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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

비류(沸流)
1. 비류 설화
비류(沸流)는 주몽이 졸본 땅에 근거를 마련한 뒤 결혼한 소서노의 전남편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 중 첫째이다.
주몽은 소서노의 마음을 사로잡고 소서노의 아버지인 연타발이 대표로 있는 계루부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연씨 부녀의 재물을 밑천 삼아 더욱 많은 문무 인재와 백성을 끌어모아 지지 세력을 키우는 한편, 비류곡 졸본천 서쪽에 성을 쌓고 집들을 세우고 야장(冶匠)을 지어 무기를 만드는 등 한 해 동안 건국사업에 불철주야로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소서노는 남장을 하고 그림자처럼 주몽을 따라다니며 그의 사업을 도왔다. 그런 모습을 본 졸본부여 사람들이 하나같이 연타발의 과부 딸 소서노가 이젠 주몽의 여자라고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결합을 했다. 주몽은 연상의 여인 소서노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했고, 그녀의 전 남편 소생인 비류와 온조 두 형제도 친자식처럼 대했다. 당시 소서노가 30세의 과부였고, 그녀가 16세 무렵에 시집갔다고 본다면 그때 비류는 많아야 12세, 온조는 10세 안팎의 소년이었을 것이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소서노는 48세로 노령의 문턱을 넘고 있었다. 늙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니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앞날이 문제였다. 죽더라도 대왕보다는 내가 먼저 죽을 것인데, 그렇게 되면 내 아들 비류와 온조는 어떻게 될 것인가.
소서노는 대왕에게 좇아가 맏아들 비류를 태자로 세워 주십사하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대왕은 처음에는 좀더 두고 보자면서 얼버무리고 말았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거의 매일같이 찾아와 졸라대자 나중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소서노도 더욱 애가 타서 기를 쓰고 졸라댔다.
추모대왕이 본부인 예씨와 친아들 유리를 데려온 것은 건국 18년이 지난 서기전 19년이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유리가 어머니 예씨부인을 모시고 옥지, 구추, 도조 등을 거느리고 졸본으로 찾아왔다고 했으나 아마도 사람을 보내 불러왔다는 것이 좀더 상식적일 것이다. 그리고 그 동안 고구려로 불러올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18년간이나 아무 소식도 없이 지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추모대왕이 그제야 유리를 부른 까닭은 소서노의 성화가 귀찮기도 했지만 이를 계기로 하루바삐 자신의 적자를 태자로 책봉하여 후계문제를 매듭짓기 위해서였다.
대왕은 예씨와 유리가 오자마자 이미 작정하고 있었다는 듯 황후와 태자로 각각 책봉했다. 그 뿐만 아니라 소서노는 소후(小后), 곧 제2부인으로 강등시켰으니 졸지에 배반당한 소서노의 설움과 하루아침에 더부살이 신세로 전락해버린 비류와 온조 두 형제의 쓰라린 가슴은 어떠했겠는가. 배신의 아픔도 그렇지만 더욱 급한 것은 살 길을 찾아야만 했다. 아직은 대왕이 살아 있으니 당장 죽이지는 않겠지만 뒷날 대왕이 돌아가고 유리가 왕위를 이으면 소서노와 두 아들의 목숨은 어찌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세 모자의 하루하루는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 듯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비류가 아우 온조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 형제는 어찌하면 좋을꼬? 옛날 대왕께서 난을 피해 부여로부터 도망쳐 졸본에 이르렀을 때에 우리 어머니께서 가산을 죄다 털어 왕업을 이루는 데 진력했음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 아니냐? 그런데 이제 어머니는 황후 자리를 빼앗기고 우리 형제도 덤받이 자식 신세가 되었으니 이 무슨 꼴인지 모르겠구나! 대왕께서 살아계실 때에도 이렇거늘 하물며 뒷날 유리가 왕위를 이으면 우리는 꼼짝없이 죽을 몸이다. 이렇게 사마귀나 혹 같은 신세로 구차하게 붙어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새로운 땅을 개척해 따로 나라를 세우는 것이 천만번 낫지 않겠느냐?”
