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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태의 백두산기

제목 : 홍세태의 백두산기
저술자 : 홍세태
기록일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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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기(白頭山記)』는 홍세태(洪世泰 : 1653~1725)의 문집인 『유하집(柳下集)』권9에 수록되어 있다. 1712년(숙종 38) 청의 목극등이 양국의 경계를 확정하기 위해 파견된다는 통지를 받고 우리 조정에서는 박권(朴權)을 접반사로 삼아 청의 관원들과 함께 경계를 정하도록 하였다. 일행은 백두산 꼭대기에 올라갔다가 분수령을 찾아 사람 인(人)자 처럼 생긴 지형 가운데 정계비를 세우고 돌아왔다. 이 때 청의 목극등은 직접백두산에 올라갔으나, 접반사 박권과 함경감사 이선부는 늙고 허약하다는 이유로 백두산에 올라가지 않고 역관 김경문이 목극등과 함께 올라갔다. 이 글은 김경문의 이야기를 직접 전해들은 홍세태가 그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김경문은 자기 부친인 김지남이 『북정록』을 썼으므로 자기가 또다시 백두산기를 쓸 수 없어 홍세태를 통해 간접적으로 백두산 기행문으로서, 백두산정계비에 얽린 역사적 사실을 검증하는 데 중요한 자효가 된다. 이는 그의 나이 60세에 쓴 것이다.
홍세태는 조선 후기의 시인으로 본관은 남양이며, 자는 도장(道長), 호는 창랑(滄浪) · 유하(柳下)이다. 무관이었던 익하(翊夏)의 맏아들로서, 어머니는 강릉 유씨(劉氏)이다. 5세에 책을 읽을 줄 알고 7,8세에는 글을 지을 만큼 뛰어난 재주를 가졌으나 중인 신분이라 제약이 많았다. 시(詩)로 이름이 나서 김창협(金昌協) · 김창흡(金昌翕) · 이규명(李奎明)등 사대부들과 절친하게 지냈으며 임준원 · 최승태 · 유찬홍 · 김충렬 · 김부현 · 최대립 등 중인들과 시화를 만들어 교우하였다. 1675(숙종 1) 을묘 식년시에 잡과인 역과(譯科)에 응시, 한학관으로뽑혀 이문학관(吏文學官)에 제수되었다. 30세에 통신사 윤지완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으며 46세에 이르러 이문학관에 실제 부임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 사신이 우리나라의 시를 보고자 하였을 때 좌의정 최석정(崔錫鼎)이 숙종에게 그의 시를 추천하여 임금에게 호감을 얻었기 때문에 그 해에 제술관에 임명되었다.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였다가 50세에 복직하였다. 53세에 둔전장(屯田長), 58세에 동례원인의(通禮院引儀), 61세에 서부주부겸찬수랑(西部主簿兼纂修郞), 63세에 제술관(製述官), 64세에

의영고 주부(義盈庫主簿)가 되었으나 곧 파직 당하였다. 평생 가난하게 살았으며 8남2녀의 자녀가 모두 앞서 죽어 불행한 생애를 보냈다. 이러한 궁핍과 불행은 그의 시풍에서도 영향을 끼쳐 암울한 분위기의 시를 많이 남기고 있다. 특히 중인 신분으로서의 좌절과 사회 부조리에 대한 갈등이 시 속에 우수와 감분을 담게 하였다. 한시에 대한 재능을 널리 인정받았으며 비절하고 그윽한 서정의 세계를 표현하는 데에 특히 능하였다. 또한 위항문학(委巷文學)의 발달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중인층의 문학을 옹호하는 천기론(天機論)을 전개하였으면 위항인의 시를 모아 『해동유주(海東遺珠)』라는 위항시선집을 간행하였다. 죽은 후 1731년(영조 7)『유하집』 14권이 사위와 문인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백두산기

