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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이야기안동 하회(河回)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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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하회(河回) 마을

우리 나라에서 맨 처음 인문지리학서(人文地理學書)를 저술한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 복거총론(卜居總論)에서 "대저 살 곳을 택할 때에는 처음에는 지리(地理)를 살펴보고 다음에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를 돌아본다. 이 네 가지 요소 가운데서 한 가지만 없어도 살기 좋은 곳은 못된다. 지리가 아름답고 생리가 좋지 못하면 오래 살 곳이 못되며, 생리가 좋고 지리가 좋지 못하여도 역시 오래 살 곳은 못된다. 지리와 생리가 모두 좋다해도 인심이 좋지 못하면 반드시 후회함이 있을 것이고, 근처에 아름다운 산수가 없으면 맑은 정서를 기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네 번째 산수(山水)를 설명하면서 하회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였다. "속담에 계거(溪居)는 강거(江居)만 못하고, 강거는 해거(海居)만 못하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재화와 어염을 취할 수 있는 것으로만 말한 것이다. 오직 계거(溪居)만이 평온한 아름다움과 깨끗한 경치 또 관개(灌漑)와 경작하는 이익이 있기 때문에 실재로는 바닷가에 삶은 강가에 사는 것만 못하고, 강가에 삶은 시냇가에 사는 것만 못하다. 대개 계거는 반드시 영(嶺)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야 평시나 난세나 모두 오래 살기 알맞다. 그러므로 계거는 마땅히 영남 예안의 도산(陶山)과 안동의 하회(河回)가 첫째다. 하회는 하나의 평평한 언덕이 황강(潢江, 낙동강) 남쪽에서 서북을 향하는데 거기에 서애 류성룡의 옛집이 있다. 황강물이 휘돌아 흘러 마을 앞 물에서 머물러 깊어진다. 물의 북쪽 산은 학가산(711.2m=안동과 예천 사이에 있음)에서 갈라져 나와 강위를 돌았는데 모두 돌 벽이고 돌 빛이 또한 온화하고 수려하며 조금도 험한 모양이 없다. 위에는 옥연정(玉淵亭=하회 건너편 부용암 서쪽에 있는 정자)과 작은 암자가 있어 암석 사이에 점철되어 소나무와 전나무로 덮여 진실로 절정이다."라고 소개하였다.

하회마을은 전체가 문화재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풍산 류씨의 종택으로 겸암 류운룡과 서애 류성룡이 출생한 보물306호 양진당을 비롯하여, 조선 중기 명필로 꼽히는 미수 허목이 서애 류성룡이 충과 효를 겸비한 인물이라고 단아한 전서로 써준 현판이 있는 충효당(忠孝堂), 중요민속자료84호이고 하회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살림집으로 북촌유거(北村幽居)와 수신와(須愼窩)라는 현판이 나란히 걸려있는 북촌댁, 중요민속자료 제90호로 하회 남촌을 대표하는 남촌댁, 그밖에도 규모가 있는 살림집으로 작천고택, 주일재, 하동고택들이 모두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집들이다. 하회는 낙동강 물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S자형을 이루면서 마을을 싸고돌아 물이 돌아간다고 해서 `물돌이동`이라고 했고 이를 한자로 표현한 것이 하회(河回)라는 지명이다. 하회마을은 안동의 사족 가운데 명문대가(名門大家)로 손꼽히는 풍산류씨(豊山柳氏)가 대대로 살아오던 집성촌으로 풍산류씨를 하회류씨라고도 불러 하회 출신이라는 것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회가 처음부터 류씨 마을은 아니었다. 고려 말 하회탈 전설과 함께 전해지는 김해허씨가 화산(花山) 남쪽 기슭의 거묵실골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뒤에 들어온 광주안씨는 화산 북쪽 기슭인 행개골에 삶터를 이루고 있었다. 풍산류씨는 풍산 상리에 대대로 살다가 조선 초에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풍산(豊山)은 안동의 옛 이름인 영가(永嘉)의 대현(大縣)으로 풍산류씨의 시조는 고려 초에 풍산현(豊山縣) 호장(戶長)을 지낸 류절(柳節)이다. 그 후손은 3대에 걸쳐 계속 풍산현의 호장을 지냈고 시조 류절의 증손 류백(柳伯)이 고려 충렬왕 때 은사(恩賜)로 급제하여 가문을 일으켰다. 7세조인 류종혜(柳從惠, 서애 류성룡의 6대조)가 조선 초에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면서 비로소 풍산류씨가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류종혜가 벼슬을 마치고 낙향하면서 하회에 자리를 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서애의 9대조 류난옥(柳蘭玉)이 어느 공부 높은 풍수지사를 모시고 자손 대대로 뿌리를 내리고 살만한 명당을 찾아 나섰는데 지관이 하회를 소개하면서 3대에 걸쳐 적선을 한 뒤라야 후손들이 살 수 있다고 하였다 한다. 이 말을 들은 류난옥은 마을 밖 큰길가에 관가정(觀稼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지나가는 불쌍한 나그네들에게 적선을 베풀었다. 이일은 그 아들과 손자 대까지 계속되었으며 드디어 손자인 류종혜가 공덕으로 인심을 얻어 이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류씨는 이미 허씨와 안씨가 화산 기슭 좋은 자리에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할 수 없이 그곳을 피해 낮은 지역인 지금의 하회에 터를 잡았다. 그런데 그곳이 화산의 주맥인 진혈처였다. 과연 풍산 류씨는 조선 중기 이후 관직과 학문에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마을의 중심이 자연적으로 하회로 집중되게 되었다. 허씨와 안씨는 점차 세가 약해져 하나 둘 마을을 떠나게 되어 18세기 이후에는 오로지 풍산 류씨들 동족 마을로 남게 되었다.

