하나에도 풍수적인 배려가 깃들어 있으니, 맞은 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안채를 찌르지 못하도록 꾸민 것이다. 이렇게 세심한 마음씀으로 인해 안채에는 전체적으로 온화하고 평안한 분위기가 더욱 샘솟는다.


고택의 특이한 것 중의 하나는 사랑채의 네 짝으로 된 문짝이다. 가운데 두 짝을 평소에 미닫이로 쓰도록 설계하였는데, 큰 교자상 등이 들어올 때를 대비해 바깥의 두 짝 문은 다시 여닫이가 되도록 하였다. 가운데 두 짝을 미닫이로 연 다음, 다시 바깥쪽 문짝과 함께 그대로 여닫이로 열을 수 있도록, 간단하지만 교묘한 설계를 한 것이다. 우리나라 전통 가옥 가운데 유일하게 윤증 고택에서만 볼 수 있는 문의 개폐 구조로, 지금 특허 출원중이라고 한다.
고택의 아름다움은 크게 대칭의 구조에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고택의 문짝들이며, 방의 배치, 벽면 등이 하나처럼 대칭구조이다. 그런데 그 대칭구조는 기계적인 대칭이 아니다. 눈에 얼른 잘 뜨이지 않도록 양쪽에 조금씩 변화를 주어 숨통을 터 놓고 있다. 이런 배려가 주는 효과 때문에, 고택은 보는 사람들에게 예학자의 집다운 단아한 면모와 함께 접근해도 괜찮을 것 같은 편안한 느낌을 동시에 준다. 약간의 변화를 가미한 대칭구조 속에 엄격함과 부드러움이 적절히 섞이어 있는 것이다.
또 벽면을 보면, 기가 막힌 황금분할을 볼 수 있다. 너른 벽의 중간에 나무를 대어 둘이나 셋으로 나눈 벽면이 그것이다. 전체를 그대로 회칠해서 통일성을 기한 벽면의 위나 아래 혹은 좌우의 두 벽면 중 한 쪽 면을 택해 다시 둘, 셋으로 면 분할을 해서 시각적인 변화를 주고 있는 것이다. 그 분할이 아주 정확하고 아름다워서 보는 이들에게 역시 단아함과 편안함을 준다. 마치 모딜리아니의 그림과 같다고나 할까?
윤증 선생의 손길은 고택에만 멈추지 않는다. 곳곳마다 늘어선 나무들의 종류와 크기는 물론이고, 하나하나 정성이 배어있는 수석들을 보면 저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모두가 있어야할 제 자리를 찾아 자연스럽고도 은은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기화요초와 기암괴석은 주로 사랑채 앞마당의 우물 주변과 연못 둘레에 줄지어 있다. 모두가 선비다운 고아한 풍취를 지니고 서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윤증의 예학자다운 풍모와 화훼에 대한 그들의 깊은 취향과 탐미적인 안목, 수준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석가산(石假山)이다. 석가산은 사랑채 토방에 놓여 있는 자그마한 괴석들을 이르는 이름이다. 본래 옛 사람들에게는 마당가에 기묘한 형상의 고사목 가지들을 모아 산맥의 형세가 되도록 꾸며 감상하던 취향이 있었다. 이를 목가산(木假山)이라고 불렀는데, 윤증 고택의 경우는 그 소재가 나무가 아닌 돌이다. 그래서 이름을 석가산이라고 붙인 것인데, 이 석가산을 들여다 보아도 윤씨 두 부자의 수석에 대한 취향과 심미안, 그리고 석가산을 꾸미기 위해 오랜 세월동안 돌 하나씩을 주어보았을 남다른 열성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나는 이곳을 올 때마다 동행하는 사람들에게 주문을 하곤 한다. 먼저 건성으로 흘려 넘기는 것 없이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펴보라고. 두 번째로는 무언가 아름다운 점을 하나라도 더 찾아낼 수 있도록 공격적인 감상을 하라고.
아무튼 이번 방문에서도 고택은 아름다웠다. 녹음이 우거지고 목백일홍이 붉게 피어나는 고택은 ‘도원지가’를 꿈꾸었던 윤씨 부자의 꿈 한 자락을 또 넘겨다본 느낌이었다. 역시 모범생들의 집은 다르구나! 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집안을 대강 구경한 우리는 가묘를 왼쪽으로 끼고 집 뒤로 올랐다. 용맥을 보기 위해서이다. 키 작은 대나무 숲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오르자 송림이 우거졌다. 그 사이로 밝고 환한 용의 힘찬 모습이 보인다. 옥녀봉에서 내려오던 용은 두 기의 묘가 있는 곳에서 몸을 꺾었다. 큰 몸통을 좌우로 휘저으며 기세 좋게 변화를 한다. 그리고는 고택을 향해 거침없이 내려갔다. 생왕룡(生旺龍)이다. 아주 왕성한 기를 지닌 살아있는 용이다.
