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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공사관

분류 : 외교건축
건축년도 : 1885년 10월 개설, 1890년 신축
소재지 : 정동 15-1번지

상세설명

서대문 경향신문사 바로 뒤편에는 로서아(露西亞), 아라사(俄羅斯), 노국(魯國) 또는 아국(俄國)등으로 주로 표기했던옛 러시아의 공사관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은근대개화기의 외국공관으로서는드물게도 국가사적 제253호 '구 러시아공사관' (지정일 1977.11.22일)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현존하는 모습은 옛 공사관 건물의 일부인 3층짜리 전망탑만 간신히 남은 몰골에 지나지 않으나 이곳 역시 결코 빠트릴 수 없는 근대역사의 전개에 있어서 핵심 공간이다.
우리 나라와 러시아 사이에 외교관계의 성립이 시작된때는 갑신정변을 전후한 시기이다. 이 당시 일본을 위시하여 미국, 영국, 독일이 이미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한 상태였고, 한편으로 청나라 세력의 확장에 자극된 러시아 정부가 극동의 상황에 정통하고 활동이 기민하다는 평판를 얻고 있던 북경공사관서기인 칼 웨베르(Karl I. Waeber, 韋貝)를 서울에 파견하여 조약을 교섭케 하였는데, 그 결과로 나온 것이1884년 7월 7일에 조인된조로수호통상조약(朝露修好通商條約)이다. 이 조약의 양국대표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독판(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督辦)김병시(金炳始)와 러시아의 특간전권대신(特簡全權大臣) 웨베르였다.
이 조약은 이듬해인 1885년 10월 14일에 비준서 교환과 더불어 정식 발효되었으며, 이 날짜로 러시아공사관도 개설되었다. 이때 웨베르는 대리공사 겸 총영사로 부임하여 그후 짧은 공백기간이 있었으나 1897년 8월 24일까지 대부분을 우리 나라에 주재했다. 웨베르가 부임할 당시에 자신의 처남의 처형이 되는 손탁(Antoinette Sontag, 孫澤, 孫鐸, 宋多奇; 1854~1925)과 동행하였는데,이후 '미스 손탁'이 궁중의 신임을 얻는 한편 서울사교계의 프리마돈나로 맹활약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현존하는 러시아공사관 건물이 세워진 것은 1890년의 일이다. 러시아공사관의 건축시기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있다. <윤치호일기> 1886년 7월 13일자의 내용에 "...... 러시아공사가 4,000원을 들여 그 공관을 지었다"고 전하는 구절이 보이는데, 이를 근거로 러시아공사관의 건립시기를 그 무렵으로 판단하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주한미국공사를 지낸 호레이스 알렌(Horace Allen)이 정리한 <외교사연표>에는 "현 러시아공사관의 정초석(corner stone)을 놓은 것은 1890년 8월 30일"이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데, 알렌 쪽의 얘기가 훨씬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윤치호가 전해들은 내용에는 애당초 러시아공사관이 한옥인지 양옥인지의 구분이없고, 실제로 러시아공사관의 초기 모습에 '한옥(韓屋)'으로 묘사된 일러스트레이션 자료가 남아 있으므로, 이때의 일은 아마도 기와집을 지은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나 짐작된다.
지하 1층, 지상 1층에 3층 탑부로 이뤄진 석재와 벽돌조의 '서양식' 공사관건물은 러시아건축가 사바틴(A. I. Seredin Sabatin, 薩巴丁, 薩巴珍, 薩巴玲, 士巴津; c1860~)의 설계로 이뤄졌다. 그는 1883년에 입국하여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로 귀국하기까지 20여년간을 우리나라에 체류했던 무수한 근대건축물을 남겼던 개화기의 대표적인 서양인 건축가였다.
