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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이야기순창 남원양씨(南原楊氏) 종가(宗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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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남원양씨(南原楊氏) 종가(宗家)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 무량산(586.4m) 아래에는 고려 때부터 터를 잡고 살아온 남원양씨(南原楊氏) 종가가 있다. 우리 나라 양씨는 버드나무 양(楊)자 쓰는 양씨와 들보 양(梁)자 쓰는 양씨로 크게 나누는데 양씨(梁氏)의 시조는 탐라 개국설화에 나오는 고씨(高氏), 부씨(夫氏)와 함께 삼성혈(三姓穴)에서 탄생한 양씨(梁氏)다. 제주도(탐라) 양씨에서 분포된 본관 중 충주양씨(忠州梁氏)와 남원양씨(南原梁氏)가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중에서도 남원양씨(南原梁氏)가 압도적인 수를 차지한다고 한다. 그런데 버드나무 양(楊)자 쓰는 양씨가 또 남원을 본관으로 하고 있어 일반인들이 혼동하기 쉽다. 양씨(楊氏)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역사책에서 제일 처음 등장하는 양씨(楊氏)는 고구려의 양만춘(楊萬春)장군이다. 그러나 양만춘 장군을 선조로 하는 양씨(楊氏)는 지금 하나도 없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우리의 많은 역사기록이 단절되고 없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 나라 양씨(楊氏)는 모두 47본이나 되지만 이중 남원(南原), 청주(淸州), 중화(中和), 통주(通州) 등 4개 본이 대종을 이룬다. 남원양씨는 고려 때 지녕월군사(知寧越郡事)를 지낸 양경문(楊敬文)을 시조(始祖)로 하는데 이후부터 9세 대제학공(大提學公) 양이시(楊以時)까지는 관직(官職)만 전하고 자세한 생존 연대 등은 전하는 기록이 없다. 그래서 공민왕 4년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대제학에 올라 가문을 번창시킨 양이시(楊以時)를 실질적인 시조로 삼고 있다. 양이시가 남원이 관향(貫鄕)이라는 것은 고려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며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고려 충숙왕15년(1328)-조선 태조5년(1396년)]이 쓴 제용재기(濟用財記)에 양이시는 남원 사람이라고 한 것에서 알 수가 있다. 남원양씨는 양이시 이전부터 여러 대에 걸쳐 남원에 세거(世居)해온 순수 한족(韓族) 토착 성씨(姓氏)라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다. 그런데 하마터면 절손(絶孫) 될 뻔했던 남원 양씨를 오늘날 명문(名門)으로 남게 한 것은 양이시의 며느리인 숙인(淑人) 이씨(李氏)때문이라고 한다.

본래 개성 출신인 이씨 부인은 우왕 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集賢殿 直提學)으로 있던 양이시의 외아들 양수생(楊首生)과 결혼한다. 부자(父子)가 급제한 집안으로 출가하여 부러움을 한껏 받고 부귀와 영화를 부릴 것으로 기대됐던 그녀의 일생은 신혼의 단꿈이 깨기도 전에 시아버지와 남편을 한 해 사이에 사별하는 불행을 당한다. 더욱이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남편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친정에서는 개가를 권했다. 이씨 부인은 반대했지만 청상과부로 혼자 살 딸의 운명을 걱정한 친정 식구들의 성화는 열화와 같았다. 이씨 부인은 아이를 낳고 나면 개가를 하겠다고 말미를 구한 다음 몇 달 뒤 아이를 낳았는데 아들이었다. 친정 집에서는 이제 개가를 해야 할 것이 아니냐며 재촉이 심하자 그녀는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길 수 없다는 서찰을 남기고 어린 유복자 양사보(楊思輔)를 품에 안고 천리 길을 걸어 남편이 살았던 남원 옛집으로 향했다.