온조가 두말없이 좋다고 하여 두 형제는 당장 어머니에게 달려가 그 일을 상의했다. 눈물을 흘리며 듣고만 있던 소서노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이에 찬성했다. 다만 몰래 떠나지 말고 떳떳하게 대왕께 아뢰고 떠나자고 했다.
그러고 나서 소서노는 두 아들을 데리고 대왕에게 찾아가 새로운 땅을 개척하고자 고구려를 떠나겠다고 했다. 소서노 모자의 말을 들은 대왕은 그들의 결심이 굳은 것을 알고 말리지 않았다. 게다가 많은 재물을 여행경비로 내려주기까지 했다.
서기전 19년 9월. 그렇게 해서 소서노와 두 아들은 졸본 땅을 영영 등지게 되었다. 비류와 온조 외에도 오간, 마려, 을음, 해루, 홀우 등 열 명의 심복과 일족, 그리고 자신의 부족인 계루부의 수많은 백성이 이들의 뒤를 따랐다. 추측컨대 소서노의 나이가 그 해에 만 48세였고, 그녀가 추모대왕을 만난 30세 이전에 과부가 된 사실로 미루어 추산하면 당시 비류와 온조의 나이는 각각 30~25세 전후였을 것이다.
그들은 한산(寒疝)의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서 살 만한 땅이 어디인가 하고 지세를 살핀다. 부아악에서 지세를 살핀 뒤에 비류는 먼저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바닷가로 가서 도읍지를 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열 사람의 신하들은 다른 의견을 내었다.
그들은 이 강 남쪽 땅은 북쪽으로 한강이 흐르고 동쪽으로 높은 산에 의지해 있으며, 남쪽으로 기름진 못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가 가로놓여 있으므로 하늘이 주신 요새지일 뿐 아니라 지세의 이로움이 커서 다른 곳에서는 이만한 땅을 쉽게 얻을 수 없는 형세이기 때문에 이 곳에 도읍을 정할 것을 간청하였다.
신하들은 아주 조심스럽게 간청하면서 자신들의 뜻을 펼쳤지만, 비류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신하들의 뜻을 저버리고 바닷가로 가고자 했다. 그러나 온조는 신하들의 뜻을 받아들였다. 결국 비류와 온조는 백성을 둘로 나누어서 비류는 지금의 인천 땅인 미추홀로 가서 도읍지를 정하였고, 온조는 남아서 지금 경기도 광주의 옛 읍이었던 하남 위례성에 도읍지를 정하였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였다.
비류는 미추홀에 정착하였다. 도읍지는 드러나 있으되, 나라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다. 뒤에 곧 백제에 귀속된 까닭일 것이다. 온조의 십제와 구별하기 위해서 비류가 미추홀에 세운 나라를 이른바 ‘비류백제’ 또는 ‘비류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비류백제의 땅은 습기가 많고 물이 짜서 편하게 살 수 없었다. 예전에 비류가 살았던 곳과는 풍토가 맞지 않았다.
비류는 온조가 사는 위례성 곧 십제의 사정을 알아보았더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은 편안하게 살고 있었다. 비류로서는 부끄러운 일이다. 왕의 고민은 마침내 병으로 이어져 죽음에 이르고, 비류의 판단에 내심 불만을 품고 있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온조의 위례성으로 와서 십제에 귀속되었다. 온 백성들이 기꺼이 온조를 따라 위례성으로 온 사실을 기리기 위하여 나라 이름을 십제에서 백제로 바꾸었다. 백제의 국호는 이 때부터 시작되어 나당동맹군에게 나라가 망할 때까지 약 7세기 동안 계속되다가, 다시 견훤의 후백제로 이어져 반 세기 정도 더 그 이름을 떨쳤다.
