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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놀이장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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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치기

시대 : 조선이전
연령 : 성인
성별 : 남성
도구 : 있음
세시놀이 : 아님
대동놀이 : 아님

가. 놀이의 개관
공치기 놀이의 한가지. 두 편으로 나뉘어 각각 공채를 가지고 장치기공을 쳐서 상대편의 끝선에 넘기거나, 구문(毬門)을 만들어 그 안에 넣는 편싸움이다. 음력 정초나 겨울 농한기에 약 15~20세 정도의 청장년들이 주로 하는 놀이였는데, 오늘날의 하키와 유사한 놀이이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말을 타고 하는 '마상격구(馬上擊毬)'와 걸어서 하는 '도보격구(徒步擊毬)'가 있었는데, 마상격구는 기록에만 남아 있고 걸어서 하는 도보격구는 '장치기'로 발전하여 오늘에 전하고 있다. 한자로는 봉희(棒戱)· 타구(打毬)·격구(擊毬)라고 하고, 지방에 따라서 공치기·짱치기·얼레공치기라고도 한다.

나. 놀이의 유래
격구하는 모습-전통마상무예협회

이 놀이는 우리 나라뿐 아니라 중국·일본·페르시아·티베트 등지에서도 행해져 왔다. 이 놀이가 페르시아에서 처음 시작되어 티베트와 당(唐)나라를 거쳐 고구려와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설이 있는데, 정확하지는 않고 추측에 불과하다.
장치기도 서로 편을 갈라 돌을 던지며 싸우는 석전(石戰)과 같이, 그 연원을 농경시대 이전의 수렵시대로 소급해 볼 수 있다. 즉 생존을 위하여 사용되던 돌이나 몽둥이 등이 점차 놀이 도구화되어 체력단련과 무술훈련의 수단으로 발전해온 것이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고려 때 송문주(宋文·) 장군이 산성에서 아이들을 모아 격구를 시킨 데서 유래하였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고, 특별히 산성에서 무인이 지도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 이야기들은 이 놀이가 군사훈련과 관련됨을 말해준다.
문헌기록으로는 《고려사(高麗史)》권1에 "상주의 적수 아자개가 사자를 보내어 귀순할 뜻을 전하니, 왕이 명하여 그를 맞이하는 의식의 예행을 구정(장치기 경기장)에서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가 7세기 중엽이니, 삼국시대에 이미 장치기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또《고려사》권14에 여성도 격구를 즐겼다고 하는데, 당시 여성들의 활달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조선 초에 지어진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권6에 "고려 때 매년 단오절에 무관의 연소자 및 귀족의 자제를 가려서 격구를 가르쳤다. ~중략~ 전후 좌우 200보쯤 길 가운데 구문(毬門)을 세운다. 왕은 경대부를 거느리고 장전에서 여악(女樂)을 즐기며 놀이를 구경하였다. 격구하는 사람들은 잘 차려입어 사치를 다한다. 만일 남이 자기보다 더 잘 차려입은 것을 보면 이와 똑같이 닮으려 하니, 일안의 값은 중인 10가의 재산에 해당한다. ~중략~"라고 하여, 고려시대의 격구는 궁중을 중심으로 한 상류층의 고급 유희로 행해졌고, 놀이에 따른 여러 가지 꾸밈새가 사치와 호화를 다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기록으로 《고려사》최충헌전(崔忠獻傳) 최이조(崔怡條)에 "최이는 이웃집 100여 구를 빼앗아 구장을 만들었는데, 동서 수백보요, 땅바닥이 평평하여 바둑판과 같다. 격구할 때마다 반드시 동네 사람들을 시켜 물을 뿌려 먼지를 적시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치에 따른 폐해를 막기 위하여 예종(睿宗) 때에는 여성 격구가 금지되었고, 충숙왕(忠肅王) 원년 5월에는 전반적으로 격구를 금지시켰으며, 공민왕(恭愍王) 23년 5월에도 격구를 금지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귀족층에게 습성화된 격구가 쉽사리 소멸되지 않아 암암리에 행해 오다가, 다시 성행되었다가 다시 금지되기를 반복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전대의 폐해를 우려하여 일시 폐지되었으나, 세종(世宗) 때에 이르러 다시 성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세종실록(世宗實錄)》권42에 "왕이 대언(代言) 등에게 말하기를, 격구는 폐(弊)가 있다고 하여 없애기를 바라는 자가 많으나, 격구는 본시 무(武)를 익히는 것으로 놀이가 아니다. 옛일을 거슬러 보면 격구하는 일이 자못 많았는데, 이는 옛 사람들이 이를 통해 무를 익히게 한 것이다. 어찌 한갓 이것으로써 인주의 폐라고 하겠는가. 다만 그 마음 쓰는 일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을 뿐이다."라고 하여 다시 격구를 부활시키니, 그 기법과 채점 방법 등이 확립되고 나아가 무관을 등용하는 도시(都試)·무과(武科)·전시(殿試)에 한 과목으로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고려시대까지는 귀족사회의 고급 유희였던 격구가, 새로운 왕조의 초기에 점차 평민들과 가까워지면서 '장치기' '얼레공치기' 등 대중적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극단적인 문치주의는 무예의 일종인 격구를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했다. 이리하여 연산군(燕山君) 때에는 기록조차 찾기 어렵게 되었고, 중종(中宗)에서 인조(仁祖) 때까지는 어쩌다 행해지다가 효종(孝宗) 때에는 자취를 감추고 만다. 그러나 양반계층의 마상격구는 사라졌지만, 땅에서 쉽게 하는 도보격구는 장치기라 하여 평민들에 의해 놀이도구며 방법을 단순화시켜, 일상의 놀이로 발전하여 근래까지 이어오다가 오늘날에는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다. 놀이의 방법
1) 놀이공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초까지는 마상격구가 행해졌기 때문에 오늘날의 축구 경기장처럼 규격을 정해서 넓은 경기장을 만들고, 주위를 화려하게 꾸몄는데 이는 귀족들의 놀이였기 때문이다.《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4권, 격구조(擊毬條)에 "출마표는 치구표에서 떨어지기를 50보, 치구표는 구문(球門:골대)에서 떨어지기를 200보, 구문 사이의 거리는 5보이다."라고 하여 규격이 정해져 있다. 그러나 최근까지 민간에서 즐기던 놀이공간은 보통 가로 15~20m, 세로 30~40m 정도의 넓은 공터에서 했다. 그러나 이러한 크기도 정해진 것이 아니라 마을상황에 따라 했으며, 동네 공터나 추수한 논바닥 등에서 많이 했다.

