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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원-자비대령화원

자비대령 화원의 직제

자비대령 화원의 직제

자비대령화원은 본래 예조에 소속된 도화서의 화원 중의 일부를 취재를 통하여 선발하여 왕명으로 규장각에 파견하였다. 거기서 규장각 소관의 어제 등서에 필요한 작업을 전담시키고 왕의 지시로 이루어지는 왕실의 중요한 도화 활동을 최우선적으로 전담시켰다. 뿐만 아니라 규장각에서 별도로 시행하는 녹취재 시험을 통해서 특별한 녹봉과 사물을 수여한 당대 최고급의 궁중 화원을 가리킨다. 자비대령화원의 제도는 영조대왕의 친필을 등서하기 위하여 일이 있을 때만 임시로 운영한 제도로 평상시에는 특별한 업무 규정이 없었고 그때그때 임시로 선발, 파견하여 왕의 명령을 대기하는 화원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다가 1783년(정조 7년) 영조 대 이래의 자비대령화원을 더욱 확장시켜 규장각 소속의 잡직으로 제도화함으로써 정식으로 규장각의 자비대령화원 직제를 설치하였다. 정조는 규장각을 왕정의 핵심 기구로 전환시켜 어제 등서와 어서 편찬업을 전담시키면서 이를 10명으로 확대 발전시켜 규장각의 정식 직제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자비대령화원은 왕이 직접 임명하도록 했다. 직제로 정6품의 사과 1명과 정7품의 사정 4명을 두었으며 녹봉을 수여했다.
자비대령화원의 규장각 근무처는 규장각에 조신들이 조회 참여를 위해 대기하는 직방의 서벽방을 이용하였다. 근무시간은 묘시에 출근하고 유시에 퇴근하도록 하였다.
그들의 역할은 어제 등서와 10년만에 한 번씩 제작하는 어진 도사가 주된 임무였다.

취재 제도

취재 제도

자비대령화원은 철저하게 실력을 평가하여 선발하였다. 영조 이래 임시로 설치한 자비대령 이외의 도화서 화원 전원을 대상으로 한 취재 시험을 통해 새로운 자비대령화원을 선발 증원하였다. 시험 과목은 각자 원하는 화제에 따라 진채와 담채 각각 2장을 그려서 제출하도록 하였다. 1783년(정조 7년) 자비대령화원 선발 시험을 위한 화문은 산수, 누대, 인물, 영모, 초충, 속화의 여섯 개 화문이었다. 그리고 시험의 방식은 이 중에서 각자가 원하는 것을 택해서 진채 2장, 담채 2장을 그려 제출하도록 하였다. 즉 3일동안 4장을 그려내도록 한 것인데 그림은 각자 집에서 그려내도 무방한 자유로운 시험 방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험 결과가 발표되어 상이 세 개 이상의 점수를 얻어 1차 시험을 통과하면 2차 선발시험에 응시하였는데 하가 두 개 이하의 점수를 받으면 선발되었다. 최종적으로 선발되면 채색 값 5냥을 하사받았다.
그들은 도화서에서 행하는 취재 시험 이외에도 사과 한 자리와 사정 한 자리를 놓고 1년에 12번의 시험의 녹취재를 치렀다. 즉 춘하추동의 각 첫 달인 1월·4월·7월·10월에 실시하고 각 달에 10일, 20일, 30일에 3차로 시행하였다. 각 달의 첫 번째 시험과 두 번째 시험의 화제는 모두 규장각에서 전적으로 주관했고 세 번째 시험은 규장각에서 화문과 화제를 복수로 추천하여 왕의 낙점을 받아서 실시했다.
녹취재의 평가는 크게 매차 방목, 도계획방, 포폄등제로 구성되어있는데 매차방목은 매 계절, 매 회의 시험마다 발표되는 성적이다. 처음 시험과 두 번째 시험은 규장각의 각신이 채점하고 삼차는 국왕의 직접 채점한다. 채점 방식은 이상·이중·이하·삼상·삼중·삼하·차상·차중·차하의 구등법을 사용했다. 또 그림이 형편없어 다시 그려내도록 하는 '갱'이 있었고 기한을 넘겨 그림을 제출하면 채점에서 제외되어 '한후'라는 성적을 받았다. '위'는 화제를 모르거나 오해하여 화제와 어긋나서 실격된 경우이다.
도계획방은 매 계절 세 차례의 시험에서 얻은 획수를 합계하여 푼수로 환산한 종합성적이다. 가장 높은 점수는 이상으로 6푼이 주어지고 이중은 5푼, 그 이하로 한등씩 줄어들수록 계속 1푼씩 줄어들어 삼하는 1푼, 차상은 반 푼이 주어지고 차중 이하는 점수가 없이 무푼으로 처리되었다. 여기서 1위와 2위를 차지한 화원에게는 사과와 사정의 자리가 주어졌다. 그러나 만약 그림이 크게 떨어질 때에는 왕에게 야단을 맞고 심한 경우 파면되거나 멀리 귀양가는 일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