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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주변국 건국신화

단편명 : 백두산 주변국 건국신화
구술자 : 연변사회과학원
수집지점 : 미상
수집시기 : 2002.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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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에 대한 숭배와 그에 관련된 개국신화

장백산은 처음부터 신비한 색채를 갖게 되었다. 고대에 불리워진 불함산(不咸山)은 몽골어로 발칸이란 말의 음역인데, 이는 선선의 산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거란국지(擧丹國誌)』에서는 ‘장백산 동남쪽 천여 리 되는 곳에 백의 관음이 살고 있는데 거기에 있는 날짐승과 들짐승들은 모두 흰색이다.’하여 장백산을 더욱 신비스럽게 하였다. 금(金)나라에서는 장백산을 ‘장백산신을 봉하고 흥국령응왕(興國靈應王)이라 하여 산 북쪽에 묘를 건립하고 묘이름을 창간이라고 하였고 다시 개천홍성제라고 책봉하였다.’하여 장백산을 저들의 발상지로 삼았다.
청나라에서는 장백산을 조종의 발상지로 높이 존대하였으며, 강희(康熙)황제는 1677년 송화강변을 순시할 때 멀리서 장백산을 바라보면서 제사를 지내고 장백산신(長白山神)으로 높이 존대하였다. 옹정(雍正)황제는 길림의 소백산(小白山)에다 망제전(望祭殿)을 세우고 신안(神案)에 다 만문과 한문으로 쓴 ‘장백산지신(長白山之神)’이란 위패를 모셨다.
『청태조실록(淸太朝實錄)』에는 장백산을 ‘선세가 발상한 발원지’라고 기재하였다.
조선민족은 먼 옛날부터 장백산을 빛(光) · 하늘(天) · 신(神) · 밝(明)등과 같은 듯이 담겨져 있다고 결론짓고 있으며, 동시에 장백산을 영지(靈地)로 간주하고 크게 숭배하였다.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에서는 백두산은 한 나라 산의 조종이라 하였고, ‘백산(장백산)은 동북 여러 산의 조종이며… 광무7년에 나라에서 5악을 정하였는데 백두산을 북악으로 하였다.’고 기재하고 있다.
현대시조 조기천(趙基天)은 「백두산」이란 장편 서사시에서 백두산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동방의 줄기 줄기를 선축인 양 한줌에 걷어쥐고 만리창공에 백발을 휘날리며 아득한 태고로부터 이 나라 풍상의 나날을 낱낱이 굽어 천산 성악(聖岳)아! 백두산아!
이처럼 백두산은 예부터 사람들이 흠모하는 명산인만큼 거기에 따르는 건국신화도 많았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산악 숭배의 숭산사상은 산을 신성시하고 산에는 반드시 신령(神靈)이 있다고 믿는 일종의 원시신앙으로 나타났으니, 중국의 오악(五岳), 네팔과 중국 접경지의 히말라야산(喜馬粒亞山), 그리스의 올림퍼스, 바빌론의 에크르산에 대한 신앙이 모두 이에 속하는 것이다.


