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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혼속

우리나라의 서류부가 혼인풍속은 고구려, 신라시대를 거쳐 고려, 조선 초기까지 계속되었다. 신라의 왕위계승에서 박씨, 석씨, 김씨의 세 성씨가 번갈아 왕이 된 사실은 세 성씨가 서로 통혼을 하였고 왕위를 계승할 때 아들과 사위, 친손과 외손을 차별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이러한 가족형태는 혼인을 한 부부의 거주처 제도가 부처(婦處)에서 부처제(夫處制)를 기본으로 한 것에서 비롯된다.


골품(骨品)과 두품(頭品)제도가 엄격했던 신라사회에서는 특히 그 상류 귀족층에서 친족 혼이 많이 행해졌다. 특히 성골은 그 부모가 동성(同姓)왕족의 근친 간이었다. 왕실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근친혼을 하는 풍속이 성행했다. 그래서 문종 35년(1081년)이후로는 4촌 이내의 근친혼을 금하고, 대공친(상을 당해서 9개월간 상복을 입는 가까운 친척인 종형제, 자매, 증자부, 증손녀, 질부, 시조부모, 시질부)과 혼인하여 낳은 자손은 벼슬에 나가지 못하게 했으며, 숙종 원년(1314년)에는 공신들의 동성혼인을 금했다.


신라의 혼례음식에 관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 신문왕 3년에서는 “신라에서는 혼가의 예로서 오로지 술과 음식이 있을 뿐이고, 그 경중(輕重)은 빈부의 형편에 따른다. 한편, 신문왕 3년에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기로 정하고 납채를 보내는데 폐백이 50수레이고 미(米), 주(酒), 유(油), 밀(蜜), 장(醬), 포(脯), 시(?), 혜(醯)가 135수레이며 조곡이 150수레였다”고 한다. 신문왕 때 폐백의 예로 미루어 보면 남자 집에서 여자 집으로 보내는 것이 관례이고 폐백음식이 일상의 기본식 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