천신만고 끝에 이씨 부인이 남원에 내려와 자리를 잡자마자 왜구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운봉(雲峰)으로 쳐들어온 난리가 일어났다. 고려말 연안을 침략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가 진포(鎭浦, 금강입구)에서 최무선이 화약을 이용하여 만든 화포의 공격으로 500척의 배가 침몰하는 참패를 당하자 홍성으로 상륙하였다. 그러나 최영 장군이 홍성에서 이를 크게 무찌르자 왜구들은 퇴로를 잃고 지리산 운봉까지 밀려 온 것이다. 이들은 최후의 발악으로 학살과 약탈을 일삼았다.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서 출병한 이성계가 적장 아지발도를 죽이고 황산대첩을 이룬 시기가 이 때였으며 남원은 전쟁으로 황폐화가 되었다. 일점 혈육 양사보를 품에 안은 이씨 부인은 오직 어린 아들을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키울 것인가 만을 생각하고 남원에서 순창 가는 24번 국도에 있는 비홍(飛鴻)재로 피난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바라본 순창 무량산(無量山)의 산세가 너무 아름다웠다. 저 아늑한 곳에서 논밭을 일구고 살면 두 식구 안전은 물론 생계도 걱정이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아주 이사를 결심하고 살만한 터를 찾기 위해서 나무로 만든 기러기 세 마리를 날려보냈다. 그러자 한 마리는 지금의 순창군 동계면(東溪面) 관전리(官田里)로 날아갔고, 또 한 마리는 동계면 구미리(龜尾里)로, 또 한 마리는 순창군 적성면(赤城面) 농소리(農所里)로 날아갔다. 재산이라고는 시조(1세조) 양경문(楊敬文)에서 8세조 양서령(楊瑞齡)까지 족보가 적혀있는 가승보(家乘譜)와 시아버지와 남편의 문과합격증인 양홍패(兩紅牌)가 전부인 그녀는 어린 아들을 업고 구미리로 내려갔다. 이 때 이씨 부인이 가지고 있던 가승보와 홍패는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이중 홍패는 1981년 문공부에서 보물 제725호로 지정하였다. 이씨 부인이 나무 기러기를 날린 고개인 비홍치(飛鴻峙)는 여기서 연유한 이름이다.


구미리에 도착한 부인은 나무 기러기가 떨어진 집으로 갔다. 그 자리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 집에서 방 한 칸이라도 얻어 살려고 마음먹고 집주인을 찾았다. 그런데 집에 살던 노인은 자기가 진짜 주인이 아니고 집주인이 올 때까지 집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진짜 주인이 누굽니까?"하고 이씨 부인이 묻자 노인은 "나도 누군지를 모릅니다. 다만 양씨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귀가 번쩍 뜨인 이씨 부인이 "내 등에 업힌 아기도 양씨인데 방 한 칸 정도 빌려 쓸 수 있겠군요."하며 집안으로 들어가자 노인은 두 모자(母子)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바로 부인과 아드님이 집주인입니다."하고는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이 곳에 정착한 이씨 부인은 밤낮으로 일을 하면서 양사보를 키웠다. 양사보는 자라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고, 음사(蔭仕)로 벼슬길에 나가 함평 현감을 지내는 등 가문을 일으켰다. 양사보의 후손에서 8명의 문과급제자와 10명의 무과 급제자, 30명의 생원과 진사가 대를 이어 나오니 남원 양씨는 탄탄한 가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고려조에 명문이긴 하였지만 양수생의 요절로 절손(絶孫) 될 뻔했던 가문이 한 여인의 노력으로 되살아나 명문이 된 것이다. 양사보의 손자 양자유(楊子由)는 세조14년에 문과에 급제 사헌부 집의와 금산군수를 역임했고, 양배(楊倍)의 아들 양공준(楊公俊)은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과 춘추관 기주관을 하였다. 양공준의 아들 양홍(楊洪)과 손자 양사형(楊士衡), 증손 양시보(楊時普), 양시보의 사춘 양시우(楊時遇), 양시정(楊時鼎)까지 4대가 연속 문과에 급제하니 남원 양씨의 명망이 일세에 떨쳤다. 조선조 세조는 1467년 이씨 부인에게 정려(旌閭)를 내려 후손들에게 그 정절을 기리도록 하였는데 이씨 부인의 정려가 조선조에 내려진 정려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꼽힌다. 이씨 부인의 묘는 기러기 한 마리가 떨어진 순창군 적성면 농소리에 있는데 시아버지 양이시(楊以時)의 묘단을 위에 세우고 그 아래 남편 양수생(楊首生)의 묘단과 함께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이씨 부인이 이 집에 정착하고부터 23대 약600여 동안 대대로 종손(宗孫)이 살아오면서 종가를 지키고 있다.

구미리의 주산은 마을 뒤에 있는 무량산(586.4m)이다. 백두대간룡이 덕유산을 지나 육십령을 건너 영취산을 만들고 지리산 천왕봉으로 가는데, 장수 영취산에서 서쪽으로 분맥한 산맥이 금남호남정맥이다. 금남호남정맥은 장수 장안산(1237m)과 임실 팔공산(1151m)을 거쳐 진안 마이산(678m)으로 가는데 팔공산에서 남으로 뻗은 맥이 임실 성수산(875.9m)과 관촌면을 지나, 봉화산(467.6m)과 응봉(608.5m), 무제봉, 배재, 지초봉, 새목재, 원통산(603.8m)을 거쳐 내려오다 섬진강 상류인 적성강을 만나 멈춘 산이다. 본래 무량산의 이름은 구악산(龜岳山) 즉 거북산 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에는 거북과 관련된 금구예미형(金龜曳尾形) 즉 영험스러운 거북이가 진흙으로 꼬리를 끌면서 들어가는 형국인 명당이 있다고 전해져 마을 이름도 구미리(龜尾里)라 하였다고 한다.

