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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기

통일기는 대략 무열왕(재위 654~661) 즉위시부터 고구려멸망(668)까지로 볼 수 있다.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신라에서는 신흥 귀족인 김춘추가 김유신과 제휴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어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서서히 주도해 나갔다. 그러나 고구려의 반격을 우려하여 백제가 침공해 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회담이 결렬되자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어 백제를 멸망시키려 하였다.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2대에 걸치는 동안 신라는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여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 고구려를 각각 멸망시켰다.

654년 김춘추는 진덕여왕이 죽자 즉위하여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655년(무열왕 2) 1월에 김흠운(金歆運, ?~655)이 고구려와 백제의 동맹군이 변방 33성을 빼앗자 출전하여, 백제 땅 양산에 진을 치고 조천성을 공략하려다가 백제군의 내습으로 전사했다. 그리고 김법민(金法敏; 文武王, 626~681)은 태자로 책봉되었다. 9월에 김유신은 백제의 도비천성(刀比川城: 忠北 永同郡의 飛鳳山城)을 공략하였으며, 이때 백제왕의 문란한 정치를 보고 백제를 멸망시킬 것을 무열왕에게 건의하였다. 656년에 백제에서는 성충(成忠, ?~656)이 옥중에서 임종을 당하여 왕에게 상소를 올려 외적의 침입이 있을 것을 예언하고, 육로는 탄현(炭峴, 沈峴)을 막고 수로(水路)는 기벌포(伎伐浦, 백강구)를 방비하라면서 죽었다. 657년(무열왕 4)에 하슬라(何瑟羅 : 지금의 강릉) 지역이 말갈(靺鞨)과 맞닿아 있어 백성이 편안하지 못하므로 이곳에 설치되었던 북소경(北小京)을 폐지하여 주(州)를 설치하고 도독(都督)을 두어 지키게 하였으며, 실직(悉直: 지금의 삼척)으로 북진을 삼았다.

660년(무열왕 7) 7월에 무열왕, 당나라에 청원하여 당나라가 백제 정벌의 대군을 파견하자, 왕자 법민(法敏:文武王)과 김유신 등에게 5만의 군사를 주어 당나라 군사 13만과 연합하여 사비성(泗沘城)을 함락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김인문은 신구도행군부대총관(神丘道行軍副大摠管)으로 소정방(蘇定方, 592~667)과 연합하여 백제(百濟)를 멸망시켰고, 파진찬(波珍湌)·각간(角干)으로 승진되어 당나라에 머물렀다. 백제는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이 사비성을 점령해서 결국 31대 678년만에 멸망하였다. 이에 복신(福信, ?~663) 등은 끝까지 항전하다가 백제가 망하자 승려 도침(道琛)과 함께 주류성(周留城: 韓山)을 근거로 부흥(復興) 운동을 일으켰다.

661년(문무왕 원년) 김유신, 7월 나당 연합군과 함께 고구려를 정벌하러 가는 도중인 9월 옹산성(瓮山城:대전시 鷄足山城)에 있는 백제의 잔적(殘賊)을 토벌하고, 12월 당나라군에게 군량미를 실어다 주었다. 당나라는 소정방(蘇定方, 592~667)을 앞세워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사수전투에서 연개소문이 격퇴하였다. 그래서 당나라군의 철수했고 고구려 정벌은 실패로 돌아갔다.

662년(문무왕 2)에 다시 문무왕은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쳤지만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하였다. 왜냐하면 고구려 연개소문이 사수 전투에서 방효태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를 궤멸시켰기 때문이다. 백제 복신은 일본에 가 있던 왕자 부여 풍(扶餘豊)을 옹립, 일본의 원병을 데려오게 하여 사비성(泗沘城)을 점령한 당군을 포위, 막대한 손해를 주었으나 당장(唐將) 유인궤(劉仁軌)의 원군에 쫓겨 임존성으로 퇴각하였다.

663년(문무왕 3)에 멸망한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텐지천황(天智天皇)이 4백여 척의 배와 2만7천여 명의 구원군을 파견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는데, 복신은 스스로 상잠(霜岑)장군이 되어 다시 출격, 나당연합군에 큰 타격을 주었으나, 내분이 생겨 도침을 살해한 뒤 부여풍마저 시해하려다 도리어 죽음을 당하였다. 그래서 김유신은 백제의 부흥군(復興軍)을 두솔성(豆率城:周留城)에서 대파할 수 있었다. 664년에 문무왕은 부인들의 의복을 당제(唐制)에 따르게 하였다. 665년에 고구려 연개소문(?~665)이 사망했고, 김유신은 당 고종으로부터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에 봉해졌다. 667년에 김유신은 문무왕을 따라 당군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11월 환군하였고, 소정방이 사망하였다.

668년(문무왕 8) 김유신은 9월 나당 연합군으로 평양을 칠 때 연합군 대총관이 되었으나 왕명으로 금성에 남아 국방을 도맡았다. 고구려 정벌 직후 태대각간(太大角干: 太大舒發翰)의 최고직위에 오른 후 당나라 군사를 축출하는 데 힘써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수복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져 놓았다. 문무왕은 다시 나·당연합군을 형성하여 고구려를 쳤는데, 왕제(王弟) 인문(仁問)은 당나라의 이적(李勣)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나당연합군이 평양을 점령하자 고구려는 28대 705년만에 멸망하였다.