글자 그대로매우 '이국적(異國的)'이었던 러시아공사관은 비교적 수목이 무성하고 지대가 높았던 상림원(上林苑) 지역을 끼고 세워진 탓에 이내 서울의 랜드마크(landmark)로 자리매김 되었다. 개선문(凱旋門)을 쏙 빼어닮은 아치 형태의 공사관 정문(正門)도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러시아공사관 건물의 핵심은 3층으로 이뤄진 전망탑부였는데, 가뜩이나 공사관 자체가 높은 언덕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이곳에 오르면 서울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저명한 지리학자이며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1897)의 저자로 우리에게 친숙한영국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여사는 1894년 겨울에 찾은서울의 첫인상을 이렇게 남겼다. 여기에도 당연히 러시아공사관의 존재가 그려져 있다.
"길폭이 차차 넓어지면서 우리는 서울의 성벽에 도착했다. 굴곡이 깊은 이중 지붕을 가진 성문(남대문을 말함)이 있는 매우 높은 성벽을 통과하여 10여분더 추저분한 길을 걸으니 산들바람 부는 언덕이 나타났다. 그 언덕 위에 눈에 확 띄는 영국공사관과 영사관의 붉은 벽돌건물이 있었다. 다른 높은 언덕은 러시아공사관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 높은 탑과 화려한 정문은 이 도시에서 매우 이채로운 물건이 되고 있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이인화 옮김,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살림, 1994), 48쪽)
이와는 별도로 1901년 6월에 우리 나라를 찾은 독일인 기자 지그프리트 겐테(Siegfried Genthe; 1870~1904)의 경우에는 서울에서 마주친 러시아공사관 건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유럽열강은 첫눈에 체면을 고려한 의도성 짙은 영사관을 세우면서 계획적으로 당당하고 대담하게 진출하고 있다. 프랑스와 러시아는 외교대표들의 호화저택을 세워, 도시전체가 수치와 회한에 차 땅속으로 꺼져 들어가는 듯했다. 서울 안에 자랑할만한 건축물이나 나머지 열강이 지금까지 보여준 그들의 우세한 상징적 힘을 과시하는 건물도, 도시 서쪽 언덕에 위치한 프랑스와 러시아의 화려한 새 공사관저보다 강력한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조선에서 두 국가의 관심은 실용적인 무역과 산업에서 돈이나 금전적 가치를 얻는데 있지 않았다. 러시아는 전혀 하는 일이 없었고, 프랑스 사람들은 이제 막 철로건설과 광산업에 자본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정치적 영향력이며, 그 영향력은 건설사업을 통해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아무튼 현재 조선인들에게 그들의 목적은 완벽하게 수행되었다. 마치 수도와 황제의 궁전이 러시아와 프랑스의 깃발 아래 직접 보호를 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그프리트 겐테, 권영경, <독일인 겐테가 본 신선한 나라 조선, 1901> (책과함께, 2007), 200쪽)
그리고 1895년말부터 이듬해초까지 우리 나라 남부지역을 두루 탐사했던 러시아 참모본부 소속의 육군대령 카르네프와 그의 보좌관 육군중위 미하일로프일행이 남긴 기록에는러시아공사관 주변일대의 배치상태가 잘 묘사되어 있다. 더구나 이 자료는 카르네프 대령 등이 때마침 아관파천이 일어나던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면서 보고들은 얘기를 채록한 것이라서 그 시절의 정치적 상황과 사건의 실상을이해하는 목격담으로서의 가치도 아주 높다.
"우리가 머물기로 한 유럽식 주택구역은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우리의 눈앞에 미국, 영국, 프랑스의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러시아국기가 가장 높이 있었다. 잠시후 우리는 붉은 돌로 된 문앞에 멈춰섰다. 그곳에는 러시아를 상징하는 쌍독수리가 그려져 있었고, 담안으로 러시아제국의 웅장한 공사관 건물이 보였다. 우리는 러시아제국의 공사 A.N. 슈페이에르(Alexis de Speyer)와 그의 부인의 호의로 공사관 건물내에 머물 수 있었다.