하회는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의 연꽃이 물위에 뜬 모양의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길지다. 백두산을 출발한 백두대간룡이 지리산 천왕봉을 향해서 남하하는 도중 함백산과 태백산을 지나 선달산(1236m)으로 가기 전 옥돌봉(1242m)에서 한 지맥을 아래로 뻗어 주보령, 예배령(919m), 문수산(1205.6m), 솔담재, 흙목이재, 갈방산, 다덕현, 옛고개, 엉고개, 응봉산, 만리산(791m), 용두산(661m), 꿈고개재, 복두산(509m), 요성산, 박달산, 봉수산(570.4m), 금계골, 천둥산을 거쳐 학가산(711.2m)을 일으킨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학가산은 두 강 사이에 있어 산세가 개성의 오관산, 한양의 삼각산과 비슷하나 석봉이 적은 것이 한스럽다고 표현하였다. 만약 학가산이 오관산이나 삼각산처럼 기세 장엄한 석봉으로 되었다면 그 기세로 인하여 충분히 개성과 한양같은 도읍지를 이루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에서 표현했을 것이다. 학가산을 출발한 대간룡은 갈마령을 지나 보문산(643m)을 만들고 다시 오치를 넘어 풍산읍 현애리 뱃재에서 과협한 다음 대봉산을 기봉한다. 예천에서 풍산가는 34번도로 수박골고개를 넘은 용은 248.1m 무명산 봉우리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가다가 호명면 새랄 뒷산(304.8m)에서 검무산(331.6m) 옆 산골 봉우리를 지나 진천, 갈밭, 샛터를 평강룡으로 행룡하여 산좌점과 작은못골 산 능선으로 들어와 하회의 주산인 화산(花山, 326m)을 기봉하였다. 대간룡이 수백리를 온갖 변화를 다하면서 행룡하여 낙동강을 만나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개국(開局)을 하려고 마지막 기를 다 모아놓은 곳이 화산(花山)이다.


반면에 강건너 하회의 안산과 조산인 부용대나 원지산은 백두대간 두타산 남쪽 태백에서 분맥한 낙동정맥에서 이어진 산줄기다. 낙동정맥은 통고산(1067m)과 백암산(1004m), 주왕산(721m)을 거쳐 안강과 경주 단석산(829m), 취서산(1059m), 원효산(922m), 동래 금정산(808m) 그리고 부산까지 동해를 따라 남으로 내려가는 산맥이다. 주왕산 아래에서 서쪽으로 하나의 맥을 뻗어 보현산을 만들고 거기서부터 문봉산, 구무산, 의성 천제봉(358.5m), 삼포당을 거쳐 낙동강을 만나 멈춘 산이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산맥이 마주보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 두 산맥이 백두대간에서 갈린 곳은 태백으로 여기서부터 산맥사이로 낙동강이 흐른다. 낙동강 7백 리 물은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흐르는 것이 큰 흐름인데 하회에 이르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름이 바뀌기 시작하여 충효당 앞에서 만송정까지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크게 바꾸어 흐르다가, 만송정을 지나면 서쪽에서 동쪽으로 거슬러 흐르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서서히 북동쪽으로 굽이를 틀어 광덕동을 지나면서 다시 본디 큰 흐름대로 남서쪽으로 계속 흘러간다. 낙동강이 동쪽으로 거슬러 흐르는데는 하회 밖에 없다고 한다. 하회로 들어오는 지맥(地脈)이 전체적으로 태백에서 시작하여 우선(右旋)으로 원을 그리듯 하고 낙동강 물은 좌선(左旋)으로 원을 그리듯 하니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이 되는 것이다.