2) 놀이 용구
장치게(장작대기·장치기 막대), 장부랄(나무로 깎은 납작한 장치기공), 던지게가 필요한데,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4권, 격구조에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기록되어 있기를 장시(杖匙;장치게의 구부러진 곳)의 길이는 9촌(약 27cm), 넓이는 3촌(약 9cm), 병(장치게)의 길이는 3척 5촌(1.05m), 공의 둘레는 1척 3촌(33cm)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마상격구의 예이고, 현장 조사에 의하면 장치기(도보격구)의 경우는 보통 아래와 같다.
① 장치게(짝지·공채) ― 장작대기 또는 장치기 막대라고도 하는데, 소나무·호두나무·삼나무·참나무·노간주나무 등의 나뭇가지를 재료로 한다. 손잡이의 길이는 1m 10cm, 굵기는 8cm 정도이며, 장치게 발(장시)의 길이는 10~15cm로 손잡이에서 발은 거의 'ㄱ'자 형태로 꺾어진 것으로 만든다.
② 장부랄(장치기공·짱공) ― 장부랄은 나무로 깎은 납작하거나 둥근 공인데, 길이는 5~6cm이고 굵기도 5~6cm 정도이다. 보통 탱자크기만 하고 귤보다는 작다. 장부랄은 동네 목수가 만들어주기도 하였는데, 팔각형으로 깎은 것도 있다. 장부랄의 재료로는 복숭아나무가 단단해서 많이 사용되고, 삼나무나 참나무, 소나무 옹이 있는 부분을 사용하기도 했다. 잃어버릴 것에 대비하여 두 개 정도 더 준비한다.
③ 던지게 ― 장치게 발에 나뭇가지를 하나 남겨서 그것을 장치게 발끝에 철사로 동여매어 오목한 홈이 생기게 하고, 그 홈 밑면을 철사나 삼 껍데기로 망을 만들어 장부랄이 빠져나가지 않고 걸리게 하는 도구이다. 맨 뒤에 있는 한 사람만 '던지게'를 사용하는데, '던지게'가 부러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굴러오는 장부랄을 걷어내는 데만 사용하였다.