마침 그곳에는 해군 중위 모사토프가 '보보르'라는 소함정을 제물포항에 정박시키고 함께 온 수병 35명으로 이루어진 상륙부대와 같이 머물고 있었다. 또는 전 공사 K. I. 베베르는 멕시코 공사로 임명되었는데, 서울에 남아서 인수인계를 하는 동안 건물의 왼쪽을 사용하고 있었다. 건물의 오른쪽은 슈페이에르 공사가 사용하였다.
러시아 공사관이 자리잡고 있는 곳은 터가 매우 넓었고 도읍 전체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전망이 좋았다. 큰 건물 이외에도 작은 건물이 네 채 있었다. K. I. 베베르는 주변의 울타리 건설과 부지 구입까지 포함해서 3만 3,000루블을 들였다고 한다. 이 건물 뒤에는 헛간이 달린 작은 곁채와 정원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토종 비둘기들을 많이 기르고 있었다. 울타리 왼편에는 독서실과 당구장이 있는 외교관 클럽이 정면에 있었다." (카르네프 외, 이르계바예프·김정화, <내가 본 조선, 조선인> (가야넷, 2003))
그런데 뭐니뭐니해도 러시아공사관이 근대사의 핵심으로 가장 부각된 것은 역시 아관파천(俄館播遷 ; 1896.2.11~1897.2.20) 때의 일이다. 왕궁에 난입한 일본인 낭인무리의 칼날에 왕비가 피살되는 참담한 을미사변을 겪은 고종(高宗)은 황태자를 데리고 한밤중을 다투어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겨버린다. 그리고 명헌태후 홍씨와 황태자비 민씨로 하여금 가까운 경운궁(慶運宮)으로 거처를 옮기도록 하였다. 때를 맞추어 러시아 측에서는 공사관 방어라는 명목하에 2월 9일 새벽에 두 명의 장교와 수병 100명을 이미 입성시켜 놓은 상태였다. 단발령과 같은 과격한 개혁조치과 친일적 태도로 민심을 잃은 김홍집 내각은 졸지에 붕괴되었고, 그 자리는 친로파 내각으로 대체되었으니 이것이 곧 '아관파천'이었다. 한 나라의 국왕이 자국의 공사관에 자국의 보호에 따라 거처하고 있는 형편이었므로, 러시아의 득세는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세상을 순식간에친로파(親露派)의 세상으로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국왕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무는 사이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협상이 진행되고, 경운궁의 수리완공을 기회로 이곳으로 환궁이 결정되니, 이로써 아관파천은 1년하고도 6일만에 막을 내렸다. 아관파천을 계기로 경운궁의 확장이 이뤄지고 곧이어 대한제국의 선포가 이어졌으므로 덕수궁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구한말' 풍운의 역사는 곧 러시아공사관에서 비롯된 셈이 된다.
이후 러시아공사관은 대한제국의 운명이 그러했던 것처럼 정치적 상황의 부침에 따라, 공관의 폐쇄와 개설이 거듭되었다.
러시아의 위세가 급전직하로 추락한 것은 러일전쟁 때이다. 1904년 2월 10일 일본의 선전포고가 이뤄지자 이틀 뒤인 2월 12일에 러시아공사 파블로프(Aleksandr Ivanovich Pavlow,巴禹路厚)일행은 자국의 공사관 관리 등을 프랑스공사 쁠랑시에게 위탁하여 업무를 대리케 하는 한편 철수를 개시하여 2월 16일자로 인천을 통해 프랑스 순양함 파스칼호를 타고 우리 나라를 빠져 나갔다. 이와 아울러 일본의 압력에 따라 양국의 공관철수는 물론 조약관계를 폐기한다는 대한제국 정부의 선언이 있었으므로 우리 나라와 러시아는 곧장 외교관계 단절상태에 들어갔다.
러시아의 외교공관이 다시 서울에 개설된 것은 이로부터 2년여가 지난 1906년 2월의 일이다. 하지만 이 당시는 이른바 '을사조약'을 통해 일본이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한 상태였으므로, '공사관'이 재건된 것이 아니라 겨우 '영사(領事)'가 파견될 수 있었을 따름이었다. 1906년 2월 6일자로 일본정부에 의해 서울주재 러시아총영사로 임명이 인가된사람은 프란손(Plancon)이었는데, 러시아황제의 위임장이 한국황제 앞으로 되어 있다는 이유로 인가장 교부가 다시 보류되었다가 이에 대한 수정과정을 거쳐 그해 9월 21일에야 인가장이 정식으로 교부되는 과정을 거쳤다.