(1) 청(淸)의 건국신화
장백산을 발산지라고 여긴 청나라는 백두산을 ‘용흥지지(龍興之地)’라고 여기며 크게 숭배하였다. 『만주원류고(滿洲原流考)』에 의하면, 장백산 동쪽 부쿠리 아피에 부라호리(원지라고도 함)라고 부르는 못이 있었다. 전하는 데 의하면, 옛날에 세 명의 처녀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이 못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한창 목욕을 하고 있을 때 하늘로부터 까지 한 마리가 입에 붉은 과일 한 알을 물과 와서 계녀(桂女)라고 부르는 처녀의 웃옷에 그 과일을 놓고 사라져버렸다. 목욕을 다하고 못에서 나와 옷을 입으려던 계녀는 붉은 과일을 이상히 여기던 끝에 그것을 통째로 삼켜버렸다. 그 후 계녀는 잉태하여 드디어 남자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는 나면서부터 말을 곧잘 하였으며 용모가 비범했다. 점차 자라면서 총명과 재질이 뛰어났다. 어머니 계녀는 아들이 다 크자 자기가 붉은 과일을 먹고 잉태한 사실을 아들에게 들려준 다음 아이의 성을 ‘아이신줴러’라고 지어 주었으며, 이름을 부쿠리옹순(布苦里雍順)이라고 지었다. 계녀는 부쿠리옹순에게 작은 배 두 척을 만들어 주면서 말하였다. “하늘이 너를 태어나게 한 것은 어지러워진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도탄 속에서 건지게 하려는 것인즉 너는 이 배를 타고 네 갈 길을 택하여 가거라.”말을 마친 례녀는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부쿠리옹순은 하늘로 오르는 어머니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어머님의 분부를 명기하고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 준 작은 배에 앉아 강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얼마나 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삼성이라는 지방에 와 정착하게 되었다. 이때 장백산 동남쪽 오도리라고 하는 곳에는 유력한 자 3명이 서로 추장 자리를 다투어 크게 싸우고 있던 시기였다. 마침 그 중 한 사람이 강에 내려와 물을 마시려다가 언덕에 단정히 앉아 있는 부쿠리옹순을 보고 그의 비범한 용모에 그만 겁을 집어먹고 달려가 많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금방 강에 갔다가 한 남자를 보았는데 그 용모가 기이하고 비범한 사람인즉 모두 함께 가서 만나봅시다.”고 하였다. 여럿이 함께 가 그의 내력을 알아보았는데, 부쿠리옹순이 대답하기를 “나는 천녀의 아들로서 너희들의 난을 평정하기 위하여 여기에 왔는데 성은 아이신줴러하고 한다.”고 하였다.
이에 일동은 서로 쳐다보면서 “이는 완전히 하느님이 낳으신 성인이고 우리들의 구세주라 결코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손과 손을 마주잡아 사람 가마를 만들어 오도리성(敖東城)에 거주케 하였다. 여러 사람들은 아이신줴러(愛新觷罹)를 패륵(貝勒)이라고 존대하여 불렀으며, 삼성(三姓)의 미녀를 골라 봉납하였다. 그 후 아이신줴러는 민주라는 국가를 건립하니 곧 청나라의 태조 ‘아이신줴러 누얼하치’라고 하였다. 이 전설에 나오는 삼성(三姓)은 지금의 흑룡강성 의란 등지인 바, 비록 황당한 전설이기는 하나 여진족이 송화강 유역으로부터 장백산 주변인 도문강 유역으로 이주하여 온 역사적 유래에 기초한 것이다.


(2) 단군신화
아주 오랜 옛날, 하늘에 환인(桓仁)이라는 임금의 서자 환웅(桓雄)이 있었는데, 그는 언제나 지상에 내려가서 이 인간 세상을 다스려 보자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아차리고 지상을 바라보다가 삼위태백이 사람들을 다스리는데 가장 알맞은 곳이라 하여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내주며 가서 그것을 다스리라고 허락하였다.

환웅은 삼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백두산) 신단(神壇)나무 밑에 내려왔다. 이것을 신시(神市)라고 하며, 이 임금을 환웅천왕이라 한다. 그리하여 환웅천황은 풍백(風伯) · 우사(雨師) ·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과 생명, 질명과 형벌, 선과 악 등 무릇 인간 삼백육십여 사를 보살펴 이 세상을 다스리었다. 이때에 한 마리 곰과 한 마리 범이 있었는데, 그들은 같이 굴속에서 살면서 항상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때 신이 범과 곰에게 신성한 쑥 한 타래와 마늘 20개를 내주면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햇빛을 백일 동안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범과 곰은 쑥 한 타래와 마늘 20개를 먹고 그날부터 굴속에 들어가 있었다. 곰은 27일 만에 여자의 몸으로 변했으나, 범은 갑갑함을 이기지 못하여 밖으로 나왔으므로 사람으로 변할 수가 없었다.
사람으로 변한 곰녀(熊女)는 아직도 남편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매번 단목 아래에서 아기를 낳게 해달라고 빌었다. 황웅이 그녀를 가긍히 여겨 몸을 변신하고 웅녀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를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이름지었다.
단군왕검은 중국 요(堯) 임금 즉위 50년경에 도읍을 평양서에 정하고 처음으로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하였다. 그후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는데, 이곳을 일명 궁홀산 또는 금미달이라고도 하였다. 그는 이 나라를 천5백 년 다스리다가 중국 주나라 무왕(武王) 즉위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자, 단군은 도읍을 장당경이라는 곳에 옯겼다. 그 후 그는 다시 아사달에 들어가 숨어서 산신이 되었다고 하며, 그때 단군의 나이가 1908세였다고 한다.
단군에 관한 전설은 사학계에 물의가 분분하여 옭고 그름을 가르기가 어렵다. 그러나 백두산과 관련된 최초의 조선 건국신화라는 것만은 의심할 바 없다.