옥룡자(玉龍子) 유산록(遊山錄)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 적성(赤城)의 동북쪽 이십리에 금구예미(金龜曳尾), 평지혈락(平地穴落)하였구나. 사방이 비습(卑濕)하여 물이 날까 하겠지만 혈(穴)을 찾아 쓰게 되면 세사황토(細沙黃土) 나겠구나. 차후에 사람들이 눈을 뜨고 이런 혈을 얻어 쓰면 용지삼년(用之三年)에 속발하여 만년 명부(名富)하리라. 이 산 주인 살펴보니 사람마다 주인이라 이 말이 허언인가 지내보면 알리로다. 아무라도 나를 알면 이런 혈을 주련만 세상에 나를 아는 사람 없으니 어느 누가 차지할꼬."

이 혈을 찾기 위해 전국 각지의 지관들이 다녀갔지만 한결같이 진혈처를 찾지 못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한다. 구미리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작은 거북 모양의 거북바위가 길가에 목과 몸이 분리된 체 서있다. 전설에 따르면 거북이의 꼬리 방향을 두고 마을 사람들과 근처의 취암사 승려들 사이에 심한 싸움이 있었다고 한다. 서로 거북이의 꼬리를 마을이나 절 쪽으로 향하게 하기 위해서였는데 세에 밀린 취암사 스님들이 거북이의 목을 잘라버리고 말았다. 그 뒤 절은 망하여 폐사가 되었고 구미리는 번창하였다고 한다. 어느 곳이 금구몰니 진혈처인지 알 수 없지만 구미리에 들어서면 깊은 산중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산중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수 백리 혹은 수 십리를 행룡(行龍) 해온 주룡이 혈을 맺기 위해서는 양명하고 수려한 보국(保局)을 형성하여야 한다. 보국의 크기와 형태에 따라 한 개 또는 여러 개의 혈을 그 보국 안에 결지하는데 구미리의 경우 여러 개의 혈이 있을 수 있다.

마을 뒤 주산인 무량산(586.4m)은 기세 강한 석산(石山)으로 진안과 장수 경계인 팔공산(1151m)에서부터 관촌과 임실을 거쳐 순창 동계에 이르기까지 수 백리를 행룡(行龍) 해오면서도 아직도 강한 기운이 남아도는 듯 산 정상이 험한 바위로 되어있다. 이 험한 기를 털기 위함인지 무량산 중심맥은 구미리로 향하면서 몇 번의 기복(起伏)을 하며 점차 낮아지는데 그때마다 산이 조금씩 순해 짐을 알 수 있다. 풍수지리에서는 이와 같은 형상을 박환성(剝換星)이라고 한다. 주룡이 행룡하면서 온갖 변화를 하는 것은 기세가 강하고 억세고 혼탁한 생기를 모두 탈살(脫煞)하여 부드럽고 순한 생기로 바꾸기 위한 것이다. 박환(剝換)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 행룡(行龍)하는 주룡이 갑자기 방향을 크게 전환하면서 험한 기운을 털어 버리고 순한 용으로 변하는 것과, 거칠고 험준한 석산(石山)이 과협과 기봉을 하면서 점차 곱고 유연한 토산(土山)으로 변하는 경우를 말한다. 무량산은 몇 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는데 마을에서 보아 제일 뒤 제일 높은 봉우리가 가장 바위가 많고 그 다음 봉우리로 올수록 점차 부드러워지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를 진룡(進龍)이라고도 하는데 용이 전진하면서 질서 정연하게 환골탈퇴(換骨脫退)하는 모습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무량산 정상에서는 봉우리 봉우리로 기복(起伏)하면서 행룡하던 용이 가장 마지막 가장 낮은 봉우리에서는 갑자기 방향을 90도 각도로 크게 바꾸면서 마을 뒤를 향해 내려오는데 이 때는 산 능선에 바위 하나 안 보일 정도로 깨끗한 모습이다.


