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풍수이야기서울 도성(都城) 이야기

연관목차보기

서울 도성(都城) 이야기

일명 설성(雪城)이라고 불렀던 한양 도성은 도읍지의 성이라는 뜻이다. 설성은 이 태조가 눈이 내린 자국을 보고 이 성을 쌓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풍수지리상 서울의 내사산(內四山)이 되는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을 연결하여 쌓았는데 궁궐, 종묘사직과 관아를 지키고 외적을 방어하기 위한 도읍지의 필수적 시설이다. 성벽의 높이는 일정하지 않으나 높은 곳은 12m에 이르며 동서남북에 4대문(大門)을 두었다. 그리고 그 중간 중간에 4소문(小門)을 두어 팔괘(八卦) 방위에 배치하였다. 도성은 총 18.9Km이며 태조 4년(1395년) 도성 축조도감을 설치하고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서북면, 동북면 등지에서 동원된 118,700명의 장정을 투입하여 1396년 1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일부 쌓았다. 농번기에 공사를 잠시 중단하였다가 8월 6일부터 9월 24일까지 197,400명이 동원되어 완성하였다. 총 공사 기간은 98일이 걸린 셈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자꾸 붕괴되어 세종 때 남산에서 인왕산까지 32만2천4백 명을 동원하여 석축으로 고쳐 쌓았다. 또 숙종 때는 인왕산 동북쪽에서 낙산까지 쌓았는데 장방형의 돌을 꼭꼭 맞추며 규격이 정연하게 쌓았다. 아주 견고하게 쌓은 성벽은 지금까지 한 곳도 기초가 물러난 곳이 없어 조선 축성술의 우수성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튼튼한 성벽을 가지고도 전쟁 때마다 한번도 도성을 지켜내지 못해 아이러니 하다. 1910년 조선을 침략한 일제는 서울을 수도로 인정하지 않고 일개도시로 취급하면서 도시계획이란 미명아래 곳곳의 도성을 파괴하였다.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 일대의 성벽은 거의 이때 없어졌다.

82. 4대문(大門) 4소문(小門) 명칭

동대문(東大門)은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오행 중 목(木)에 해당되는 인(仁)을 표시하였다. 목은 동쪽이므로 풍수지리 적으로 약한 동쪽을 보완 해주기 위해 흥인(興仁)이라 하고 지(之)자를 더 넣었다. 또 옹성을 쌓아 허함을 보강하였다.

서대문(西大門)은 돈의문(敦義門)으로 오행 중 금(金)에 해당되는 의(義)를 표시하였다. 서쪽에는 중국과 통하므로 중국과 의리를 더욱 돈독히 한다는 의미다.

남대문(南大門)은 숭례문(崇禮門)이며 오행 중 화(火)에 해당되는 예(禮)를 표시하였다. 남쪽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불로서 다스린다는 의미고, 불이 잘 타오르도록 세로로 현판을 하였다.

북대문(北大門)은 숙정문(肅靖門)이며 숙청문(肅淸門)이라고도 하였다. 이 문은 사람의 출입을 위하여 사용한 적은 거의 없이 수 백년 동안 닫혀 있었다. 이 문을 열어놓으면 북쪽은 수기(水氣) 즉 음기(陰氣) 많아 장안의 부녀자들이 풍기가 문란해지고 놀아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름도 엄숙히 음기를 다스린다는 의미로 지었다. 그러나 실제는 이 문이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산과 종묘의 주산인 응봉으로 통하기 때문에 지맥이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문을 닫아 놓았다.

동소문(東小門)은 혜화문(惠化門)이며 북대문과 동대문의 중간 즉 간방(艮方)에 위치한다. 혜화(혜화)란 은혜를 베풀어 교화한다는 뜻인데 여진족의 사신이 출입하던 곳이기 때문에 그들을 교화한다는 의미에서 이름한 것이다. 여진족 사신의 숙소인 북평관(北平館)이 그 근처에 있었다. 처음에는 홍화문(弘化門)이라고 하였다가 창경궁의 정문 이름이 홍화문이어서 혼동을 피하기 위해 바꾸었다. 그런데 이 문루 바닥에는 용이 아닌 봉황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그 일대에 새떼가 많아서 새의 피해를 막기 위해 새 중의 왕인 봉황을 그렸다고 한다.

서소문(西小門)은 소덕문(昭德門)이라 하였다가 성종 때 부왕인 예종 왕비의 시호를 휘인소덕(徽仁昭德)이라 하면서 중복을 피하기 위해 소의문(昭義門)으로 바꾸었다. 소의(昭義)란 옮은 것을 밝힌다 또는 덕과 의를 숭상한다라는 뜻이다. 남대문과 서대문 사이 곤방(坤方)에 위치하고 있으며 의주로 넘어가는 길이다. 조선조 때 도성에서 사람이 죽으면 반드시 두 문으로만 관이나 상여가 나가게 되어 있는데 남소문인 광희문과 서소문인 소의문이었다.

북소문(北小門)은 창의문(彰義門)이며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하였고 북문(北門)이라고도 불렀다. 북대문은 항상 닫혀 있었고 대신 이 문을 열어놓았기 때문에 북문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 건방(乾方)에 위치하고 있다. 이 문 위에는 나무에 새긴 닭을 걸어두었는데 성문 밖의 지형이 마치 지네와 같으므로 지네의 상극인 닭을 메달아 그 기를 누르기 위함이다. 창의(彰義)란 의를 기리고 표창한다는 뜻이다.

남소문(南小門)은 광희문(光熙門)이며 속칭 수구문(水口門), 시구문(屍口門)이라고 불렀다. 남대문과 동대문 사이 손방(巽方)에 위치하며 도성의 청계천 물이 이곳으로 빠져나가므로 수구문이라 하였고, 서소문과 함께 사람이 죽으면 시신이 나가는 문이므로 시구문이라 불렀다. 광희(光熙)란 광명을 뜻하지만 조선왕조 마지막 연호인 광무(光武)와 융희(隆熙) 앞 뒤 글자를 합한 것과 같아 이것이 시체처럼 밖으로 나가기 때문에 조선왕조 종말을 뜻한다고 풀이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