백두산은 북방 여러 산의 원조이며 청나라가 여기에서 일어났다. 우리 북변에서 3백여 리 떨어져 있는데 저 쪽 사람들은 장백산이라 하고 우리는 백두산이라 한다. 두 나라가 산 위의 두 강으로써 경계를 삼고 있으나 땅이 매우 멀고 거칠어서 상세한 경계를 알기 어렵다.
임진년(1712, 숙종 38) 봄 3월에 청나라 황제가 오라 총관(烏喇總管)목극등(穆克登)과 시위(侍衛) 포소륜(布蘇倫), 주사 악세(鄂世)를 보내어 백두산에 가서 살펴보고 변경의 경계를 확정하게 하였다. 우리나라 조정에서는 폐사군(廢四郡)은 다시 우리의 땅이 될 수 없으나, 혹시나 6진(六鎭)이 염려된다는 논의가 많았다. 판중추(判中樞) 이공(李公)만이 건의하여 말하기를,
“마땅히 백두산 꼭대기의 천지(天地)를 반으로 나누어 경계를 삼아야 한다.”
고 하여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 함경도 관차라 이선부(李善溥)를 보내어 국경에서 맞이하여 함께 가서 살펴 조치하게 하였다. 김경문(金慶門)이 통역을 잘하므로 따라가서 산에 올라 경계를 정하고 돌아왔다.

그가 나에게 그 일을 이야기하여 주었으므로 아래에 그 이야기를 적는다.

4월 29일 신사
김경문이 천여 리의 변경으로 가서 삼수(三水)의 연연(連淵)에서 목극등과 만났다. 따라오는 오랑캐[胡人]가 수십 인에서 100인쯤이었고 말이 200여 필, 소가 20여 마리쯤 되었다. 접반사가 사람을 시켜서 그들을 위로하게 하고 또 살과 고기를 보냈으나 받지 않고 돌려보내며 말하기를,
“황제께서 조선에 폐가 될 것을 염려하여 목극등에게 내린 식량이 매우 많으므로 우리가 충분히 먹을 수 있다. 물건이 가고 오는 데에 번거롭지 않게 하려는 것뿐이니 염려하지 말아라.”
하였다. 이보다 먼저 목극등이 연경(燕京 : 북경)에서 우리 사신에게 말하기를,
“백두산의 남쪽 길을 아는 자를 한 사람 구해 나를 기다리라”
하였었다. 이때에 목극등이 그것에 대해 물으니 김경문이 대답하기를,
“여기는 혜산(惠山)입니다. 공께서는 이번 행사에 반드시 강계(彊界)를 살펴 정하고자 하십니다. 백두산 정상에는 큰 못이 있어 동으로 흘러서는 토문(土門)이 되고 서쪽으로 흘러서는 압록(鴨綠)이 되니 이것이 곧 남부의 경계입니다. 그러나 혜산의 연루에서부터 수원(水源)에 이르는 사이에는 산수가 험난하여 옛날부터 통하지 못하였습니다. 간혹 사냥꾼들이 나무를 부여잡고 올라간 적이 있으나 역시 산꼭대기에 이른 자가 없었는데 공이 어찌 정상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목극등이 말하기를,
“내가 황제의 명을 받들고 왔는데 어찌 험한 것을 꺼리겠는가? 너희 나라 경계가 여기에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황제께 올려 주문(奏聞)하여 정한 것인가, 아니면 역사책에 근거할 만한 것이 있는가?”
하므로 김경문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가 옛날부터 이곳을 경계로 삼았음은 부녀자와 어린아이라 할지라고 모두 알고 있는 것인데. 어찌 이것을 황제께서 청하겠으며, 또한 무엇 때문에 문자로 기록하여 증거를 삼겠습니까? 작년에 황제께서 창춘원(暢春苑)에 계실 때 우리 사신을 불러서 서북 지역의 경계를 물으셔서 사실대로 이러한 내용으로 대답하였으니, 공께서도 틀림없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대개 두 강원발원이 이 못에서 시작하여 천하의 큰 강이 되었으니, 이는 하늘이 남북의 한계를 그은 것입니다. 공께서 지금 한 번 보고 결정하도록 하십시오.” 하였다.

5월 1일 계미
구가진(舊茄鎭)에 도착하여 어첩(御帖 : 국왕의 글씨 첩)을 전하였다. 아침에 풀발하여 장형(長嶺)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니 백두산이 하늘 가장자리에 있는데 다로 뻗쳐 아득하고 질펀하여 마치 흰 소가 풀가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목극등이 천리경으로 보더니 거리가 약 300리라고 하였다.

5월 4일 병술
허천강(虛川江)을 건너 혜산진에 이르렀다.