화산(花山)은 수 백리를 달려온 대간룡(大幹龍)이 마지막으로 기봉한 산으로 하회의 주산이다. 화산의 중출맥(中出脈)이 몇 개의 작은 봉우리를 기봉(起峰)하면서 양옆으로 청룡 백호를 뻗어 크게 개국(開局)한 다음 중심맥을 들판 가운데로 내려보냈다. 들판으로 내려온 용은 평강룡(平剛龍)으로 과협(過峽)하였는데 이곳을 양 강가의 청룡 백호 끝이 공협사(拱峽砂)가 되어 보호해준다. 아마도 청룡 끝 거묵실골에 김해 허씨가 자리잡아 살았고, 백호 끝 행개골에 광주 안씨들이 터전을 이루었던 곳으로 짐작이 된다. 중출맥은 야트막한 평지로 행룡을 거듭하여 하회마을에 이르러서는 가운데가 봉긋하고 바깥쪽으로 갈수록 점점 낮아지는 원형의 지형을 만들었다. 마치 삿갓이나 대접을 엎어놓은 것처럼 또는 비행접시 모양의 형상이다. 하회마을의 집들은 봉긋한 언덕을 뒤로하고 낙동강을 바라보는 이른바 배산임수(背山臨水)로 향을 하였기 때문에 집의 방향이 동서남북 제각각으로 원형을 이루고 있다. 무조건 남향을 선호하는 요즈음 집들과는 대조적이다. 마을의 가운데가 가장 높기 때문에 이것을 등지고 빙 둘러가며 집을 지어 마을 전체가 한 방향으로 향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결국 어느 집이든 집 뒤로 이어지는 지맥을 받아 집을 지었다는 이야기다. 하회마을 전체가 득수국(得水局) 명당으로 지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화산의 중심맥이 끝나는 용진처(龍盡處)에 주혈(主穴)이 있을 것이다. 이번 답사에서는 시간이 늦어 마을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부용대에서만 마을 전체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정확한 곳을 살필 수는 없었다. [안동하회마을, 임재해 글, 대원사]에는 화산의 지맥이 류운룡 선생과 류성룡 선생이 탄생한 양진당 아니면 충효당에 와서 멎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부용대에서 하회마을을 바라보면 사람에 따라 물위에 얕게 떠있는 연꽃과 같아 연하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도 하고, 거대한 배가 물을 가르며 향해하는 모습과 같다하여 행주형(行舟形)이라고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자루가 달려있는 재래식 다라미 형국이라고도 한다. 풍수지리 형국론에서 연화부수형 명당은 연(蓮)은 뿌리를 물 속 진흙에 깊이 박고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맺는 식물이므로 자손이 영구히 번식하고 명예가 청사에 아름답게 남을 걸출한 인재를 배출한다고 하였다. 연꽃은 수면에 줄기를 드러내지도 않고 꽃잎을 물 속에 파묻지도 않으므로 수면과 거의 비슷한 높이의 용진처에서 혈을 찾아야 한다. 행주형 명당은 키를 조정하는 곳이 진혈처가 되므로 물살을 헤치고 앞으로 나가는 뱃머리 부분에서 혈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행주형은 마을에 우물을 파면 배 밑바닥에 구멍을 뚫는 것과 같으므로 배에 물이 스며들어 전복하는 것처럼 마을이 망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하회에서는 함부로 우물을 파지 않았다고 한다. 옛날에는 화천(낙동강) 물을 길러 먹었는데 일본인들이 이 사실을 알고 의도적으로 공동 우물을 팠는데 그것을 제외하고는 지금도 식수는 화천의 물을 양수기로 퍼 올려 쓰고있다고 한다. 만약 하회를 다라미 형국이라고 보았을 때도 우물을 파면 다라미 불을 꺼뜨리는 것이 되기 때문에 최근에도 샘을 파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다고 전한다.