3) 놀이방법

마상격구의 놀이방법은 더 이상 현실성이 없기 때문에, 도보격구인 장치기의 놀이방법을 자세히 소개한다.
승부를 내는 방법은 경기장 끝선을 통과하면 점수를 내는 방식과 구문(골문)을 만들어 그 안에 넣는 방식이 있는데, 전자가 더 일반적이다.
① 놀이인원 ― 편을 나누어 해야 하기 때문에 10명 이상, 20명 안쪽이라야 적당하다.
② 놀이시작 ― 편을 나누는데 마을끼리 할 경우 윗마을·아랫마을 또는 동부·서부로 나누어 하고, 같은 마을끼리 할 경우 장치게를 모두 모아 섞은 다음 반으로 나눠 장치게 임자가 집어들면 그것이 편이 되기도 한다. 그밖에 가위바위보로 편을 짜거나 다양한 방법으로 나눈다. 놀이 시작은 각 편의 대장이 나와서 하는데, 방법은 아래와 같다.
(ㄱ) 던질장 ― 심판이 양편 대장들의 장치게를 던지면 양편 대장들은 달려가서 장치게를 먼저 들고 돌아오는 대장이 공을 상대방 진영으로 쳐내면서 시작한다.
(ㄴ) 십장 ― 중앙선에 파놓은 구멍에서 심판은 장치게 위로 공을 던져 올리는데, 이 때대장이 떨어지는 공을 친다. 나머지 공격수들은 상대편 대장이 떨어지는 공을 못 치도록 상대편 대장의 장치게를 칠 수 있다. 어느 편이든 대장의 장치게에 공이 닿으면 놀이가 시작된다.

(ㄷ) 천장(웃짱) ― 중앙에 양편 대장들만이 나와서 장치게를 높이 치켜들면, 그 위로 심판이 공을 올리고 떨어지는 공을 먼저 상대진영으로 쳐내면 놀이가 시작된다.
(ㄹ) 땅장(아랫짱) ― 중앙에 양편 대장들만이 나오고 중앙에 파놓은 구멍 안의 공을 심판의 호각소리에 맞춰 먼저 상대진영으로 쳐낸다.
(ㅁ) 돌림장(소래기) ― 중앙에 양편 대장들만이 나와서, 심판의 호각소리에 맞추어 제자리에서 한 바퀴 또는 몇 바퀴를 돈 다음, 구멍 안에 있는 공을 먼저 쳐내면 시작된다.
③ 놀이규칙 ― 절대로 손과 발을 공에 대서는 안되며 반드시 장치게로만 공을 쳐야 한다. 상대편의 진로를 방해하거나 밀거나 장치게로 상대편 종아리 같은 곳을 치면 반칙이다. 또 장치게가 머리 위까지 올라가면 반칙이 되나 고의가 아니면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러나 심하게 때리거나 고의적으로 손이나 발을 대면 반칙이 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경기장 밖으로 퇴장시키기도 한다.
④ 점수내기 ― 상대편의 정해진 선 밖으로 나가면 점수를 1점 얻는다. 즉 직사각형의 짧은 면이 정해진 선이고 선 밖으로 쳐서 밀어내면 1점을 얻는 것이다. 한 골을 넣게 되면 '한 판 이겼다.'라고 하고 땅에다 기록해둔다.
⑤ 승부내기 ― 정해진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했고, 짬짬이 식사를 하기 위해 쉬었다가 계속했다. 따라서 정해진 점수가 없다. 그러나 5점 내기 또는 10점 내기를 정해서 먼저 그 점수에 도달하는 편이 이기게 된다.

라. 교과서 속의 놀이
이 놀이가 무예 연마에도 활용되었다는 것은 신체발달과 조직력·판단력 등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냥 뛰기도 어려운데 막대를 들고 작은 공을 이리저리 치고 다니거나, 자기편에게 연결해주기 위해 움직이다 보면 지구력·근력·조정능력·민첩성 등이 골고루 발달된다. 또한 편을 나누어서 하는 놀이이기 때문에 같은 편끼리 힘을 모으는 과정에서 협동심이 길러지고, 전체적인 놀이 흐름을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판단력이 길러지게 된다.

마. 기타
1931년 2월 5일 동아일보엔 〈우리 경기 부흥의 봉화, 장구(杖毬·杖球-얼레공) 대회〉란 기사가 소개되고 있다. 당시의 대회 주최는 수원청년·소년동맹 양단지부가 했고, 〈전조선 얼레공대회〉란 명칭으로 양감면 용소리 천변에서 개최되었음을 자세히 알리고 있다.
또한 경남 밀양에서는 1970년 12월 3일에 밀양문화원 무안분원 발족식에서 타구대회를 열었는데, 각 기관 및 청년팀이 8개나 참가하는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현장 조사에 의하면 1950년 6·25 전쟁 전까지는 전국 어느 곳에서나 흔히 하던 놀이였는데, 전쟁을 기점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참고문헌>
한성겸, 《재미있는 민속놀이》, 금성청년출판사/평양종합인쇄, 1994.
심우성, 《우리 나라 민속놀이》, 동문선,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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