2. 비류백제(沸流伯帝)
2.1. 『한단고기(桓檀古記)』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에 적혀 있는 비류백제의 건국 경위
연타발(延勃)은 졸본(卒本:전에 고구려의 수도로 사용된 심양 방면) 사람으로 남북의 갈사(曷思:갈사는 큰 강이라는 뜻으로 위 문구에 나오는 남북 갈사는 압록강과 흑룡강을 지칭한다)를 오가면서 재물을 모은 후 B.C. 28-27년에 고주몽이 북옥저(北沃沮:장춘 방면)를 칠 때 양곡 5,000석을 바쳤고, B.C. 26년에 고주몽이 서울을 눌현(訥見:장춘 방면)으로 옮길 때 앞질러 자납을 원하여 유망민(流亡民)을 초무(招撫)하고 왕사(王事)를 권하여 공을 세우고 좌원(坐原:자기가 터전으로 삼고 있는 곳 즉 심양 방면)에 봉받았으며, B.C. 25년에 죽었다. 고주몽이 연타발을 좌원에 봉하였을 때 당시 (고주몽)고구려의 세력이 연타발의 근거지인 심양 방면까지 미치고 있지 않았다. 이는 뒤에 고구려의 세력이 심양 방면까지 미치게 되었을 때 그곳을 연타발의 봉지(封地)로 인정해 주겠다는 뜻이다.
연타발의 딸 소서노는 기묘년(B. C 42년) 3월에 패(浿)․대(帶)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듣고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辰), 번(番)의 사이에 이르러 여기에 살면서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로 10년 만에 몇 만금을 모으고 B.C. 31년에 사람을 보내어 고주몽을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고주몽은 기뻐하며 소서노를 왕비로 삼고 패․대 지역을 다스리는 어하라에 책봉하였다.
그 후 고주몽은 비류를 태자로 삼지 않고 고구려(북부여) 6세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의 딸 예씨(禮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았다. 이는 비류가 친자식이 아니라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고구려의 정통성 때문이었다. 고주몽은 B.C. 59년에 고구려(북부여) 6세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의 딸 예씨와 결혼하여 다음해 B.C. 58년 10월에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가 죽을 때 유언으로 고구려의 대통(大統)을 이어 받았으나, 골본(忽本:일명 卒本 당시 고구려의 수도인 심양 방면)에 있는 고구려 무리들이 고주몽을 죽이려 하므로 고주몽은 이들을 피하여 비류수(혼하) 상류로 도망가서 고구려를 세운 후 분열된 고구려(북부여) 무리들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고구려왕이 고구려(북부여)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다고 보고 고구려(북부여) 6세 고무서 단제의 딸 예씨(禮氏)의 몸에서 난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았다. 이에 비류(沸流)는 자신이 비록 적자는 아니지만 고주몽을 친아버지처럼 섬기며 입국을 도왔는데도 맏이(伯)인 자신을 태자로 삼지 않고 유리를 태자로 삼은데 대하여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 후 B.C. 19년에 고주몽이 죽자 비류는 패(浿)․대(帶) 지역에서 스스로 임금(帝)의 위(位)에 올라 고구려의 정통성이 맏이(伯)인 자기에게 있다는 뜻으로 백제(伯帝)라 칭하였다. 그러나 모두가 비류(沸流)를 따르지 않아 비류가 장악한 지역은 소서노와 비류의 근거지인 패․대 지역에 국한되었다. 이때 비류가 사용한 "비류(沸流)"라는 칭호는 물(水)+불(弗)+ 흐른다(流)는 뜻이 합쳐진 것으로, 물(水)은 혼하를 뜻하고, 불(弗)은 천제의 아들 즉 지상의 임금을 뜻하며, "流"는 혼하를 따라 하류로 내려 왔다는 뜻이다. 고대에는 하늘에 있는 해를 "불"이라 불렀는데, 하늘에 있는 "불"은 하늘나라 임금(천제)을 뜻하였고, 지상에 있는 "불"은 지상의 임금을 뜻하였다. 사서에는 비류와 고구려(북부여) 6세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와의 관계가 적혀 있지 않으나, 비류가 고구려(북부여)의 임금을 뜻하는 "弗(불)"자와 강을 뜻하는 "水"자 및 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 왔다는 "流"자를 사용하여 자신의 칭호를 만든 것을 보면, 비류는 자신이 고구려(북부여)의 대통(大統)을 물려받았다고 자칭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비류가 고주몽으로부터 친자식같이 대우받았지만 적자(適子)가 아니라는 이유로 고주몽으로부터 태자로 책봉 받지 못하자 맏이라는 이유만으로는 유리(琉璃)와의 정통성 싸움에서 이기기 어렵다고 보고 고구려의 정통성 외에 고구려(북부여)의 정통성까지도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비류는 "비류(沸流)"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고구려(북부여)의 정통성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한 외에 "백제(伯帝)"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자신이 맏이(伯)이기 때문에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도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였다.
