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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혼례

혼인을 갓 하고난 신랑 신부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 생활과 풍속(속), 서문당' 혼인을 갓 하고난 신랑 신부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 생활과 풍속(속), 서문당'
상견례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 생활과 풍속, 서문당' 상견례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 생활과 풍속, 서문당'

조선시대 초기까지는 전대(前代)의 혼속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세종실록(世宗實錄),1472년'권40 세종10년 4월 조에 “우의정, 형조판서, 예조판서, 참의 등이 아뢰기를 우리나라에서는 남자가 여자의 집에 왕래하므로 모지손(母之孫)이 한방에 함께 거처하여 서로 친애하는 풍속이 매우 두텁다.” 동권63 세종 16년 3월조에는 “혼례는 인륜의 대사(大事)이고 음양에 따르는 바이다. 남부여가(南婦女家)의 풍습이 오랫동안 내려오는 터라 인정이 여기에 따르고 있어 급격변화는 쉽지 않다.”고 하여 서류 부가의 혼속이 계속 이어지고 있음이 나타난다.

이렇게 서류부가 혼속이 이어지고 있는 한편으로는 서류부가의 혼속이 빚어내는 문제성을 거론하고,'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서 친영의 예로 혼례의 규정을 변경하고자 하는 논의가 제청되었다. 이리하여 200여 년간의 논의 과정을 거쳐 18세기 중엽에는 혼례를 치르면 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옮겨 살도록 규정이 바뀌었다.

그러나 천 여 년을 이어온 서류부가 혼속은 사회 저변에 토착된 풍속이었으므로 쉽게 변경되지 않았다. 1469년에 완성된'경국대전(經國大典)'의 ‘예조전’을 보면, 상례에 관해서는 상세한 준행규칙을 구체적으로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는 데 반하여 혼례에 관하여는 연령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 친영례의준행규정은 없다.

친영례는 오랜 시일에 걸쳐 먼저 왕가에서 선도한 이후로 차차 양반가정으로 시행되고, 18세기에이르러 전면적으로 시행된다. 그러나 전적인 친영의 예로 변경되지 않고 반친영(半親迎)의 예로 자리잡게 된다.

반친영의 예는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가서 혼례를 행하되 신부 집에서 3일 머문 후에 신랑은 신부를 데리고 신랑의 집으로 가는 것이다. 신부가 시댁으로 가는 절차를 신부우례(新婦于禮)또는 신행(新行)이라 하였다. 3일 만에 신행을 하지 않고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왕래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이는 특별한 경우에 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