5월 5일 정해
박권과 이선부 두 사람이 목극등을 찾아가 뵈었다. 사람을 시켜 임금의 뜻이라 칭하면서 500금(金)을 보내니 받지는 않았으나 크게 기뻐하여 술자리를 베풀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황제께서 곡진히 너희 나라를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온 것이니, 다만 경계를 정하여 변방 백성으로 하여금 간특한 일을 범하여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자 할 뿐이다.”

그 지역 사람인 애순(愛順)이 일찍이 저쪽 경계에 잠입하여 인삼을 채취하였으므로 산의 남쪽 길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목극등이 그를 불러 말하기를,
“이 산의 남쪽 길을 네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너의 죄를 사면하여 줄 터이니 숨기지 말아라.”
하였다. 애순이 이리저리 둘러대며 모른다고 하자 목극등이 웃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 놈에게 길을 안내를 하게 하면 저절로 길이 있을 것이다.”

5월 6일 무자
목극등, 필첩식(筆帖式) 소이창(蘇二昌), 대통관 이가(二哥)가 일꾼 20명, 짐 싣는 소와 말 4,50필, 짐꾼 43명 및 우리 쪽의 접반사군관 이의복(李義復), 순찰사 군관 조태상(趙台相), 서간 찰방 허량(許樑), 나난 만호 박도상(朴道常) 역관 김응헌(金應櫶), 김경문, 길잡이 3명, 도끼잡이 10명, 말 41필, 짐꾼 47명과 함께 산에 올랐다. 포소륜관 악세로 하여금 그 나머지 사람들을 인솔하여 허항령(虛項嶺)을 경유하여 서쪽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5월 7일 기축
아침식사 후에 사람들은 모두 전립(氈笠)을 쓰고 토시를 착용하고 방한화를 신고 종아리를 묶어서 무릎까지 올라오게 하고서 서로 돌아보며 웃었다. 괘궁정(掛弓亭) 아래에서부터 내를 따라 오시천(五時川)으로 올라갔다. 오시천은 경성(鏡城)의 장백산 서쪽에 시작하여 이 곳에 이르러 강물과 합해지는데 오시천의 바깥쪽은 모두 황폐하여 사람이 살지 않았다. 북으로 내를 건너 물가를 따라 가니 석벽이 깎아지른듯하여 잡고 오를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백덕(柏德)에 새로 길을 만들어 앞으로 나아갔다.

산의 언덕이 높으면서 위가 평평한 것을 북쪽 지방에서 ‘덕(德)’이라고 한다. 이곳은 곧 백산(柏山)의 기슭이다. 산에는 잣나무가 많았다. 길이 험하고 급경사였으나 산마루에 오르자 조금 평평해졌다. 그러나 지게가 갈수록 점점 높아졌다. 깊은 나무숲을 뚫고 들어가니 큰 나무뿌리가 서리서리 얽혀 마디지고 굽었으며 땅은 개로 내린 비로 진창길이 되어 나아가기가 어려웠다. 70리를 가서 검천(劍川)에 도착하여 묵었다.

5월 8일 경인

검천을 건너 25리가서 곤장(昆長)귀퉁이에 도착하였다. 처음출발 할 때 박권과 이선부 두 분이 함께 산에 오르려 했으나 목극등이 말하기를,
“내가 보니 조선의 재상은 움직일 때는 반드시 가마를 타는데 나이 많은 사람들이 험한 길을 능히 걸을 수 있겠는가? 중도에 넘어지면 대사를 그르칠 것이다.”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이곳에 이르러 박권과 이선부 두 분과 목극등이 말에서 내려 작별인사를 하고 또한 우리 여섯 명을 불러 술자리를 베풀어 위로하였다. 15리를 가니 큰 산이 바로 앞에 있어서 이에 서쪽으로 강을 건넜다. 수심은 얕으나 물이 달리는 말처럼 거세고 급했다.

5월 9일 신묘
애순에게 명령하여 열 명의 도끼 잡이를 데리고 앞에서 나무를 베게 하여 강가를 따라 5,6리를 가니 길이 끊어졌다. 다시 산언덕을 따라 갔는데 이름은 화피덕(樺皮德)이라 한다. 백덕과 비교하면 더욱 험준하고 깎아지른 듯 한데 그 꼭대기는 평평하고 넓다. 불을 땐 흔적과 왕래한 흔적이 보였다.

