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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이야기서울, 한눈에 바라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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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눈에 바라보기

서울의 답산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준다.
나는 대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50년을 살았다.
그중 20여년을 남산 안에서, 남산을 바라보며 살았고, 20여년을 과천에서 관악산과 청계산을 바라보며 살고 있다.
그래서 서울의 답산은 내게 특별했고, 그 준비과정에서 들여다보는 남산은 내게 추억으로 다가왔다.

나는 어린시절을 남산에서 보냈는데, 지금의 남산도서관 아랫마을 남산 1번지였다.
나의 부모님은 1.4후퇴때 황해도 황주에서 피난 오셔서 강진까지 내려 가셨다가, 울로 오시어 이곳 남산에 둥지를 틀고 남대문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하셨다.

나는 어린시절 친구들과 남산 팔각정까지의 계단을 오르내리고, 팔각정아래 넓적한 바위에 올라 꿈을 키우며 서울시내를 내려다보며 지냈다.

나는 남대문 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지금 그 자리엔 상공회의소가 들어섰고, 학교는 사라졌다.
중,고,대학을 다니면서도 남산을 바라보고 살아, 서울의 변천을 보고, 느끼며 살았기에 내 고향 서울을 알고자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번 답산을 시작했다.


50년을 살아온 서울이지만 이렇게 한눈에 서울을 본 것은 이번 답산이 처음이었다.
우선 남산 팔각정 봉수대 앞에서 서울의 주산과 청룡, 백호 자락을 한눈에 볼 수 있었고, 그 다음 한강을 건너 북악산길을 따라 팔각정에 올라 보현봉, 형제봉을 보며 용의 횡룡 과정을 알 수 있었으며, 서울의 안산인 남산이 백호자락을 따라가다 자리 잡은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이번 답산기는 <풍수적 의미의 서울>이전에 <있는 그대로의 서울>을 알리고 싶어 <서울 600년사>사이트에서 서울의 역사를 참고했고, 최창조교수님의 한국의 풍수사상등을 참고하였으며, 형산정경연 선생님의 설명을 수록하였다. 그리고 서울의 보국과 내사산 외사산을 파악하고, 청계천과 한강의 흐름과 합수처를 알려, 서울을 사랑하고 서울을 알고자하는 사람들에게 서울을 알리고 싶은 마음으로 이 글을 시작했다.


1. 서울의 역사 - <서울600년사>에서
한강을 끼고 그 남북에 위치한 지금의 서울지역은 아득한 옛날부터 선인들의 생활의 터전, 문화의 발상지가 되었다. 성동구 왕십리 응봉에서 발견된 무문토기인의 주거지, 강동구 암사동에서 발견된 원시농경시대의 주거지등은 이 지역이 선사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의 집단생활처가 되어 왔음을 말하여 주고 있다.
백제의 처음 도읍지는 지금 삼각산하의 강북 위례성이었다.
고구려 문주왕의 남천으로 서울지역은 고구려의 통치권내에 들어가게 되었으며,북한산군(남평양)을 설치하였다. 신라 통일 이후 이 지역이 한양군으로 되었고, 고려 문종22년에 신궁을 남경에 창건하였다.

조선왕조 태조 3년 한양천도를 단행하고, 그 후 다시 정부가 개성으로 옮겨가 있은 적이 있었지만, 태종 5년(1405)에 다시 한경 정도함으로써 서울은 융희 4년(1910) `경술국치`가 있기까지 5백여 년간 이 나라의 수도 한성부로 존속되었다.

1946년 8월을 기하여 서울특별자유시의 헌장과 서울특별자유시 설치에 관한 법령이 제정 공포되니 여기에 의하여 서울은 종전의 경기도 관할 하에서 특별자유시로서의 새로운 구성을 보게 되었다.