2.2.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적혀 있는 비류백제의 건국경위
비류의 아버지는 우태(優台)이고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이다. 소서노는 우태(優台)에게 시집 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沸流)고 다음이 온조(溫祚)였다.
고주몽은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 봄 2월에 부여에서 남으로 달아나 졸본에 도착하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소서노(召西奴)를 데려다가 왕비로 삼았다. 소서노가 주몽의 기업을 창건함에 대하여 자못 내조가 있었기 때문에 고주몽의 사랑함과 대접이 특히 후하여 비류 등을 대하는 것이 자기의 소생자와 같았다.
그 후 고주몽이 부여에 있을 적에 예씨(禮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유류(孺留 혹은 유리)가 찾아오자 유류를 태자로 삼아 왕위를 계승하게 하니 비류는 이에 불만을 품고 도당을 거느리고 패(浿), 대(帶) 두 강을 건너 미추골에 이르러 살았다.
위 문구에 나오는 미추골(彌鄒忽))의 미(彌)는 용(龍)을 뜻하고 용은 천제(天帝)의 아들을 뜻한다. 그리고 추(鄒)는 조(祖) 또는 고(古)와 같은 뜻이고, 골(忽)은 고을을 가리킨다. 즉 미추골(彌鄒忽)은 어떤 특정 지역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고 천제(天帝)의 아들을 칭한 사람이 있는 곳(수도)이라는 뜻의 보통명사이다. 『고기(古記)』에 의하면 비류백제의 수도인 미추골은 패수(태자하)와 대수(혼하)가 하류에서 서로 만나는 패․대 지역에 있었다.
2.3.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적혀 있는 비류백제의 멸망경위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비류백제가 온조왕 시대에 멸망하였다고 적혀 있으나 정확한 연도는 적혀 있지 않다.
비류는 미추골이 토지가 습하고 물맛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어 돌아와 위례성을 보니 도읍이 자리 잡히고 백성이 안락하므로 드디어 뉘우침 끝에 죽으니 그 백성이 다 위례성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 때는 비류가 한반도에 터전을 마련하려고 무리를 거느리고 한반도로 건너온 후 상황이다. 따라서 위 문구에 나오는 미추골은 요동의 패․대 지역에 있는 미추골이 아니고 한반도에 있는 미추골이다. 삼국유사에는 이곳이 인주(仁州: 아산군 인주면)라고 적혀 있다. 비류는 패․대 지역에 살고 있던 무리들이 동북쪽에 있는 고구려 영역으로 도망감으로써 패․대 지역이 텅 비자 홍성 금마 마한을 만나 땅을 할양받아 한반도에 터전을 마련하려고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배를 타고 홍성 금마와 가까운 아산만으로 와서 지금의 아산군 인주면에 일시 정착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마한이 멸망한 후이고, 온조백제가 마한 지역을 점령하고 있으면서 비류의 정착을 용납하지 않자 비류는 뉘우침 끝에 죽고 그 백성들은 다 위례성으로 가서 온조에게 귀순하였다.