하회가 풍수지리 적으로 길지(吉地) 이기는 하지만 서쪽의 원지산과 북쪽의 부용대 사이 즉 서북쪽 건방(乾方)이 낮아 겨울이면 세찬 북서풍의 피해를 받게된다. 풍수지리에서 건해풍(乾亥風)은 황천살(黃泉煞)로 보고 그 피해가 가장 극심하다고 하였다. 하회가 산태극수태극의 전형적인 명당으로 부귀영화를 다한다 할지라도 건해풍의 피해는 어쩔 수 없다. 건해풍은 마을의 지기를 흩어버리게 할뿐 아니라 가끔씩 커다란 재앙을 가져다줄 수 있다. 이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인공적으로 비보(裨補)를 하여야 하는데 하회에서는 그곳에다 만송정이라는 소나무 숲을 조성하였다. 만송정은 건해방(乾亥方)의 허함을 보완해주고 북서풍의 바람을 막는 방풍림(防風林)과 아울러 모래를 막는 방사림(防沙林) 그리고 홍수 때는 낙동강의 범람까지 막아주는 방수림(防水林)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인공적인 비보 숲 조성으로 하회는 풍수지리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본래 김해허씨들이 자리잡고 살았던 화산 남쪽 기슭의 거묵실골은 이곳의 청룡에 해당되며, 광주안씨들이 터를 잡았던 화산 북쪽 기슭 행개골은 백호에 해당된다. 비록 늦게 들어왔지만 화산의 중심 맥에 자리잡은 류씨들이었기에 더 번성한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하회를 일컬어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반(杯盤)"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김해 허씨가 터를 닦아놓으니 광주 안씨가 집을 짓고 풍산 류씨는 집안에 들어가 주안상을 차려놓고 잔치를 벌였다는 뜻이다. 결국 허씨와 안씨는 류씨들의 들러리 역할만 했다는 뜻인데 지리적으로 살펴보아도 허씨와 안씨의 터전은 주혈이 있는 류씨 터전을 보호하기 위한 청룡 백호 보호사 역할만 할뿐이다. 자연지리의 현상과 이치가 하나도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는 곳이다. 문득 이 자리를 잡아준 지관이 그랬던 것처럼 풍수지리를 공부하는 사람이 남의 자리를 잡아줄 때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덕을 쌓도록 해주는 것이 그 사람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안동하회마을" 책자에 나와있는 안씨와 허씨에 얽힌 전설하나씩을 소개한다.

고려시대 때 가난한 안씨 부부가 들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쓰러져있는 행각승을 만났다. 안씨 부부는 이를 가엽게 여기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살림살이가 빈곤함에도 불구하고 알뜰하게 구완을 해주었다. 건강을 회복한 스님이 고마운 뜻의 보답으로 명당을 하나 잡아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후손에 삼정승이 나는 집터명당과, 당 년에 천 석을 하는 묘지명당이 있는데 이 중 하나만 고르라고 하는 것이었다. 안씨 부부는 살림이 워낙 찌들린 터라 올해 당장 천석하는 묘지명당을 원했다. 스님은 묘 터 하나를 잡아주고 떠났는데 안씨 부부는 스님이 잡아준 자리에다 부모 묘를 이장하였다. 그랬더니 그해 여름에 장마가 지면서 물길이 바뀌더니 묘 아래쪽에 드넓은 개펄이 생겨서 들을 이루었다. 안씨 부부는 형편이 어려워 이곳에 벼를 못 뿌리고 피를 뿌렸더니 그해에 피 천 석을 수확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안씨 묘를 일컬어 `피천석묘`라고 불렀다고 전하는데 얼마나 형편이 어려웠으면 후대의 정승이 나는 장기적인 전망보다는 우선 당장 피 천 석이라도 하는 명당을 원했을까 하는 생각에 큰 명당은 옛날에도 부(富)가 있어야만 얻을 수 있었구나 하는 안타까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허씨들은 하회탈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고려 말엽 이 마을에 허도령이 살았는데 어느 날 꿈에 서낭신의 계시를 받고 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목욕재계를 하고 다른 사람들이 출입할 수 없도록 금줄을 치면서 이르기를 탈이 다 완성될 때까지는 절대로 방문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허도령을 몹시 사모하는 마을 처녀(당시 17세의 무진생 의성 김씨로 알려져 있음, 별신굿을 할 때 무진생 김씨 할매 서낭님 이라고 부르는데서 유추)가 그 사모하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허도령의 얼굴이나마 들여다보고 싶어서 방문을 살짝 열었다. 입신 지경에서 탈을 거의 완성해가고 있던 허도령은 그만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런 까닭에 허도령이 마지막으로 만들다 만 탈은 마무리가 제대로 안돼 턱이 없는 탈이 되고 말았다. 허도령이 죽자 처녀도 번민하다가 따라 죽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처녀와 허도령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 서낭신으로 모시고 해마다 제를 올리고 그 탈을 쓰고 굿을 하였는데 이것이 하회별신굿으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어있다. 현재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것이 그때 허도령이 만들다 만 탈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