2. 서울지명의 변천
서울지역의 지명은 삼국시대부터 문헌에 보인다.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3국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금의 서울지역이 마한(馬韓) · 진한(辰韓) · 변한(弁韓)의 3한 중 마한에 속하였지만, 마한 54소국 중 어느 소국이 지금 서울지역에 위치하였던 것인지는 아직까지 정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삼국사기』에서는 초기부터 지금 서울지역의 명칭이 보인다. 즉 『삼국사기』 백제본기중 시조 온조왕 기사(記事)를 보면,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아들 비류(沸流) · 온조(溫祚) 형제가 졸본부여에서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남행하여 한산에 와서 부아악(負兒岳)에 올라 거주할 땅을 보았으며 비류는 미추홀(彌鄒忽, 지금의 인천지방)로 가고,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하여 백제를 건설하였다고 하였는데, 여기에 보이는 한산(漢山), 부아악(負兒岳), 위례성(慰禮城)이 모두 지금의 서울지역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온조왕 13년(B.C. 6)에 왕이 한수 남쪽을 순시(巡視)하고, 그곳이 도읍할 만한 곳이라 하면서, 한산 아래 목책(木柵)을 설치하고, 위례성의 민호를 옮긴 다음, 궁궐을 짓고, 이듬해 천도하였다고 하였는데, 여기에 보이는 한수는 지금의 한강, 한산은 지금의 남한산을 말하는 것이니, 백제의 수도가 이 때 한강 북쪽 위례성에서 한강 남쪽 남한산 아래로 옮겨 갔던 것을 알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이상에 보이는 기록에 의하여 삼국시대 초기에 지금의 서울지역은 한산 · 위례성 등의 지명으로 불려졌던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남진으로 인하여 이 지역은 고구려의 북한산군 · 남평양으로 되었으며, 신라 진흥왕 때(540∼575)에는 북한산주로 되고, 신라 통일 후 경덕왕 때(742∼764)에는 한양군으로 고쳐졌다. 그중 위례성의 지명은 목책 즉 우리, 울을 의미한 것으로 보여지며, 한산은 남한산의 대칭으로 불리던 북한산의 원명 한산 · 한뫼에서 연유된 것임은 물론, 한양은 한산의 남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려초에는 지금 서울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양주를 설치하였, 양주를 남경으로 승격하니, 이것은 지금의 서울지역이 남쪽의 서울 즉 도읍지의 일반적인 명칭으로 불리게 된 시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몽고의 대전란을 치른 후 충렬왕 34년(1308)에는 다시 통일신라 때의 한양군명을 취하여 한양부로 고쳐서 고려말까지 이르렀다.

한성부 다음에 있었던 경성부는 종래 수도를 중심으로 하는 성곽은 수도 즉 서울의 방위시설, 경역을 이루었던 만큼 경성의 칭호는 서울의 성곽만이 아니라, 수도 서울 전체를 의미하는 명칭으로 쓰여지게 되었다.

풍수적인 서울의 지명유래는 이태조가 도성 공사를 하면서 어디서 어디까지 성을 쌓아야할지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는데, 어느 날 큰 눈이 내려 살펴보니 눈이 하나의 선을 따라 선 밖에는 눈이 쌓여있고 선 안쪽에는 눈이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우연이 아니고 필시 하늘에서 내린 뜻이라 생각하고 그 선을 따라 도성(都城)을 쌓도록 하였다. 사람들은 눈이 울타리를 만들었다고 하여 `설(雪)울`이라 불렀고, 설울이 `서울`로 발음되면서 오늘날 서울이 유래되었다.


3. 고지도에서 보는 서울도성
서울성곽은 곧 도성으로 수도를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다. 태조 5년(1396) 쌓기 시작하여 세종 때 완성되었는데 총 길이는 17km이다. 북악산, 타락산(낙산), 남산, 인왕산의 정상을 산마루를 타고 길고 구부러지게 연결하고 4대문과 4소문의 성문을 두었다. 고지도에는 도성도, 경기도, 경기도도, 팔도도, 조선총도등이 있다.

이 도성들을 고지도에서 볼수있다. 그중에 동여비고에는 사대문 과 사소문을 중심으로 다리, 성문등을 개략적으로 그렸다.

사대문은 동대문인 흥인지문과 서대문인 돈의문, 남대문인 숭례문과 북대문인 숙정문(숙청문)이고, 사소문은 간방의 동소문은 혜화문(홍화문)이며 곤방의 서소문은 소의문(소덕문)이고 곤방의 북소문은 창의문(자하문)이고 손방의 남소문은 광희문(수구문,시구문)으로 지도상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도성도-동여비고 1685년 양산 대성암 소장


18세기 후반의 경기도에는 산맥과 하천, 도로망을 잘 그렸다.
경기도 - 정신문화연구원 소장


겸재의 도성대지도(서울시사편찬위원회 소장)


1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조선총도이다.
동람도의 팔도총도의 영향을 받았으나 몇가지 내용을 고치고, 지도 여백에 백두대간에 대하여 설명하였고, 하단에는 한양의 8대문과 궁궐의 명칭, 5부의 48개 방명을 일일이 적어 놓았다.
좌해도-고려대학교대학원 도서관 소장


산맥도가 잘 그려진 대동여지도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중에서 한양


4. 현재의 서울
서울은 풍수지리에의 이루어진 도시이므로 풍수지리적 입장에서 고찰해야한다. 우선 한 도시를 이루는 데에는 주산이 있어야 하는데 서울의 주산은 북악산이요, 중조산은 보현봉, 태조산은 도봉산이다.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남으로 뻗어 나온 백두대간용이 지리산 천왕봉까지 가는 도중에 추가령에서 한북정맥을 분맥한 다음 서남진(西南進)하여 평강 백암산(1110m), 김화 적근산(1073m), 대성산(1175m), 포천 백운산(904m), 운악산(현등산, 935.5m), 죽엽산(600.6m), 광릉 운악산(234.8m), 용암산(476.9m), 축석령 고개를 넘어 양주 불곡산(360.8m), 의정부 홍복산을 거쳐 서울의 태조산인 도봉산(716.7m)을 기봉한다. 도봉산(716.7m)은 우이령에서 과협하여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 즉 삼각산(북한산,화산836m)을 만든 다음 굴곡 위이한 용은 중조산인 보현봉을 만들고 형제봉(462m)을 이루고 정릉고개에서 과협하여 인수봉과 같은 형태의 목성체의 북악산을 만든다.