『삼국사기』에는 미추골이 삼국사기를 지을 당시의 인주(今仁州: 지금의 인천)라고 적혀 있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인주(仁州)라고 적혀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 건치연혁조(建置年革條)에 의하면 인천부(仁川府)는 고려 인종 원년에 설치되었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아산현(牙山縣) 건치연혁조(建置年革條)에 의하면 인주(仁州)는 고려 초에 설치되었다. 즉 『삼국사기』에 적혀 있는 금인주(今仁州)는 지금의 인천이고, 『삼국유사』에 적혀 있는 인주는 아산군 인주면이다. 조선시대에 지은 『동사강목(東史綱目)』과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인주가 지금의 인천이라고 적혀 있다.
미추골(彌鄒忽)은 지금의 인천이다 세속에 전하여 오기를 문학산 위에 비류성(沸流城)의 터가 있고 성문의 문짝 판자가 지금도 남아있으며, 성 안에 비류정(沸流井)이 있는데 물맛이 시원하다고 한다. 여지승람에 실리지 않아 한스럽다. (『동사강목』)
여지지(輿地志)에 이르기를 미추골은 바로 비류가 도읍하였던 곳이다. 지금의 인천부 남쪽에 산이 있는데, 이름 하여 남산(南山)이라 하고 또 일명 문학산이라고도 한다. 산 위에 성이 있는데, 대대로 비류왕(沸流王)이 도읍했던 곳이라 전해온다. 왕이 노하여 분개하다 죽은 까닭에 애분성이라고도 불렀다. 인천부 남쪽 10 리에 해평(海坪)이 있고, 그 위에 큰 무덤이 있는데, 담장을 둘렀던 옛 자취가 완연하다. 돌로 만든 사람이 넘어져 엎드러진 것이 매우 큰데, 세속에 전하기를 미추왕의 묘(墓)라고 한다. (『증보문헌비고』)
비류가 요동 지역에서 배를 타고 한반도로 온 것은 마한이 멸망한 것을 모르고 마한을 만나 땅을 할양받아 한반도에 다시 나라를 세우기 위한 것으로 보이므로, 저자의 견해로는 위 문구의 미추골(彌鄒忽)은 인천이 아니라 홍성 금마와 가까운 아산군 인주면이 맞다고 본다. 동사강목 등에 인주(仁州)가 비류의 터전이라고 적혀 있는 것은 『삼국사기』 견해를 따른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비류백제의 멸망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 나온다.
온조왕(溫祚王) 37년(A.D. 19년) 한수(漢水)의 동북 부락이 흉년이 들어 민가 1천여 호가 고구려로 도망해 가고 패(浿)․대(帶) 사이는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백제본기』)
대무신왕 2년 봄 정월 백제민 1천여 호가 와서 항복하였다. (『고구려본기』)
위 문구에 의하면 A.D. 19년경 비류백제(沸流伯帝)의 근거지인 패․대 지역은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이 무렵은 고구려가 A.D. 14년에 태자하(太子河) 중․상류 지방의 양맥(梁貊)과 심양(沈陽) 방면의 현도군 고구려현(高句麗縣)을 점령한 후 요동반도 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을 때이다. 이때 패․대 지역에 살고 있던 비류백제 무리들은 동북쪽에 있는 고구려 영역으로 도망을 갔다.