(3) 고구려 건국신화
고구려는 중국 동북 지방에서 세워진 고대국가이다. 고구려 시조는 동명성제로서 성은 고(高)씨, 이름은 주몽(朱蒙)이라 했다.
어느 날 왕위에 오른 금와왕 임금이 태백산 남쪽에 있는 우발수강 옆을 지나다가 아름다운 젊은 여인을 만났다. 왕이 “당신은 웬 여자요?”하고 묻자 그 여자는 “저는 하백의 딸로 유화(柳花)라고 합니다. 어느 화창한 날 동생들과 함께 나들이를 갔지요. 그때 풍채가 늠름한 남자를 만났는데 그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했습니다. 해모수는 나를 꾀여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떠나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은 중매 없이 혼인했다고 저를 귀양보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금와왕은 이상히 생각하고 유화를 방안에 가두어 두었다. 그랬더니 밝은 햇빛이 들어와 유화의 몸을 비추었다. 유화가 몸을 움직여 햇빛을 피했더니 빛은 계속 유화를 따라 다녔다. 그런 뒤로 유화는 태기가 있더니 얼마 후 닷되들이 만한 큰 알을 낳게 되었다. 금와왕은 알을 개와 돼지에게 주었지만 먹지 않았다. 그래서 소와 말이 다니는 길바닥에 버렸다. 그러나 소와 말도 알을 밟지 않고 피해 다녔다. 이번에는 들판에 버렸더니 새와 짐승들이 모여 와서 알을 보호해 주었다. 화가 난 왕은 알을 깨뜨려 버리려고 했지만 알은 깨지지도 않았다. 왕은 할 수 없이 알을 유화에게 돌려주었다.
유화는 알을 포근히 감싸서 따뜻한 곳에 놓아두었더니 알이 깨지면서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는 나며서부터 골격이 크고 튼튼했다. 7살이 되는 아이는 혼자 손으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니 백발백중이다. 당시 동부여(東扶餘)에서는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朱蒙)이라 하였으므로, 모두들 그 아이를 주몽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금와왕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주몽과 함께 말타기 · 활쏘기 · 사냥 등을 하며 자랐지만 일곱 왕자 중 아무도 주몽의 재주를 따르지 못했다. 그래서 모두들 주몽을 미워했다. 어느 날 태자 대소(大蘇)는 아버지인 금와왕을 찾아가서 “주몽은 사람의 자식이 아닙니다. 만약 그대로 두었다가는 나중에 큰 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하고 주몽을 없애버리자고 하였다. 왕은 대소의 말을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 먹이는 일을 맡아 보게 했다. 주몽은 만약의 일을 생각해서 좋고 나쁜 말을 구분하고 썩 뛰어난 말에게는 일부러 먹이를 적게 주어 여위게 만들고 다른 말에게는 먹이를 많이 주어서 살이 찌게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왕은 주몽에게 여윈 말을 주고 자기는 살 찐 말을 탔다.
이때 태자 대소를 비롯한 여러 왕자와 금와왕의 신하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주몽을 죽이려 했다. 주몽의 어머니 유화 부인이 그 낌새를 알아차리고 “모두가 너를 죽이려 하니 큰 일이 아니냐? 너만 한 사나이라면 어디 가서라도 잘 살 수 있을 거다. 빨리 이곳을 떠나거라.”고 주몽에게 알렸다.
주몽은 친한 벗이요 부하인 오이 · 마리 · 협부 세 사람을 데리고 몰래 동부여를 벗어나 동쪽으로 달렸다. 이를 알게 된 태자 대소와 여러 왕자들과 금와왕의 신하들이 뒤를 쫓았다. 주몽 일행은 엄수(嚴水)강가에까지 도망쳤다. 검푸른 강물이 앞을 막아 더 이상 갈 수가 없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자이다. 지금 화를 피해 쫓는 자들이 가까이 왔으니 어찌 해야 되느냐?”고 주몽이 강물을 향해 큰 소리로 호소했다. 그러자 무수한 물고기와 자라들이 물 위로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주몽과 그 일행이 무사히 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들은 물속으로 흩어졌다. 뒤를 쫓던 자들은 강을 건널 수 없어 그대로 돌아서고 말았다.