서울의 보국 산맥도 : 형산 정경연



북악산의 주맥은 경복궁근처로 떨어진다(사진1)
사진1 남산에서 본 서울의 주맥 (보현봉에서 북악산,경복궁까지)


보현봉에서 우이령고개로 과협하는 용을 보호해주는 형제 봉
사진2 북악산길 팔각정에서 본 보현봉과 형제봉

정릉고개에서 과협한 용은 다시 북악산길 봉우리를 만들고 계속 변화하면서 팔각정휴게소를 지나 좌측으로 한 능선을 낙산(駱山)까지 내려보내 청룡을 만든다
내청룡(內靑龍)은 삼청터널 위로 혜화동, 동숭동, 이화동을 거쳐 이화여자대학 병원이 있는 낙산까지 이어지는 능선이다. (사진3)
사진3 남산에서 본 서울의 청룡자락


북악산 우측으로 인왕산을 지나 창의문(자하문), 인왕산, 무악재를 지나 금화터널 위로 이어지는 능선이 백호를 이룬다.(사진4)
사진4 남산에서 본 서울의 백호자락(인왕산)-건방의 황천살



안산은백호 능선이 이어져, 서대문에서 정동자락으로 하여 남대문에서 회현동으로 이어져, 북악산을 바라보고 서있는 남산이다.(사진5)
사진5북악산길 팔각정에서 본 남산

사진6 이순신 동상 앞에서 본 북악산 사진7 북악산과 닮은 북한산 제1봉 인수봉

사진8 과천에서 본 관악산 태조 3년(1394) 10월 25일 지금의 수도로 정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약 600여 년간에, 서울은 많은 변천이 있었다. 전도 당시의 서울은 도성내를 말한다. 이를 지형적으로 보면 북쪽의 백악산(북악산, 342m) 동쪽의 낙타산(125m), 남쪽의 목멱산(남산, 265m), 서쪽의 인왕산(338m)의 이른바 내사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서 약 500만평에 불과한 지역이었다.

오늘의서울시는 북쪽의 고양시와의 경계에 높이 솟은 북한산(836m) 서쪽의 고양시 및 김포시와의 경계에 절벽을 이룬 덕양산(행주, 125m), 남쪽의 과천시 · 안양시와 경계를 이룬 관악산(829m), 동쪽의 구리시와 경계를 이룬 용마산(348m)의 이른바 외사산으로 둘러싸인 약 627㎢의 넓은 지역을 말하게 되었다. 비각을 중심으로 전자는 반경 약 2㎞ 이내가 되고, 후자는 반경 약 8㎞ 이내의 지역(지금의 수도권 지역)이 된다.

풍수에서 국세를 이루는데 중요한 것은 산과 물이다. 서울의 물은 북악산, 인왕산과 남산의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이 시청앞에서 광교,수표교, 오간수교, 영미교, 관수교를 지나, 정릉천과 합류하고, 성북천을 만나고, 중랑천을 만나 한강에 이른다.

서울의내수는 청계천이요, 외수는 한강이다.
서출동류하는 청계천과 동출서류하는 한강이 만나 서울을 감쌓주니 서울의 명당을 넉넉하게 한다. 사진9 검단산에서 보는 남한강과 북한강의 만남

사진10 달맞이공원에서 본 청계천과 만나 내려오는 한강



사진11 달맞이공원에서 본 여의도쪽으로 흐르는 한강(관악산이 보인다)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 한강으로 이루는 곳으로 금호동1가에 있는 응봉산에 서울의 합문이 보인다.


사진12 성수대교 근처에서
사진13 북부간선도로에서

청계천 본류만 해도 복원 논의가 활발한 광통교 부근∼동대문 사이에 14개의 다리가 있었다. 대표적인 다리가 모전교, 대광통교(광교), 장통교, 광제교, 수표교, 하랑교, 새다리(신교), 효경교(새경다리), 태평교(마천교·오교), 오간수교, 금청교, 혜정교, 영도교 등이다.