그 이후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제정러시아가 붕괴되고 나서도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하던 러시아영사관은 소속이 불분명해진데다 1921년말에 이르러 재정난으로 현상유지조차 어렵게 되자 사실상 자진폐쇄 단계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 이후로는 소속도 없고 오갈데조차 없으며 유명무실했던 '백계 러시아인' 부영사만이 홀로 빈집을 지키다시피 이곳에서 연명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러한공백기간를 깨고 서울에 러시아의 외교공관이 그 모습을 다시 드러낸 것은 1925년 가을의 일이었다. 이에 앞서 그해 1월 20일 쏘비에트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국교교섭의 타결을 보았는데,이들은 1925년 9월 24일에 이르러옛 러시아영사관에다 적기(赤旗)를 휘날리며 '쏘비에트'총영사관이라는 이름으로 성대한 개관식을 거행하였다.
세계대전의 확산조짐과 더불어 국제정세가 급변하던 1930년대 말에는 서울주재 '쏘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총영사관'의 폐쇄문제가 여러 차례 표면화하기도 하였으나 실현단계에 이르지는 않았다. 해방 이후에는 좌우대립과 미소대결의 와중에 소련영사관이 그 중심점에 놓이게 된 적도 있었으며, 결국 1949년에 이르러 소련영사관원 니콜라이 부처의 간첩사건을 빌미로 이들을 북한지역으로 추방함과 동시에 소련영사관은 영구폐쇄조치를 당함으로써 1885년 이래 64년을 이어오던 옛 러시아공사관의 명맥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당시 <동아일보> 1949년 9월 7일자는 '소련영사관의 폐쇄' 사실을 이렇게 보도했다.
"언제 국교가 열리게 될는지 막연한 서울의 소련영사관이 드디어 폐쇄된다. 한때 미쏘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을 때 '슈티코프' 중장을 비롯한 쏘련대표단의 숙소로 된 일도 있었으나 그후 이 건물은 '크레믈린'의 철(鐵)의 비밀을 상징하며 허다한 한인 공산당원들의 음모의 책원지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 흑막이 백일하에 폭로되어 영사관을 지키던 '니코라이 크리오셉' 부처가 체포추방되게 되어 문제의 건물 소련영사관은 이제 가을과 겨울을 앞두고 암묵(暗默)의 폐쇄를 당하게 된 것이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건물의 외형만은 번듯하게 유지하고 있었으나, 불행히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옛 러시아공사관 건물은 외벽의 일부와 3층 전망탑 정도만을 남겨둔 채 상당부분 파괴되는 피해를 입게 되었다.
1973년 5월에 잔존 전망탑 부분에 대한 보존처리가 이뤄졌고, 1981년 10월에는 유적발굴을 통해 러시아공사관 구역의 지하층 구조가 밝혀지기도 하였다. 러시아공사관 일대를재보수하고 주변의 조경을 다시 한 것도 바로 이때의 일인데, 그 영역만은다른 건축물의 잠식 등으로 이미 절반 이하로 축소된 상태였다.