일부 사학자는 위 백제를 온조백제로 보고 당시 온조백제의 북쪽인 지금의 황해도 지방과 평안도 지방에는 최리(崔理) 나라(樂浪)가, 함경도 지방에는 동옥저(東沃沮)가, 강원도 지방에는 동예(東濊:저자는 강원도 지방 나라<樂浪>로 본다)가 각 있었으므로, 백제인들이 고구려로 도망갔다는 위 문구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비류백제, 온조백제, 구태백제의 역사가 함께 적혀 있는 사실을 간과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착각이다. 또 일부 사학자는 비류백제는 이때 멸망하지 않고 그 후에도 온조백제 남쪽에 존재하면서 요서(遼西)와 중국동해안 지방 등지로 진출하였다가 광개토대왕의 백제 정벌 때 일본열도로 쫓겨 갔다고 주장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나 『북사(北史)』 등에 의하면 요서(遼西)나 중국동해안지방으로 진출하여 동이(東夷)의 강국이 된 백제는 비류백제가 아니고 구태백제이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비류가 세운 나라는 온조왕 시대에 멸망하였다고 적혀 있다.
3. 연맹체로서의 비류와 온조
온조의 백제와 달리 비류가 세운 비류백제는 당대에서 끝나 버렸으므로 역사 속에 그 자취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신화 속에서는 비류의 존재가 오히려 더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비류가 온조와 따로 도읍지를 정한 것을 순전히 지세에 대한 개인적 취향이나 선택으로만 볼 수는 없다. 백성을 나누어 도읍을 정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다른 데에서 찾기도 한다. 사학계에서는 비류와 온조의 이야기를 ‘형제시조 설화’라 보고, 이 설화는 비류와 온조의 두 집단이 연맹 관계를 이루고 있었던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처음에는 연맹체의 주도권을 비류계가 장악하였다가 후기에 와서는 온조계가 왕위를 차지하게 된 것으로 본다. 다른 기록에서 백제의 시조가 비류왕이었다고 한 것을 보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이 학자들은 신화 속의 온조와 비류 형제를 피붙이로 단정하지 않고, 나라와 나라 사이를 형제 또는 부자 관계로 묘사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따라서 비류와 온조는 다른 정치 집단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비류와 온조가 이주하기 전의 역사를 주목한다. 그들의 출생지는 주몽의 고구려이다. 그런데 그 곳은 본디 비류국 땅이었고 뒤에 고구려에 귀속되었다. 따라서 비류라는 이름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비류는 주몽의 실제 아들이 아니라 고구려 건국 이전부터 있었던 비류국의 후예로서 토착세력인 것이다.
그러면 토착세력이었던 비류와 온조 형제가 자기 땅을 차지한 주몽과 유리 부자의 왕위세습을 인정하고 함께 남행하였으면서도 도읍지를 정하는 과정에서 갈라선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백성들은 왜 둘로 나뉘어서 제각기 비류와 온조를 따랐을까?
비류 형제를 따른 백성들은 자기들의 나라를 굴복시킨 주몽 세력의 핍박으로 나라 잃은 서러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라 잃은 굴욕감을 극복하기 위해 비류 형제의 남행을 따랐을 것이다. 열 신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주몽과 생사고락을 함께 한 신하들이 아닌, 비류국 또는 토착세력의 신하였던 까닭에 고구려에 병합되면서 비록 다시 신하로 중용되긴 했어도 실권은 거의 없었던 사람들이다. 말이 신하이지 언제 쫓겨날지 알 수 없는 상태에다, 주몽이 죽고 유리가 왕위에 오르는 날에는 그들의 장래가 더욱 위태롭다. 그래서 비류 형제가 남행하여 새 나라를 세우려 하자 그들의 뜻을 좇아갔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처지를 고려한다면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형제가 굳게 뭉쳐 강고한 나라를 세워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헤어진 것은 고구려에 복속된 집단이긴 해도 비류계와 온조계는 서로 다른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온조는 부드럽고 어진 사람이었다. 비류가 신하들의 말보다 자신의 고집을 앞세웠던 것에 비해, 온조는 신하들의 뜻을 존중하였다. 비류가 두 차례나 자기 의견을 펼치고 이를 관철시키는 데 비해, 온조의 주장은 이야기의 어느 대목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주몽의 건국신화에서 비류계 곧 비류국의 송양왕과 달리 온조계가 전혀 드러나지 않았던 까닭도 온조계는 주몽과 정면으로 맞서 겨루지 않고 그들의 정착을 용인한 때문이 아닌가 한다.