▲ 백두산 관광 안내도
주몽 일행은 졸본(卒本)주에 이르러 도읍을 정했다. 그러나 미처 궁궐을 지을 겨를이 없어 비류수가에 임시 초막을 짓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주몽의 성을 고(高)씨로 하였다.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보면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전반은 동부여의 건국설화이고 후반은 북부여의 건국설화로부터 활용한 것이라 보며, 이 두 개의 부동한 설화가 합쳐서 고구려의 건국신화가 되었다. 또한 신화에서 전개되는 동부여의 무대는 장백산을 중심으로 하여 그 동북부의 지방이다. 과연 고구려 왕실의 건설자들이 북부여에서 남하하여 온 것인지 혹은 이 설화와 같이 동부여에서 유래하여 온 것인지 혹은 이 설화와 같이 동부여에서 유래하여 온 것인지는 지금 단정하기 어려우나, 이 전설을 중심으로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생각하면 장백산맥 동북 지방은 고구려 왕실의 발상과 깊은 유래를 지니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4) 이씨조선의 건국신화
1392년에 조선에서는 새로운 왕조가 세워졌는데 이씨조선(李氏朝鮮)이라고 한다. 이씨조선의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전주(全州)이씨로서 그의 탄생과 관련하여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조선 함경북도 경흥흡 남쪽 십리쯤 되는 곳에 적지(赤池)라고 하는 못이 있었다. 옛날 이씨 조선왕조의 태조 이성계의 할아버지가 되는 도조(道祖)가 이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그는 활쏘기의 명수였다.
어느 날 밤, 흰옷을 입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도조를 찾아와서 하는 말이 “나는 이 못에서 사는 흰 용인데 먼데서 온 검은 용이 이 못을 빼앗으려고 온갖 나쁜 짓을 다하고 있으니 원컨대 공은 나를 위하여 검은 용을 쏘아 죽여서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 깜짝 놀란 도조가 머리를 번쩍 쳐드는 순간 자기가 꿈을 꾸었다는 것을 알았다. 도조는 참 이상한 꿈도 있다 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그런데 또 꿈에 그 흰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서 조금 전과 같은 부탁을 간곡히 했다. 도조는 꿈에서 이를 허락하고, 이튿날 아침에 활을 가지고 그 못에 가보았다. 과연 한 마리용이 동북쪽으로부터 와서, 흰 용과 싸우고 있었다. 도조는 활을 들어 쏘려고 했으나 두 마리 용이 엎치락뒤치락 어울려져서 어느 것이 검은 용인지 분간할 수 없어서 결국 활을 거두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에 또한 약속을 어긴 것을 부끄럽게 여기여 말 못하고 있는데, 흰 용이 도조의 고초를 알기나하듯이 “두 용 중에서 먼저 오는 것이 나고 뒤에 오는 것이 검은 용이니 그리 아시고 검은 용을 쏘아 주십시오.”라고 부탁하였다.
도조는 이튿날 일찍이 못에 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한 마리의 용이 나타나고 뒤에 또 한 마리가 나타났다. 도조는 활을 당겨 두 번째로 나타난 용을 쏘았다. 화살은 검은 용의 허리에 가 꽂혔다. 검은 용이 붉은 피를 흘리면서 용을 쓰다가 죽고 말았다. 피는 흘러서 못 물을 붉게 물들였다. 그 뒤부터 그 못을 적지(赤池)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 흰 용은 또 꿈에 나타나 도조에게 대단히 고맙다고 사례하고 “공의 자손 중에서 장차 이 땅을 다스릴 왕이 탄생할 것을 미리 알려드립니다.”하고는 곧 사라졌다. 그 후 도조는 부인과 함께 백두산의 산신령에게 아들이 있기를 빌었는데, 과연 부인에게 태기가 있어 열 두 달 만에 아들을 낳았다. 그가 바로 이성계의 부친이었다. 그리고 도조가 꿈에서 본 흰 용은 바로 백두산의 산신령이었다. 지금도 적지(赤池)에는 사룡대(射龍臺)의 옛터가 남아있는데, 옛날 도조가 이곳에 앉아서 검은 용을 쏴 죽인 곳이라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