이가가 손으로 초막을 가리키면서 애순에게 말하기를, “네가 길을 모른다고 하면 이 곳에서 잔 사람이 누구냐?” 하였다. 애순이 가만히 있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80여 리를 가니 조그마한 못이 있었다. 인마를 멈추고 물을 마셨다. 목극등이 우리에게 소 한 마리 반을 주고 나머지 반으로 자기 사람들을 먹였다. 날씨가 또다시 나빠져서 하늘이 어두워지고 우레가 치더니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청나라 사람들은 모두 천막 속으로 들어가 비가와도 새지 않았으나 우리 여섯 사함은 단지 삼베포로 된 장막 한 장과 큰 기름종이 포대뿐이어서 마치 개미떼가 그 속에 모여들어서 피하는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군졸들이 모구 비에 젖어 추위에 떨며 앉았는데 다행히 한밤중이 되기 전에 비가 그쳐서 죽지 않았다.

5월 10일 임진
동쪽으로 강을 건너 우리나라의 강가를 따라 몇 리를 가고 또 저쪽의 강가를 따라 30여 리를 가는 사이에 아홉 번이나 왕복하여 건넜다. 물살은 세차고 급하였다. 대개 백덕(柏德)에서부터 140여 리를 올라 왔다. 큰 나무가 산에 가득 차 있고 빽빽이 하늘을 덮어 해를 가리고 있었다. 큰 것은 거의 대여섯 아름쯤 되고 촘촘하기가 짜 놓은 것 같았다. 사람들이 빈틈을 따라서 옆으로 뚫고 나와서 겨우 하늘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한낮이 아니면 햇빛을 볼 수 없었다. 가끔 넘어진 나무가 길을 가로막고 있어 나아갈 수 없어서 돌아서 피해 가야 했다. 이 때문에 100리 길이 200리가 되었다. 나무는 주로 삼나무, 회나무, 잣나무, 자작나무, 가문비나무가 많이 뒤섞여 있고 소나무는 겨울 한 번 보았다. 홍백일홍과 작약이 한창 만개하였고, 짧고 잎이 막 돋아나는 나무가 있었는데, 속명(俗名)으로 ‘두을죽(豆乙粥)’이라고 한다.
오시천을 지나면서부터는 날짐승들을 보지 못하였다. 꾀꼬리가 잣나무 송진을 쪼아 먹고 사는데,

그 울음소리는 짧고 급했다. 북쪽 사람들이 이것을 백조(柏鳥)라고 불렀다. 산에 깊이 들어갈수록 백조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짐승으로는 호랑이와 표범은 보이지 않고 오직 곰, 멧돼지. 사슴, 노루만 있었는데 때때로 사람을 보면 놀라서 달아났다. 담비 · 오소리 · 족제비 · 박쥐 · 다람쥐 · 따위가 없는 것이 없었다. 조금 앞으로 가다가 언덕을 한참 오르니 꼬불꼬불한 산길이 갑자기 끊어졌다. 애순이 말하기를, “이 곳이 한덕립지당(韓德立支當)입니다.”
하였다. ‘지당’이란 북쪽 사람들의 속어로 얼음 절벽을 가리키는 것이다. 매년 여름이면 사슴 떼가 그 안에 들어가서 등에를 피한다. 덕립이 혼자서 그 입구를 지키고 있다가 사슴을 많이 잡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라 하였다.
언덕을 올라 8,9리를 가니 목극등이 층층의 절벽 위에서 말을 쉬게 하고 있었고 사람들이 모두 모여 서 있었다. 김경문도 말에서 내려앉아 절벽을 굽어보니. 몇 천 길이나 되는 큰 골짜기에 솟아 있는 돌 봉우리에 부딪치며 좌우에서 물보라를 나들고 여러 갈래로 화살처럼 급하게 쏟아져 내렸다. 혹은 소용돌이를 만들기도 하고 돌과 부딪치기도 해서 시끄러운 물소리가 마치 사방에서 울리는 천둥소리와 북소리 같으니 정말로 천하의 기이한 절경이었다.
또 십 수 리를 가니 나무가 점점 듬성듬성해지고 산이 점차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서부터는 산이 모두 뼈대만 남고 색깔은 창백하였다. 대대기가 쌓이고 응결되어 이루어진 하나의 커다란 수포석(水泡石)이다. 동쪽을 보니 한 봉우리가 하늘로 뾰죽이 솟아올라있었다. 김경문이 애순을 돌아보며,
“백두산이 가깝구나, 오늘 정상에 도착할 수 있겠지?”
하고 물으니, 애순이 말하기를,“아닙니다. 이것은 소백산(小白山)입니다. 이 산을 지나서 서쪽으로 10여 리를 가면 바로 백두산 자락인데 산자락에서 정상에 이르기까지 아직 2,30리입니다. 조금 동쪽에 한 고개가 있는데 그것 소백산 자락입니다.” 하였다.