담장을 넘어다보니, 울안으로 들어간 용은 장독대 바로 뒤에서 품을 벌리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 뻗은 선익사는 안채를 보듬었다. 왼쪽의 선익사는 사랑채로 내려 뻗었다. 안채가 조금 내려앉은 느낌이 든다.
청룡은 가묘와 사랑채를 두르고 흘러 마당가에 조성된 쉼터 뒤쪽까지 싸안았다. 백호는 힘차게 흘러 넓은 명당을 빙 두르고 큰길까지 내려갔다. 주변의 사격들도 모난 데가 없이 대체로 단정하다. 명당은 약간 앞쪽으로 숙였지만 퍽 환하다. 너머에는 외명당이 활짝 열려있다.
고택은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향을 보았지만, 패철의 8층으로 보면 오향(午向)이 분명하다.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향을 쓰고 싶었지만, 슬쩍 피한 것이다.
오향은 본래 왕이나 부처가 마주하는 향이다. 흔히 왕을 `남면(南面)`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항상 남쪽을 바라보는 탓이다. 경복궁에 가서 용상(龍床)이 마주하는 향이 어디인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아무튼 겉으로는 계좌정향으로 향을 썼지만, 자좌오향을 염두에 두었음이 패철의 8층에서 확연해진다. 물은 좌수도우하면서 정미방으로 빠졌다. 정미파이다. 88향법에 대입해보니, 자왕향(自旺向)에 해당하는 좋은 향을 골라 썼다.
자왕향은 좌수도우하고, 정미(丁未破)파에 정오향(丁午向)이거나 신술파(辛戌破)에 경유향(庚酉向), 계축파(癸丑破)에 임자향(壬子向), 을진파(乙辰破)에 갑묘향(甲卯向)이 여기에 속한다. 자손들이 번창해서 남자는 총명하고 여자는 수려하며 부귀와 장수를 불러온다는 향이다.


고택의 바깥마당에는 진응수(眞應水)에 해당하는 고풍스런 우물이 하나 있다. 진응수는 혈장 앞이나 옆에 있는 샘물을 지칭한다. 용의 기세가 강하면 용의 생기를 보전키 위해 용맥의 좌우를 따라 흘러내려 오는 수기 또한 강하다. 입수도두처에서 갈라 뻗은 수기는 혈장의 옆과 아래를 보호하고 남은 기운으로 지상에 분출되는데, 이것이 진응수이다. 진응수가 있으면 이는 빼어난 자리라는 증거로써, 큰 부자와 귀인, 현인이 기약된다. 이 진응수는 사시사철 마르지도 넘치지도 않으며 물맛이 감미로워 우물로 안성맞춤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우물은 그냥 노출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쓰지 않는 모양이다. 덮인 뚜껑을 열어보니, 물빛이 옛날만 못하다. 샘을 청소하고 계속 쓰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우물 반대편에는 상당한 크기의 연못이 있다. 한가운데 봉래섬이 있고 그 사이를 작은 다리로 걸쳐놓았다. 일견에 지당수(池塘水)같지만, 자세히 보면 아니다. 인공적으로 조성한 연못이다. 물빛도 탁하다.
지당수는 혈 앞에 있는 작은 저수지나 연못 혹은 물웅덩이에 고여있는 물을 말한다. 이 물이 청정하면 길하지만, 오염되어 더러우면 흉하다. 지당수의 형성은 혈 주변의 모든 물이 모여 이루어지는 경우와 용맥을 따라 흘러내린 수기가 혈 앞에서 모여 샘물로 용출되는 경우가 있다. 지당수는 천연적인 것이 아니라면 가능한 한 인공적으로 파지 않는 것이 좋다. 또 천연의 지당수를 매몰하는 것도 좋지 않다. 모두가 물길의 흐름을 변화시켜 재앙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이다. 우리는 사랑채 앞의 쉼터에 앉아 김밥을 풀었다. 식사를 마치고 쉬노라니, 이 집안의 종부(宗婦)이신 노할머니께서 며느리, 손자들과 외식을 하러 나가시는 모양이다. 매운탕집 상호를 단 봉고차가 이들을 태우고 떠난다.
나는 노할머니의 성씨조차 모른다. 단지 이 댁으로 시집 온 지가 60년이 넘었다는 사실만을 안다. 내가 이곳에 들를 때마다 항상 안방의 앞마루에 그림처럼 앉아 자잘한 일을 하시거나 오는 손들을 웃음으로 맞는 할머님이다. 65년 전 기품 있는 자태로 몸종들을 주욱 거느리고 시집오셨을 할머님이 이제는 쓸쓸히 이곳을 지키고 계시는 것을 보노라면, 이제는 찬밥 신세가 되고만 인문과학 속에서도 더욱 찌들고 초라해진 국학(國學)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슬프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즐거운 외출을 하시는 듯 웃음이 얼굴에 그득한 할머님의 모습이다. 재잘대는 손자•손녀들과 무슨 말을 그리도 정답게 나누시는지, 이를 바라보는 내가 더 즐겁다.
― 할머님, 오래오래 사시면서 이곳을 지켜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