1:25000 서울지도
청계천의 큰 물길은 지금의 보신각 남쪽의 광교에서부터 청계천3가,5가를 거쳐 동대문까지 흐르고, 상왕십리에서 정릉천을 만나고, 용두동에서 성북천을 만난 다음, 한양대 살곶이다리 아래에서 중랑천을 만나 옥수동에서 서울의 외강수인 한강을 만난다.



사진자료 서울600년사중 청계천에서 1890년대 청계천의 모습





1920년대의 빨래하는 아낙네의 모습 [1950년대 청계천 복개전 여름 장마때의 광교모습]
-중구문화원 제공 복개후의 청계천
청계천의 미래



5. 서울 예찬론-한국의 풍수사상
1) 택리지(팔도총론 경기도조)
함경도 안변 철령의 일지맥이 남쪽으로 5,6백리를 달려 양주에 와서는 작은 산으로 되고, 다시 동쪽으로 비스듬하게 돌아들면서 갑자기 솟아나와 도봉산 만경봉이 되었다. 여기서 동남향하여 약간 끊어진 듯하다가 다시 우뚝 솟아 삼각산 백운대를 이루고, 또 남쪽으로 내려가 만경대가 되었는데, 여기서 한 가지는 서남쪽으로 갔고 다른 한가지가 남향하여 백악산이 되었다. 형가에 이르는 하늘을 꿰뚫는 목성의 형국이며 구성의 주산이다

2) 동국여지승람
고조선은 마한의 땅이다. 경도는 화산을 북쪽의 진산으로 하여 용이 도사리고, 호랑이가 걸터앉은 형세이다.

3) 김위제-오덕구
고려 숙종때의 김위제는 오성의격에 따라 서울을 오성귀단에 의한 오성귀원격의 길지라 했다. 오덕구란 중앙에 면악(백악)이 토덕, 북에 감악(적성)이 수덕, 남에 관악이 화덕, 동에 남행산이 목덕, 서에 북악(부평)이 금덕으로 목화토금수의 오행에 가장 이상적인 형태이다.

4) 보우-도참설
남경으로 도읍을 옮기면 열 여섯 나라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조공을 받치게 된다

5) 무학대사-박자초 무학
무학이 한양은 인왕산으로 진산을 삼고 백악과 남산으로 좌우의 청룡, 백호를 삼으면 오백년은 국태 민안 하리라 하였다.


6.서울의 당면과제

도선국사와 정도전의 엇갈린 의견 속에서 잡아진 서울의 터는 그 동안 유명한 풍수지리가들의 분분한 의견이 있어왔다.
주산을 어떤 산으로 보느냐, 향의 문제, 주맥이 경복궁이냐 아니냐, 청아대문제, 건해풍의 해로움 등등...

서울의 600년 역사가 결코 순탄치 않았음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사산에 의한 도성내의 서울이 아니라 외사산에 의한 도성 밖까지, 심지어 한강 건너 강남까지의 서울로 자리하고 있다. 또한 수도권지역까지 서울화 하고 있는 실정이다.

커다란 맥락으로 보았을 때의 서울은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한강을 마주하며 이루어진 수많은 산(용)들이 보호고,청계천과 한강의 대강수가 환포하는 천혜의 명당이라 할 수 있다.
백호의 심학산(793.6)과 가현산(265.3), 덕양산(124.8)과 개화산(128.4). 청룡의 용마산과(348) 대모산(293), 예봉산(685)과 검단산(536)이 그러하다. 어느 한 산도 비주함이 없이 서울을 감쌓안고 있다.
또한 청계천과 한강의 환포가 서울을 길지로 만들어주고 있다.

그동안 여러 풍수가들의 의견이 참작되어, 개발에만 급급하던 서울시도 이제는 환경보호차원에서 남산복원사업과 낙산 복구사업, 안양천복구사업, 성북천복구사업, 청계천복구사업이 진행 또는 계획 중에 있다.

이제는 서울의 조산인 북한산의 외각순환도로 터널공사취소, 시청앞을 서울시민의 휴식터인 시만광장으로 만들자는 문제등이 남아있는 상태이다. 종교계와 환경운동가들이 지키고있는 북한산 외각순환도로 터널공사 반대운동에 우리 풍수계에서도 동참하여 북한산 지킴에 한몫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한양대 건축과 서현 교수님과 형산 정경연선생님은 육조거리였던 광화문을 역사의 거리로 복원하자고 하신다.

예전에 우리는 청계천의 복원사업을 감히 꿈꾸지 못했었지만, 여러 풍수가들의 의견과 환경운동가들의 힘과 서울시의 결단력이 역사를 바로 잡고 있는 것이다. 풍수를 사랑하고, 풍수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조산 북한산의 용맥과 정기를 보존하고, 청계천과 남산을 복원하여 조상님들의 깊으신 뜻을 이어받아 대-한민국을 세계로 이끌어 나아가는 힘을 우리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우리세대의 몫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