산에서 크게 낙맥(落脈)한 주룡이 자신이 멈추고 쉬어야 할 지점을 스스로 찾은 듯 마을 앞에 있는 품자형(品字形) 안산을 보고 다시 방향을 90도로 바꾸어 남원 양씨 종가 뒤 대나무 숲을 향한다. 그리고 마지막 숨을 몰아 쉬듯 마지막으로 기를 묶어 결인속기(結咽束氣)하고 순한 생기만 아래로 내려보내 혈장(穴場)을 만들었는데 바로 남원양씨(南原楊氏) 종가(宗家)가 자리하고 있다. 무량산에서 우측으로 뻗은 산줄기는 마을을 감싸 돌며 외백호를 이룬다. 무량산에서 기봉하면서 내려왔던 용맥이 마지막 봉우리에서 좌측으로 크게 원을 돌며 청룡을 만드는데 청룡의 모습이 순하기도 하거니와 그 형상이 여러 형태다. 일자문성(一字文星)이 되고 다시 귀인봉(貴人峰)을 만들고 다시 노적가리 같은 부봉(富峰)을 만들면서 마을 앞까지 감싸주니 안산(案山)은 청룡에서 기봉한 산이다. 청룡 끝이 백호 끝과 서로 교차하면서 수구(水口)를 이루므로 마을은 어머니가 양팔을 벌려 아이를 안 듯 품안에 자리잡고 있는 모습이다. 더욱이 청룡 백호 밖으로는 적성강이 이곳의 기를 보호하는 공배수(拱背水) 역할을 해준다. 남원 양씨 종가에서 나경패철 8층 천반봉침(天盤縫針)으로 수구 방위를 측정하면 정미(丁未)다. 마을을 감싸는 물은 좌청룡이 마을 앞까지 감싸고 있으므로 좌측에서 득수(得水)하여 우백호 끝과 교차하는 지점으로 거수(去水)하니 좌수도우(左水倒右)한다. 종가는 품자(品字, 華蓋三台峰) 안산을 향했는데 이 곳이 정남향으로 집의 좌향은 자좌오향(子坐午向)이 된다. 형세론적(形勢論的)으로 좋은 좌향이지만 이법적(理法的)으로도 당나라 구빈 양균송 선생의 팔십 팔향법(八十八向法)중 길향인 자왕향(自旺向)에 해당된다.

종가를 내청룡 내백호가 가까이 감싸고 있는데 주변에 집들이 들어서 있고, 논이나 밭을 일구어 자세히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지형의 경사도와 앞과 뒤의 높이를 고려하여 살펴보면 내청룡이 종가 앞을 완전히 감싸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종가가 대간룡(大幹龍)의 용진처(龍盡處)에 해당된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남원 양씨의 종가는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는다는 갈록음수형(渴鹿飮水形)으로 사슴의 입에 해당된다고 한다. 종가 뒤 대나무 숲에는 목마른 사슴을 뜻하는 녹갈암(鹿渴岩) 바위가 있고 지금은 수도로 바꾸었지만 종가 왼쪽에 대모정(大母井)이라는 우물이 있어 사슴이 물을 마시는 형상이라 한다. 더욱이 큰 바위 옆에는 작은 바위 서너 개가 있는데 이를 새 끼 사슴이라고 한다. 형국론(形局論)으로 이름은 그럴 듯 하지만 집 뒤 대나무 숲에 있는 바위가 너무 크다. 그것도 입수룡(入首龍) 위에 자리잡고 있어 용의 기를 누르므로 종가 터에 손해를 주면 주었지 이익이 될 것이 없어 보인다. 아무리 귀한 바위라 하더라도 그 크기가 적당해야지 너무 크면 오히려 기를 설기(洩氣)할 따름이다. 남원양씨 종가가 명혈(名穴)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크게 현달한 인물이 나오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용맥이 대나무 숲으로 나오기 때문에 이곳의 형국을 맹호출림형(猛虎出林形)으로 볼 수도 있지 않느냐고 누군가 말하자 광주에서 오신 이성주 선생님이 호랑이는 본래 대나무 밭에는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호랑이와 대나무는 서로 상극으로 우리 민간신앙에서 대나무는 산신령의 매이며 산신령이 호랑이를 대나무 매로 다스린다고 한다. 옛 시골에서 집안의 울타리를 대나무로 하는 것은 산에서 내려온 호랑이가 집안으로 접근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조상들의 지혜라고 말씀해주셨다. 그에 반하여 사슴은 대나무 잎을 매우 좋아하므로 이곳을 갈록음수형(渴鹿飮水形)으로 이름지었을 것이라고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남원양씨 종가는 600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면서도 아직까지 문화재로 지정을 못 받았다. 경북 안동의 의성김씨 종가나 전남 해남의 윤선도 선생 고택처럼 고풍스런 전통 가옥을 생각하고 이곳을 답사하면 실망 할 수 있다. 최근에 지은 유물관이 있기는 하지만 종가는 현대적 벽돌집으로 전통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남원양씨 문중과 순창군이 힘을 합쳐 종가를 옛 모습대로 복원하고 이를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직 천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적성강과 함께 잘 어울리는 관광코스가 될 것 같다. 순창군에는 유명한 명당이 많이 있다. 이를 하나의 테마로 만들어 관광코스로 소개한다면 전국적으로 약4만 명으로 추정되는 풍수학인들이 한번쯤 다녀가고 싶은 인기 있는 답사지가 될 것이다. 팔도풍수지리사랑회 회원들이 순창 지역을 답사하면서 순창고추장을 사고 싶다고 하여 전통고추장민속마을을 먼저 들렸듯이 이로 인한 부가 소득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