그 산마루에 올라가서 멀리 백두산을 바라보니 웅후(雄厚)하고 백대(博大)해서 천 리가 한결같이 푸르렀다. 다만 그 정상이 마치 흰 항아리를 높은 도마 위에 엎어 놓은 것 같았다. 그 이름을 백두산이하 한 것은 이 때문이다. 고개를 내려와서 북쪽으로 작은 개울을 건너니 평지가 나왔다. 몇 리를 가니 나무가 있는데모두 옹종하고 높이가 불과 몇 자 밖에 되지 않으니 속칭 박달(朴達)이라고 한다. 이곳을 지나자 산은 모두 민둥산이었다. 이 때 저녁노을이 산 절반쯤에 비치더니 조각구름이 산꼭대기에서부터 나와서 밑으로 떨어지더니 조금 있다가 감아 올라가서 하늘에 가득하였다. 애순이 말하기를, “장차 큰 바람이 일고 비가 올 것입니다.”
하면서 겁내는 기색이었다. 목극등이 묻기를, “어찌 겁을 내느냐?” 하니
애순이 말하기를, “지금 이렇게 높은 곳에 올라와서 비를 만나면 사람이 반드시 얼어 죽을 것입니다.
바람이 불면 포석(泡石)이 바람에 날려 사방으로 떨어져 눈 깜짝할 사이에 골짜기가 끊어져서 막혀 버릴 것이고 사람은 알 수 없는 바닥에 떨어져 버릴 테니 어찌 나올 수 있겠습니까? 여기까지 도달한 것은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기도하여 무사한 것입니다.” 하였다.
목등극이 말하기를, “내가 바로 천자의 명을 받은 관리이니 어찌 수렵하는 놈들과 같겠느냐?”
하므로 김경문이 말하기를, “공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나 자고로 기도하고 제사하는 것은 오래 된 일입니다. 또 옛 사람의 말이 없으면 그만이지만 이미 말이 있으면 그것을 따르라 하는 것이 옛 사람의 말입니다.” 하였다. 목극등이 곧 김경문을 돌아보며 초를 찾으니 그 뜻은 스스로 기도하고자 하는 것이다.
저녁에 구름이 개고 달이 뜨니 하늘이 사람들의 머리 위에 있었다. 별들은 모두 반짝이고 대기는 겨울처럼 추웠다. 갑자기 귀신이나 도깨비가 튀어나와 늘어서서 사람을 잡아갈 듯하였다. 모두 낮에 본 노목(老木)이었는데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두려움을 자아내게 하였다.

5월 11일 계사
새벽밥을 먹고 저들 관원 세 사람과 우리 관원 여섯 사람이 각각 건보(健步 : 잘 걷는 사) 두 사람, 저들이 데려온 화공 유윤길(劉允吉), 애순과 함께 5,6리쯤 갔다. 산이 갑자기 가운데가 움푹 패여 구덩이를 이루어 띠처럼 가로 막고 있었는데 깊이는 끝이 없고 너비는 2자쯤 되었다. 말이 벌벌 떨며 감히 뛰어넘지를 못하여 말에서 내리고 말 끄는 사람이 북쪽 언덕으로 가서 말고삐를 잡고 건넜다. 목극등이 앞장서서 뛰어넘으니 사람들이 모두 뒤를 따랐는데 오직 김경문과 소이창, 이의복은 하지 못했다. 목극등이 키가 큰 사람으로 하여금 팔을 뻗어 손을 잡고 건너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