주몽 부자를 피해 남행을 결정한 것도 온조가 아니라 비류였다. 비류의 주장에 온조의 반응은 없다. 그저 묵묵히 따를 뿐이었다. 앞선 이야기에서는 고구려를 떠나 남행한 뒤에 지세를 보고 도읍지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갈라져 나라를 세웠는데, 이 이야기에 의하면 남행하기 전의 모의 단계에서 이미 따로 나라를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서 애초부터 형제가 제각기 나라를 세우는 것을 기정사실화해 두고 있다.
형제가 어머니를 모시고 협력하여 함께 나라를 세우지 않고 처음부터 따로 나라를 세우려는 계획을 가졌던 것은, 주몽이 그들의 땅을 차지하여 고구려를 세우기 이전에 이들 두 사람은 별도의 정치 세력이었음을 뜻할 수 있다. 다만 이들 두 사람은 주몽 세력에 의하여 함께 나라를 잃었으며, 토착세력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한 주몽의 정략적 혼인에 의하여 잠시 동안 왕자의 지위에 있었다는 동류의식과 연대감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온조백제에 귀속되기는 하나, 원래는 비류가 백제 건국의 입안자이자 주체자였음을 알 수 있다.
4. 비류계 신화와 온조계 신화
한 이야기에 따르면 백제의 시조는 온조이고 비류는 입지를 잘못 선택하여 부끄러움을 느끼고 병들어 죽음으로써 비류백제가 온조백제에 귀속된 것처럼 이야기된다. 그러나 또 막상 남행하자는 주장도, 백제의 시조도 비류인 것처럼 그린 이야기도 있다. 백제 건국 과정을 이야기하면서 온조와 비류에 대하여 서로 어긋나게 이야기하는 두 가닥의 신화가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신화를 전승하는 집단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비록 온조가 남하한 고구려계 부여족들을 통일하여 백제를 건국하고 백제의 시조가 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되, 비류계 집단들은 온조의 백제 건국만을 이야기하는 데에서 만족할 수 없다. 백제 건국 이전에 고구려의 주몽 부자로부터 벗어나 세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계획을 주체적으로 입안한 것도 비류이고, 또 온조를 설득하여 남하를 감행하는 주도자 노릇을 한 것도 비류였을 뿐 아니라, 비류는 온조와 별도로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다. 따라서 비류의 역사적 공적을 제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조계 집단이 백제의 건국 과정을 순전히 온조 중심으로 전개하면서 비류를 도읍지 선정의 실패자로 이야기하는 데 대하여 비류계 집단들은 백제 건국 이후 상대적으로 소외되긴 했지만 비류 중심의 신화를 별도로 전승하였다.
비류계와 온조계가 연맹을 맺어 백제를 일으켰으되 두 집단이 제각기 자기 집단 중심으로 문제를 파악하고 신화를 이야기한 까닭에 백제 건국신화는 온조계 신화와 비류계 신화가 대립적으로 형성․전승된 것이다. 이러한 신화의 대립성은 뜻밖에 백제신화를 풍부하게 만들었으며 백제의 건국 과정을 한층 자세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었다.
비류계 신화에 의하면, 비류는 온조에 비하여 주몽 부자에 대한 불만이 한층 더 컸음을 알 수 있다. 주몽이 부여에서 도망하여 비류국에 이르렀을 때 자기 어머니 소서노는 경제적 지원을 하면서 나라를 일으키는 데 많은 힘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유리가 찾아오자 자기들을 홀대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 비류의 주장이다. 물론 이 주장은 비류계 집단의 공통된 생각이다. 그러나 온조는 그러한 인식이 없었다. 온조계 신화에 의하면 그저 태자에게 자신들이 용납되지 않을 것이 두려웠을 따름이다. 상당히 소극적인 인식이다.