그런데 러시아공사관이 갖는 문화재적 가치가 처음 주목을 받기 시작한시기는 1969년 무렵이었다. 그 시절에 때마침 '장충단비'의 재발견으로 서울시 향토문화재(鄕土文化財)의 지정이 구체화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곁들여 옛 러시아공사관에 대한 보존지정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반대의견도 만만찮게 제기되었다. 이곳은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는 역사적 수모를 겪은 치욕스러운 유물인데다 소련이라는 적성국가의 잔류물이므로 구태여 보존을 주장한다는 것은 난센스라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다행스럽게도 보존론이 우세한 탓인지 옛 러시아공사관의 잔존건물은 1969년 9월 19일자로 '양관(洋館)'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이름을 달고 무사히 서울시 향토문화재 제2호로 지정고시되기에 이른다. 그 직후 문화재보호법의 개정에 따라 향토문화재는 '지방유형문화재'로 재전환되었다가 근대여명기(近代黎明期) 유적에 대한 문화재지정이 확대될 때에 1977년 11월 22일자로 사적 제253호로 승격지정되어 '구러시아공사관'이라는 지정명칭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9년에 벌어진 보존논란에 떠밀려 '치욕의 유물'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그냥 헐어버렸다면, 이러한 역사의 증거물은 아무런 자취도 없이 완전히 지워지고 말았을 것이다.

[러시아공사관관련 참고자료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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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기자(一記者), "외국영사관 통역생활 사십년", <조광> 1937년 7월호, 190~192쪽 [싸베트(쏘비에트) 백악관(白堊館)의 13년, 경성싸베트총영사관(京城싸베트總領事館) 통역(通譯) 김동한(金東漢)씨]
- 문일평(文一平), "금석(今昔)을 말하는 외국영사관(外國領事館)의 기지 유래(基地 由來)", <조광>1938년 4월호, 170~175쪽
- 서원출, "폐쇄설을 전하는 소련영사관의 회고", <조광> 1938년 6월호, 38~41쪽
- 윤효정, "주간 포케트북 (24) 아관파천 전후", <주간조선> 1971년 3월 28일자, 15~18쪽
- 카르네프 외, 이르계바예프·김정화, <내가 본 조선, 조선인> (가야넷,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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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1921.12.17일자, "40년의 역사를 남기고 폐쇄될 노국영사관"
- <조선일보> 1925.1.22일자, "일로교섭성립과 조선에 미치는 영향, 노령에 있는 동포는 어떠하고 조선내지에는 어떠할 것인가"
- <조선일보> 1925.1.31일자, "11년간 정들은 정동을 작별케되는 백파의 로국영사 '헤'씨, 2월 10일안으로 떠난다"
- <조선일보> 1925.1.22일자, "백색영사(白色領事)는 무용, 돌아게 될 것을 말하는 헤씨"
- <동아일보> 1925.7.8일자, "경성에 노농영사관, 설치하기로 결정"
- <동아일보> 1925.7.30일자, "일로 영사관결정, 경성에도 설치"
- <매일신보> 1925.9.25일자, "정동의 상공에 적기가 번양, 성황리에 의식종료"
- <동아일보> 1936.1.7일자, "신춘각국영사관순방기 (6) 제3편 소연방총영사관 (1)"
- <동아일보> 1936.1.8일자, "신춘각국영사관순방기 (7) 제3편 소련영사관 (2)"
- <동아일보> 1936.1.9일자, "신춘각국영사관순방기 (8) 제3편 소련영사관 (3)"
- <동아일보> 1936.1.10일자, "신춘각국영사관순방기 (9) 제3편 소련영사관 (4)"
- <동아일보> 1938.4.15일자, "경성소련총영사관 불원폐쇄 구체화"
- <조선일보> 1946.6.25일자, "물러가는 소련영사관, 아관파천 이래 유서 깊은 곳"
- <동아일보> 1949.9.7일자, "폐쇄되는 소영사관"
- <동아일보> 1969.7.22일자, "전 러시아영사관 건물 보존여부에 찬반양론"
- <동아일보> 1969.9.19일자, "장충단석비, 봉황각, 구러시아공관, 향토문화재로 지정"
- <경향신문> 1981.10.16일자, "아관에 지하비밀통로 있었다, 유적발굴 중 85년만에 햇빛"
- <조선일보> 1992.12.24일자, "러시아군인 한국기행, 100년전 서울 1885~1896 (1) 진흙투성이 거리에 집 4만채"
- <조선일보> 1992.12.29일자, "러시아군인 한국기행, 100년전 서울 1885~1896 (4) 고종, 궁녀가마로 아관파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