온조(溫祚)라는 이름이 지닌 뜻은 그의 이러한 기질을 그대로 드러낸다. 따뜻하고 너그러운 마음씨를 지닌 왕이다. 옛말의 ‘온’은 곧 ‘백’의 수를 나타낸다. 모든 것을 아우를 정도로 도량이 넓은 왕이다. 따라서 왕의 이름 온조와 나라의 이름 백제는 역사적 사실을 상징적으로 잘 갈무리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넓은 도량의 지도자는 투쟁적 영웅에 일시적으로 패배하는 듯하나 마침내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최종적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주몽 부자에 대한 비류와 온조의 상반된 인식은 개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집단적인 것이다. 주몽이 비류국에 정착하여 고구려를 세울 때부터 비류계와 온조계는 적대적이고 우호적인 차이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주몽은 비류수 유역에 정착하면서 비류계의 송양왕과는 끊임없이 투쟁하고 다투었으나 온조계와는 다툰 일이 없다. 주몽신화에 온조계는 아예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비류계는 주몽 세력으로부터 많은 희생을 당하였고 마침내 생존을 위해 항복까지 하고 고구려 건국에 이바지하게 된다. 자연히 원한이 깊을 수밖에 없다. 주몽은 그러한 원한을 해소하기 위하여 비류계의 대표인 비류를 왕자로 포용해 줌으로써 비류계의 불만을 잠재웠다. 그런데 유리가 나타나자 사태는 급변하여 주몽이 유리를 태자로 삼고 왕권을 이양할 조짐을 보임으로써 비류계는 적극적인 활로 모색의 일환으로 본디 토착세력이었던 온조계를 설득하여 함께 남행길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온조계는 사정이 다르다. 비록 주몽의 고구려에 복속되었으되, 아무런 원한이 없다. 고구려 이전에 온조계는 지배 집단이었던 비류국의 시달림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주몽이 고구려를 세워 비류국을 제압하고 자신들을 포용하여 왕자 세력으로 받아들인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길 만하다. 다만 유리가 갑자기 나타나 왕자의 자리를 위협하는 일이 두려웠을 뿐 주몽에 대한 특별한 원한이 있을 리 없다. 유리의 위협이 두려워 남행하긴 했으되 주몽과 맺은 인연은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것이었다. 초기 백제의 기틀을 닦고 시조왕으로서 권위를 지키는 데에는 고구려와 같은 강국을 아버지 나라로 인정하며 혈연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여러 모로 든든한 일이다.
실제로 현존 문헌에 의하면 북부여, 고구려(졸본부여), 백제(남부여) 등 부여족 국가들은 한결같이 동명왕 주몽을 시조라 하고, 그를 숭배하는 제전을 제각기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온조의 아버지가 동명이라 주장하는 것도 그러한 부여족 일반의 상황과 관계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비류계 집단은 ‘우대’를 아버지라 하고 주몽을 의붓아버지로 이야기함으로써 사실상 주몽을 아버지로 여기지 않는 데 비하여, 온조계가 전적으로 주몽을 아버지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은 역사적 맥락에서 빚어진 일이다. 따라서 온조계 신화에서는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이며, 그 아버지는 주몽’이라고 시작하는 반면에, 비류계 신화는 ‘백제의 시조는 비류왕이며, 그 아버지는 우대’라고 시작하여, 두 신화는 첫머리부터 완전히 그 가닥을 달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백제 신화의 한 갈래만 주목하고 비류와 온조를 형제로 또는 주몽의 아들로만 이해하여서는 백제의 건국 과정을 온전하게 포착할 수 없음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및 도판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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